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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커버스커 브래드의 영어 인터뷰 기사 전문

2013.10.04 13:53
대중문화부

인기밴드 ‘버스커버스커’의 미국인 멤버 브래드(29·본명 브래들리 래이 무어) 발언이 뒤늦게 논란을 낳고 있다. 2011년 엠넷의 <슈퍼스타K> 결승전에서 “제작진은 최종 상황을 미리 예견했고, 행동 양식을 주문했다”며 조작설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형편없는(crappy) 유치원 영어교사 1년 만에 대학교수가 됐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브래드가 인터뷰했던 미국 음악전문 사이트 ‘노이지’ 기사를 전재한다.

이하 전문. (*는 편집자 주).

마음은 여전히 오하이오에: 어떻게 브래드는 K팝을 우연찮게 정복했나 - 제이콥 도로프

체육관에서 박수와 꽃종이가 터져나오고, 갑자기 ‘브래들리 래이 무어’(*이하 무어)는 유명해졌다. 사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한국의 술집이나 거실에서 들뜬 마음으로 보았듯이, 그는 한국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백인일 것이다. 무어는 이렇게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음 속에서는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차 있다. 바로 그의 약혼녀와 자유를 되찾는 것이다. 그는 두 달 동안 바깥 세상과 단절돼 있었다. 이번에도 망치면 도망칠 기회를 다시 잡기까지는 오래 걸릴 것이다.

무어가 환호작약하는 1만 명의 군중들 사이에서 대니엘르 베이컨(*브래드의 여자친구·이하 베이컨)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뛰었고, 그녀에게 무대로 뛰어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운동선수인 그녀는 카메라맨과 차단벽을 뛰어넘지만 한 보디가드에 붙잡힌다. 하지만 그 보디가드는 무어로부터 많이 듣곤 했던 그녀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보디가드는 그녀가 지나가도록 놓아두었다.

무어는 예전에 “사람들이 너희 둘을 떼어 낼지도 몰라”라 말했던 경고를 떠올리며 그녀 손을 더욱 꽉 잡는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재빠르게 덮쳤지만, 걱정스런 순간이 지난 뒤 무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들을 덮친 이들은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잘 알려진 슈퍼스타K 참가자들이었다. 강력한 팝 트리오 버스커버스커의 동료 등 음악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무어와 베이컨을 감싸 안은 것이다.

커플은 적어도 이후 몇 시간 동안은 안전했다. 하지만 무어는 지금 멋진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원래부터 마른 몸인데 슈퍼스타K의 스케줄과 음식 조절을 8주나 하면서 11kg을 감량했다. 서울의 스타일리스트들이 그를 최고급스런 디자이너 옷과 헤어 스타일로 이미지로 바꾸었고, 아직도 보톡스 독 들어 있는 그의 볼살은 빠르게 다시 들어가고 있었다. 무어는 유명 K팝 기계를 만들기 위한 착취를 견뎌왔다. 무언가 과격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와 그의 밴드 멤버들은 앞으로 더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 미국 드러머의 유일한 목적은 밤이 지나기전 슈퍼스타K가 그들에게 타도록 한 호화로운 버스를 회피하는 것이다. 이 버스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2008년 한국에 올 때쯤 무어는 한국 음악은커녕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오하이오의 마이애미 대학(*Miami University in Oxford, Ohio) 마지막 학기에 그와 베이컨(*약혼녀)은 그저 무언가 새로운걸 하기로 했다.

“우리는 나라를 떠나보고 싶었다. 돈이 되는 어떤 일도 하려했다.” 무어가 회상했다. 베이컨은 취업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한글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유치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 한 달에 2000달러(*약 200만원)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루는 수업에 들어갔는데, 그녀가 지원을 했더라. 그리고 24시간 내에 그녀에게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사전 인터뷰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에게‘내 남자친구도 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 했더니 ‘좋다, 그도 데리고 오라: 졸업은 해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 해 가을 서울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떨어진 60만 명의 인구가 사는 천안에 배치됐다. 유치원에서 1년간 영어를 가르친 뒤 무어와 베이컨은 2만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상명대학교에 초급 직위를 꿰차게ㅤ됬다.

“1년 만에 우리는 형편없는 유치원 선생에서 교수(*tenure-track professors·종신직 교수로 가는 과정의 교수)가 됐다.” 무어가 경탄했다. 그 때만 해도 그들은 택시를 타고 메뉴 고를 정도의 한국어를 구사했다.

무어 수업에서 낙제는 했지만 구술시험을 보던 예술대생 김형태는 자신의 밴드인 버스커버스커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밴드 드러머가 군 복무를 위해 떠났고, 이 잘생긴 학생은 무어가 드럼을 칠 줄 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무어 실력은 녹슨 상태였고 한번도 드럼을 진지하게 친 적이 없었지만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드러머는 멸종 위기 종이었다. 어쨌든 김형태도 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어의 첫 연습날 밴드 리더인 장범준이 슈퍼스타K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서 ‘케이블 TV 왕’으로 칭송돼온 쇼로, 다가오는 시즌에 200만명의 참가자들이 신청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거의 모든 참가자들의 솔로로 신청을 했고 슈퍼스타 K는 그룹을 선보이고 싶어했다. 상명대에서 예술을 전공한 소년같은 싱어송라이터 장범준은 이전 시즌들의 예선에서 탈락한 경력이 있었지만 그들 제작진은 그가 밴드를 이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아메리칸 아이돌 류의 프로그램이 버스커버스커 존재를 알게 된 것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참가해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이는 그동안 K팝 업계가 얼마나 한국 록 계의 내장까지 빼먹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어와 그 밴드는 완전히 무명이었다. 천안에서조차.

“그들은 방송에서 다양한 사연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불러서 쇼가 성공적으로 돋보이게 하려고 한 거다.” 무어가 설명했다. “그들이 저희에게 먼저 연락했는데.”

밴드는 150명의 참가자들이 맞붙는 방송 시험무대인 “슈퍼스타 위크”까지도 올라갔다. 그들은 ‘투개월’이라는 한국 10대 남녀 듀오와 짝이 돼 그룹 샤이니의 2009년 히트송 ‘줄리엣’을 불렀다.

“그들(*제작진)이 우리를 그 아이들(*투개월)과 연결이 됐을 때 이미 이야기가 짜여져 있었다: 투개월이 합격하고 버스커버스커가 탈락하는 것”이라고 무어가 말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는데 우리는 나중에 알게 됐다…(제작진은)우리가 상품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몇 주 뒤 버스커버스커는 귀가 조치됐는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부른 ‘줄리엣’ 버전이 방송을 타면서 하룻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슈퍼스타K의 세심한 녹화 후 후반 작업 덕분이기도 하다.

“녹음된 것이 너무 안 좋아서 투개월이 다시 가서 그들 노래 부분을 다시 녹음해야했다. 왜냐하면 그 정도 공연으로 합격을 했다는 걸 아무도 믿을 리가 없었으니까”라고 무어가 설명했다. “그리고 쇼의 마이크 시설이 너무 안 좋아서 과하게 제작됐다. 그들이 제 드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오토튠(*사후 음향 보정작업)했다. 그러니 방송에 틀었을 때 프로 다운 좋은 소리가 나온 것이다.”

거침없는 K팝 온라인 커뮤니티는 버스커버스커의 탈락에 엄청나게 격분했고, 슈퍼스타K는 밴드를 다독여서 쇼의 ‘톱11’에 다시 넣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장범준과 김형태가 대학을 그만 두어야 했고, 무어도 그의 교수직을 끝내야 했다.

“제가 제작진에게 물어봤다. 내가 쇼를 위해 일을 그만 둔다면 음악으로 돈을 벌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그들은 아마 못 벌 것이라고 했다.” 무어가 회고했다. “지금 하는 일보다 돈을 더 많이 벌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는 하지 말라고 그들이 그랬다. 나의 스토리를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위해 하라고 하더라.”

슈퍼스타 K의 그늘 아래 돌아가자마자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갖고 있는 특유의 어두움이 밴드 위로 드리워졌다. 아무도 무어에게 참가자들이 ‘집’이라고 부르면서 합숙할 지방의 저택이 독재적인 방식으로 꾸려진다는 것을 경고하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휴대전화기와 지갑은 압수됐다. 버스커버스커가 탈락하기 전까지는 그 곳에서 갇혀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들의 자신감은 바닥이어서 일주일 치의 옷만 챙겼지만, 시청자들이 주는 갑작스런 인기 때문에 무어는 프로그램을 꼬박 2달 더 하며 격리됐다.

그 와중에 그는 다이어트를 위해 샐러드와 두부 식사를 강요당했다. ‘비자발적 메이크업’은 매일의 의식이었고, 쇼의 제작자들이 참가 음악인들의 용모에 대해 종종 가시돋힌 말을 쏟아냈다. 더 괴상한 것은 슈퍼스타K가 매일 주로 10대 후반과 20대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보톡스 요법을 이용하라고 요청한 일이다. 많은 참가자들이 며칠 동안 이 요청에 강요당했는데, 자신도 처음엔 저항하다가 결국엔 하게 됐다고 무어가 기억했다. 어느 날 오후에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버스커버스커를 유일한 다른 헤비 록 그룹 헤이즈와 함께 서울로 데려갔다.

“그 밴드 멤버들은 모히칸 머리 스타일과 금속 징 장신구를 달았고, 우리는 세 얼간이 같았다. 우리는 모두 슈퍼 다운타운의 맨하탄 스타일 고급스런 클리닉에 가게 됐다.” 무어가 몸서리치며 말했다. “모든 것이 무서웠다. 거기에는 키보키언 의사(*안락사를 도와온 의사)가 연상되는 의자가 방 중간에 있었다. 딱 의자 하나만. 그리고 그 의자 위에는 코끼리 인형이 있었다. 내가 앉자 그곳 사람이 인형을 제 무릎위에 올리며 말했다, ‘이 코끼리를 꽉 잡고 싶게 될 것이라고’.”

무어가 질문을 할 새도 없이 바늘이 무어의 볼을 찔렀다.

“눈물. 즉시 눈물이 났다. 소리 안지르고 스스로를 긁지 않으려고 손으로 코끼리를 꽉 쥐기 시작했다.” 그 후 몇일 동안 무어는 음식을 겨우 씹었고 멤버들은 다시는 화장 시술을 안하기로 다짐했다.

한국에서 뮤지션 친화적인 프로그램으로 유명하지만 슈퍼스타K는 음악에 드는 시간과 자원을 많이 할당하지 않았다. 그룹들은 그 생방송 전날에야 ‘금주의 노래를’ 지정받았고 리허설을 할 때 무어는 제대로 드럼 장비를 제공받지 않았다. 대신 버스커버스커는 그들에게 주어진 노래들(전형적으로 K팝의 히트곡들; 한번은 ‘리빈 라 비다 로카’)을 쇠젓가락로 빈 기타 케이스를 두드려 만든 리듬으로 편곡했다. 그들이 그들 악기로 라이브로 연주하기기 위해 (*제작진과)다투기까지 했다.

“그들은 제가 드럼을 치지않고 가깝게만 가고 치는 시늉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어가 웃었다. 결국 슈퍼스타K가 굴복했는데, 그렇게 잡기까지는 수주일이 걸렸다. 초반 두 번의 방송에 나간 버스커의 연주는, 장범준의 기타 앰프가 노래 중간에 떨어져 나가기도 하며 다량의 기술적 어려움을 뚫고 살아남았다.

음악 대신에, 슈퍼스타K는 그들이 말하는 ‘VCR’로 시간을 채웠다. 매일 노예처럼 촬영되고 연극이나 귀여운 ‘미션’이 종종 뒤따랐다. 게다가, 엄청나게 유명상표 홍보를 했다-그 대가로 버스커버스커와 동료들은 노예 급여 정도만 받았다.

“우리는 방송에 나와서 유명하지만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무어가 한국의 일반적인 연예계 법의 이상한 기준을 강조하며 말했다. “우리는 아마추어 신분으로 방송사와 계약을 했다. 그러니까, 코카콜라 선전 제의가 들어오면 하루종일 코카콜라 선전을 찍는다. 하지만 돈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쇼의) 회사에게 지급된다. 우리는 8주 동안 쇼에 연속 참가했고, 8주 동안 선전을 찍었다. 집에 가지고 가는 돈은 한푼도 없었다.” 어떤 날은 그들의 스케줄이 24시간을 넘어서기도 하며, 무어, 장범준, 김형태는 짬을 내서 콘크리트 등에서 잠을 자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참가자들이 슈퍼스타K와 맺은 가장 말도 안되는 희생적 약정은 음원 매출이었다. 금요일밤의 생방송 투표가 끝나면 생존한 참가자들은 은밀히 지방에서 서울로 데려갔다; 항상 보디가드가 대중들로부터 6m 거리를 두도록 했다. 서울에서 그들은 모두 해당 주의 노래를 스튜디오 버전으로 녹음했다. 그럼 다음 월요일에 디지털 음원이 한국의 온라인 소매업자들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저희 노래가 수백만 달러나 매출을 올렸다. 우리 노래 ‘막걸리나’라는 곡은 한 달 반만에 140만 달러 어치라 팔렸는데 거기서 우리에게 돌아온 건 아무 것도 없다.” 무어가 말했다. “우리는 쇼의 두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그룹에는 외국인이 있었고, 제 밴드 동료들은 어릴 뿐만아니라 악보도 읽지 못했다…하지만 우리가 녹음을 할 때마다 1위를 했다. 그게 우리를 붙들어 줬다.”

슈퍼스타K는 버스커버스커를 두 달만인 프로그램 말미에 천안의 무명 그룹에서 전국적 유명세를 가진 밴드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그때 무어와 그의 밴드 동료들은 고립된 채로 있어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신나하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쇼의 마지막 주는 저희에게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왜냐햐면 그 금요일 밤이 지나면 우리는 집으로 갈 수 있게 되니까,” 무어가 기억했다. 쇼에 관계된 모두가 오래전부터 또다른 결승 진출자 ‘울라라세션’이 이길 것으로 대본이 쓰여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면 우리는 정말 우리 침대에서 잠을 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짜 우리 침대.”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마지막 순간도 배신이 따라왔다. 그동안 친해졌던 버스커버스커의 매니저 김석현이 카메라가 돌고 있지 않을 때 넌지시 이야기해줬다.

“그는 계약자였다; 그는 공식적으로 (슈퍼스파K를 소유한) CJ E&M 소속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얘기했다. ‘이봐, 계약상으로는 금요일 자정이 되자 마자 너희들 계약은 끝나고 자유롭게 돼’ ” 무어가 말했다. “ ‘하지만 회사는 너희에게 다르게 얘기할거야.’ ”

“그는 우리와 매일 함께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지만 자정이 되면 당신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그렇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가, ‘아니, 아니, 나도 사라질 거야, 왜냐하면 그 때 내 계약도 끝난다. 우리는 앞으로 볼 일이 없을거야.’ ”

이에 밴드는 두려워졌는데, 매니저가 무어에게 베이컨이 쇼의 최종 결선에 사람들 속에 있을 거라고 비밀스럽게 전해주었다.

“그가 말했어요, ‘그래, 울랄라 세션이 우승자로 발표될 거야. 그들이 감사의 수상 소감을 얘기하고 (너희도) 감사 인사를 해야 될 것이다. 그 때 대니(*브래디 약혼녀)를 무대위로 올라오게 하면 되는거야’.” 무어가 회고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강조했다. ‘브래드, 그녀 손을 놓치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놓으면 안돼, 그리고 그녀 곁을 떠나지마.’ ”

매니저는 또 호화 버스가 자정에 나타나 슈퍼스타 K가 밴드를 초청하면서 ‘인큐베이션 집’이라고만 알려진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했다. 그게 그가 알아야 하는 전부였다.

쇼의 위대한 결말은 계획된 대로 됐다. 울랄라세션의 우승부터 무어와 베이컨의 득의만면한 재회. 그리고 그들은 서울에 있는 CJ 소유의 호화로운 클럽에 가서 호사로운 식후 파티에 갔다. 거기서 가서 동이 틀 때까지 춤을 췄다. 슈퍼스타K의 불길한 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버스커 버스커는 이틀동안 한 숨도 잠을 못 잔 상태였다.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는 그 버스에 안탈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안돼’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친절하다. ‘일단 한숨 자고 내일 얘기하자’.” 무어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얘기했다. ‘우리는 당신들 버스에 안 탈것이고, 그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니를 데리고 천안으로 갈 것이다’.” 장범준과 김형태도 꿋꿋했다. 물론 무어는 그가 저항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제작진에 복종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이들이 택시를 부르면서 새벽까지 이어진 대치가 끝났다. 한 시간 동안 남쪽으로 타고 가서 그들은 각자 집으로 흩어졌고 잠을 잤다. “3, 4일 동안 잠에 취했다.” 미스터리한 저택에 들어간 다른 참가자들은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계약서를 받으며 시즌 ‘애프터 쇼’의 ‘아이돌 슈퍼스타 훈련’을 위해 또 다른 긴 제재 속으로 징집됐다. 슈퍼스타K 2위 밴드의 부재는 뚜렷했고 한국 게시판들에는 K팝 업계에서 유례가 없던 이런 ‘저항아’들에 대해 엄청난 양의 소문과 과찬들이 쏟아졌다. 무어는 그들은 그저 쉬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 막 다시 출발한 이들은 아직 새로 발견된 유명세의 무게를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이 반 주 동안의 동면에서 깨어나, 동네 쇼핑몰로 무어와 베이컨이 장범준에게 선물한 머리에 맞지 않았던 모자를 바꾸기 위해 함께 갔을 때 모든 것이 변했다. 순식간에 엄청난 인파의 굶주린 듯한 10대 소녀들이 나타나면서 타겟이 된 밴드 멤버들은 안전을 위해 무어와 베이컨의 아파트로 두 블록이나 뛰어 피신했다.

숨을 돌릴 시간은 조금 밖에 없었다. CJ의 주요 인물들은 버스커 버스커의 갑작스런 이탈로 인해 전국 방송에서 망신을 당했지만, 그는 오히려 레코드 계약 건 성사를 중계하려는 욕구를 더 심화시켰다. 무어와 장범준은 처음엔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들이 직접 노래를 쓰고 그들의 악기를 연주를 하고 앨범 제작 스태프들을 고르고, K팝의 강남구 지역에서 50 마일 떨어진 천안에서 녹음을 할 수 있는 조건 아래 수용했다.

“저는 (계약 기간을)3년 아래는 들어보지도 못 했다; 보통 7년인데 말인데. 미스에이, 빅뱅, 슈퍼주니어 같은 큰 그룹들은 10년씩 한,” 무어가 말했다. “아마 우리가 그들을 열받게 해서 그들도 우리를 그리 오래 데리고 있고 싶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CJ가 버스커 버스커의 유행이 잠깐 반짝이고 말 것이라고 여긴 것 말고도, 슈퍼스타K의 다음 시즌 홍보를 위해서라도 대회 입상자가 큰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무어는 전했다.

미친듯이 잠 못 이뤄가며 마감을 맞추기 위해 3주 동안 녹음과 믹스작업을 한 버스커 버스커 1집 앨범(한국의 전통적 명칭)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두 달 만에 경쾌한 기타 음악의 팝은 1300만개의 음원과 10만장의 앨범을 팔았다-불법 복제로 가득찬 한국의 음반 시장을 봐선 엄청난 양이다. 그들의 레코드는 계속해서 놀라움을 자아냈다; 올해 4월달 그들의 예전 히트송 ‘벚꽃 엔딩’이 프로모션도 없이 다시 음악 차트 1위에 오른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그 노래는 봄과 동의어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무어와 그의 밴드 멤버들은 자축하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CJ에서의 시간들, 그 6개월 동안은 그 방송 프로그램 때와 같았다. 징글징글했다. 매일, 하루종일 스케줄이 있었다. 계약상으론 그래도 되니까,” 무어가 말했다. 이 때 그의 정신적 지주는 이제 그가 어디를 가든 함께 갈 수 있는 베이컨이었다.(이는 밴드가 6가지 조건으로 내건 것 중 하나다). 그들의 말도 안되는 K팝 일정표는 무어 커플이 석사 학위를 마쳐야 되는 시기와 맞물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기자회견과 매진된 콘서트를 마치고 집에 와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쪼아댔다. CJ는 그들의 계약이 만료되는 6월30일 이후 또 계약을 하려 했지만, 자유의 몸이 되자 버스커버스커는 다시 한번 한국의 표준을 어겼다;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휴식을 가졌다.

이 트리오는 이제 한국에서 최고의 밴드가 됐다. 그러한 주목를 받은 지 9개월 만에 산업의 족쇄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는 어떤 한국 음악인이 상상도 못할 이상한 횡재다. 무어와 그의 동료들은 일반적인 인간처럼 먹을 수 있고 잠 잘 권리를 찾기 위해 맹렬하게, 본능적으로 방어하려다가 우연히 카프카의 성에 발을 들이게 됨으로서 왕이 됐다.

이번 주 버스커 버스커 마니아들은 늘 그랬듯,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오늘 자로 새 앨범이 나왔고, 한국의 모든 주요 차트를 점령하고 있다. 국내에서 제일 큰 온라인 매장인 멜론의 음악차트까지 휩쓸었다 -여태까지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부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투어 스케줄이 한가해졌다. 또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승낙 없이는 인터뷰 스케줄 조차 잡지 못하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청춘뮤직과 계약했다-(이 사인은)어느 정도는 한국에서 시스템을 거치지 않을 때 평판에 입을 손상을 만회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 위치에 있는 것은 행운이다.” 무어가 말했다. “내가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싸웠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데 많은 적을 만들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지만 우리 세 명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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