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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가구·20평 이하·월세···자살 위험군에 드러난 '계급'

2017.09.10 19:42 입력 2017.09.11 10:59 수정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전국, 시군구 단위). 자료 공공의창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전국, 시군구 단위). 자료 공공의창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2003년 이후 매년 1만명 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8.7명으로 회원국 중 1위다. 2위인 일본(18.7명)과도 격차가 크다. 한국은 2003년 이후 한번도 OECD 1위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구와 지리정보, 과거 자살자 통계 등을 이용하면 이른바 ‘자살위기자’가 많이 사는 지역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바탕으로 해당 지역에 대책을 집중하면 자살을 상당부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영리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窓)’은 10일 세계자살예방의 날을 맞아 ‘2017~2018년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를 공개했다. 이 지도는 전국 17개 시도 252개 시군구, 3491개 읍면동을 자살위기자 비율이 높은 순서로 구분해 5개 등급을 매겼다. 17개 시도 중 A등급을 받은 곳은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이었다. 대도시에 자살위기자가 많지만 광역자치단체 안에서도 동네마다 큰 차이를 보여 지역별로 세분화된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전국 4500명을 설문조사하고 10년 간의 지역별 실제 자살자 분포를 비교분석한 결과, 주거환경이 자살과 상관관계가 크다는 사실이 수치로 확인됐다. 지역에 상관없이 ‘20평 이하’, ‘월세’로 살고 있는 이들 중에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는 자살위기자가 많았다. 우울, 스트레스, 분노 등 정신적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 요인도 주된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자살을 줄이려면 고위험군의 특징과 분포를 분석, 복지·주거정책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자살위기자, 수도권·대도시에 몰려

한국에서 자살이 크게 늘어난 계기는 1997년 IMF 외환위기였다. 이후 20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21만명이 넘는다. 강릉시에 해당하는 인구가 사라진 셈이다. 2015년 한 해에만 1만3513명이 세상을 등졌다. 질병과 가난 속에 죽음을 택하는 노인들, 성적이나 장래를 비관하는 청소년들, 지역·연령을 망라하고 자살자들은 갈수록 늘어간다.

여론조사기관들의 모임인 ‘공공의창’이 10일 공개한 지도는 ‘자살위기자’가 어느 지역에 많이 사는지 보여준다. 자살예방센터 등 한정된 인프라를 효과적으로 배치해, 자살을 예방하는 효과를 높이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서울). 자료 공공의창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서울). 자료 공공의창

공공의창은 전국을 자살위기자 분포에 따라 A~E등급으로 나눴다. 분석 결과 자살위기자는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에 몰려 있었다. 17개 시도 중 가장 많은 지역은 서울이었고 인천, 경기도(이상 A등급), 울산, 대전, 대구(이상 B등급) 등이 뒤를 이었다. 가장 적은 지역은 전라북도였다.

구 단위로 따져도 서울이 가장 취약했다. 서울의 25개구 중 17개구가 A등급에 속했다. 그러나 동 단위로 가면 총 424개동 중 A등급은 34.2%인 145곳으로 떨어졌다. 서울시나 몇몇 구가 전체적으로 취약한 것이 아니라 특정 동네에 자살위기자가 몰려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도 비슷했다. 경기도 44개 시군구 중 A등급은 43.2%인 19곳이지만 읍면동으로 따져보면 558곳 중 186곳, 33.3%로 낮아진다. 자살위기자가 많이 사는 동네의 위험요인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면 광역시·도 단위의 전체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전국 4500명 설문, 통계청 정보와 비교·분석

공공의창은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조사와 지리정보, 2006~2015년 실제 자살자 통계, 4500명 대상 설문조사를 사용해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에는 ‘자살위기자’가 어느 지역에 많은지 읍면동 단위로도 나온다.

자살위기자는 전국에서 4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추출했다. 설문 문항은 18개인데, 이 중 “‘나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어’라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십니까”에 공감한다고 답한 28.8%(다소공감 22.3%+매우 공감 6.5%)와 “최근 1년 사이에 자살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란 질문에 “생각해봤다”고 답한 15.5%(종종 생각함 11.3%+자주 생각함 4.2%)를 ‘자살위기자’로 분류했다. 두 문항중에서는 ‘자살충동’에 가중치를 부여했다.

이렇게 추출한 자살위기자의 지역별 비율과 2006~2015년 실제 자살자의 지역별 분포를 비교해 보니 상관율은 84.1%가 나왔다. 자살위기자가 많은 지역에서 실제로도 자살자가 많이 나올 개연성이 높다는 뜻이다.

조사팀은 17개 광역시·도, 252개 시·군·구, 3491개 읍·면·동을 모두 인구 대비 자살위기자 비율에 따라 정렬했다. 자살위기자 비율이 높은 상위 20%는 A등급(파란색), 21~40%는 B등급(주황색), 41~60%는 C등급(노란색)으로 분류했다. D등급과 E등급은 흰색으로 두었다. 행정구역의 면적이 아니라 인구 비율에 따라 보정한 ‘카토그램’으로 지역들을 지도에 표시했다.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전국, 읍면동 단위). 자료 공공의창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전국, 읍면동 단위). 자료 공공의창

서울 강북의 경우 20~30대 자살위기자가 많았던 반면 강남에서는 35~44세가 주된 위험군으로 나타나는 등 연령대에서는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대도시를 벗어나 지역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나이대가 높은 층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이들이 많았다. 강원도와 대구경북지역, 경기도의 군 단위에서는 40~50대가 많았다. 특히 제주도는 40대와 60대에 자살위기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열악한 주거환경’ 공통점

자살위기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구사회학적 요인은 ‘열악한 주거환경’이었다. 공공의창이 설문조사로 추출한 자살위기자들은지역별로 연령, 세대구성 등은 달랐지만 주택 면적이나 점유형태에서는 공통점이 뚜렷했다. 사는 곳의 면적은 대전·충청지역을 빼고는 모두 ‘20평 이하’라는 경향성을 보였다. 점유형태에서는 ‘월세’가 모든 지역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꼽혔다.

서울 강남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남구의 ㄱ동은 자살위기자 비율에서 3491개 읍면동 중 전체 11위, 서울에서는 1위였다. 동네의 위치만 봐서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피스텔과 고시원이 밀집해있고, 1인가구가 전체가구의 60%를 넘는 지역이다. ‘20평 이하’와 ‘월세’라는 위험요인에 딱 들어맞는 동네인 셈이다.

자살과 주거환경의 연관성은 다른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8일 충남도청에서 열린 자살예방 대토론회에서 김도윤 충남 광역 정신건강 복지센터 부센터장과 최명민 백석대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지방의 한 대도시에서 발생한 자살 사건 169건의 자료와 유가족 면담 내용, 지역 특성 등을 분석해 발표했다. 자살자들의 평균 나이는 45.2살이고, 20∼50대가 68.1%를 차지했다. 여성보다 남성이 2.27배 더 많았다.

자료 공공의창

자료 공공의창

거주 형태는 다세대주택에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았다. 33.7%가 1인 가구였고, 절반 이상이 원룸 등 다세대주택(50.3%)이나 고시텔·여관 등(6.6%)에 살았다. 도시개발에 밀려 슬럼화된 구도심, 도시 외곽의 대규모 아파트단지, 도시 난개발에 따른 유흥가와 신축 원룸 혼합 지역 등에서 자살이 많이 일어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팀은 이런 지역에선 주민들 사이에 소통이나 유대가 적고 지역 정체성도 부족하며 주거환경이 열악해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분석했다.

■자살 예방 인프라, 위험지역에 집중해야

공공의창은 정부가 ‘정신건강증진센터’ 등 자살예방 인프라를 확대할 때 이 지도를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도를 만든 ‘지방자치데이터연구소’ 최정묵 부소장은 “지리정보를 통해 자살위기자가 더 많이 있는 지자체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며 “이러한 정보를 토대로 대응예방 인프라를 효과적으로 확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32개 시군구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지도와 현재 인프라 설치 현황을 비교해보면 서울시 동북부 기초지자체 및 남서부지자체, 경기 남서지역 기초지자체 등에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데이터]1인가구·20평 이하·월세···자살 위험군에 드러난 '계급'

복지확대를 위한 정부보조금을 편성할 때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노인이 많이 사는 곳에 노인관련 복지사업 정부 보조금을 추가하듯이, 자살위기자가 많은 지역에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주거환경과 자살률의 상관관계가 명확히 입증된다면 주거비 지원을 늘리는 방법도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복지부 자체적으로도 시군구 단위로 원인을 찾고, 자살예방대책을 각각 세우고 있다”며 “읍면동 단위까지 지도가 나온다면 자살을 예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2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내년에 보건복지부에 자살예방 전담부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최정묵 부소장은 “자살의 사회경제적 요인이나 문화적 요인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만, 자살위기자들이 많은 지역에 복지지원을 확대함으로써 이들이 겪는 문제를 완화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지난 7월 자살 종합대책을 입법화하면서,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강조했다. 자살예방협회 오강섭 회장(성균관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일본처럼 빠른 통계분석을 통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맞춤형 예방’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백종우 교수는 “자살은 위기상황에서 의료, 복지, 사회, 법적 서비스 안전망이 없을 때 그리고 연결에 실패할 때 일어난다”며 고위험군을 찾아 서비스와 연결시키는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응급실에서 자살 시도자를 지원하는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가 전국에 42개 있지만 아직은 시범사업에 그치고 있다.

■‘공공의창’은 어떤 곳

지난해 9월 출범한 공공의창은 리얼미터·리서치뷰·우리리서치·인텔리서치·조원씨앤아이·코리아스픽스·타임리서치·휴먼리서치·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피플네트웍스·서든포스트·지방자치데이터연구소 등 12개 중소여론조사기관이 모인 비영리 공공조사 네트워크다. 지난해 4·13 총선 때 여론조사기관들이 선거판세 예측에 실패한 뒤, 여론조사의 목적과 방법론, 정확도 등에 대한 고민이 생겨났다.

이 기관들은 ‘우리 사회를 투명하게 반영할 수 있는 조사, 정부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공동체를 강화할 수 있는 조사를 해야 한다’는 데에 뜻을 모으고 공공의창을 출범시켰다. 정부나 기업의 의뢰를 받지 않고, 비용은 십시일반 자체 조달해 공익성이 높은 조사를 실시한다. 12개 기관이 돌아가며 매달 1회 ‘의뢰자 없는’ 공공조사를 실시해 발표한다. 조사 방법과 결과는 누구든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개한다. 이번 ‘자살위기자 예방대응 마이크로 지리정보학’ 조사는 회원사 중 한 곳인 지방자치데이터연구소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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