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47초의 고백

2017.10.02 10:50 입력 2017.10.02 17:41 수정

[정윤수의 오프사이드]3분47초의 고백

무려 3분47초!

사랑을 고백하기에는 너무나 짧지만 유엔 연설이라고 하면 달라진다. 지난 9월21일, 뉴욕의 유엔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정확히 22분이 걸린 연설 중 무려 3분47초를 평창 동계올림픽에 할애했다. 그것도 북한 핵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한 후 이 대회를 통하여 동북아의 평화 공존이 새로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중 한 대목이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3분47초의 고백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고작 100㎞를 달리면 한반도 분단과 대결의 상징인 휴전선과 만나는 도시 평창에 평화와 스포츠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이 모입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우의와 화합의 인사를 나눌 것입니다. 그 속에서 개회식장에 입장하는 북한 선수단, 뜨겁게 환영하는 남북 공동응원단, 세계인들의 환한 얼굴들을 상상하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결코 불가능한 상상이 아닙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평창올림픽 유치에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유치 결정 이후 진행된 엄청난 재정 투입과 환경 파괴를 수반하는 무리한 공사 그리고 이로써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공허한 계산들에 반대해왔다. 파괴를 수반한 건설, 게다가 종국에 가서는 다시 철거하도록 되어 있는 그 현장에 직접 가보기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 완공된 횡계리의 개·폐회식장은 1200여 억원의 사업비가 들어간 올림픽 사상 최초의 행사 전용 시설이다. 대회 이후 3만5000 가변석과 가설 건축물이 모두 철거된다. 차후에 올림픽 기념관을 조성하고 고원훈련장을 복원하게 되는데, 이 철거와 조성과 복원에 재원과 시간이 더 필요하다.

‘최순실 게이트’의 시커먼 음모의 냄새가 부분적으로 평창올림픽에 스며들었던 사실도 여전히 불쾌하다.

그러나 어쩌랴. 올림픽은 겨우 넉 달 남았다. 반납할 수도 없고 대충 치를 수도 없다. 어떻게든 재정 낭비를 줄여야 하며 악착같이 사후 활용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무엇보다 넉 달 후의 대회 자체를 의미 있게 치러내야 한다. 단순히 ‘세계인의 축제’니 ‘지구촌 한마당’이니 같은 진부한 구호로는 어렵다.

그러던 차에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이 들려왔다. 이 연설은 물론 거시적인 차원에서 북핵 위기를 극복하고 동북아의 평화 안정을 국제 사회에 호소한 것이지만, 살짝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환경 파괴와 재정 낭비에 의하여 전반적인 무관심과 냉소가 엄연한 상황의 절박성으로 보면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 비록 애초부터 계획된 일은 아닐지라도, 평창올림픽에 투여된 그 많은 시간과 비용은 나름의 가치를 획득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후보 때부터 평창올림픽에 대하여 비교적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해왔다. 1월25일, 강원도청을 방문했을 때 “북한 참여로 평화올림픽으로 부각된다면 대회 성공과 막혀있는 남북관계를 풀어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4월20일에는 “금강산 육로를 통한 북한 선수단 대회 참가, 북한 동계스포츠 인프라 활용 방안 협의, 북한 응원단의 속초항 입항, 금강산 온정각 일대에서 올림픽 전야제 개최” 등 실질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7월24일에는 대통령 신분으로 평창을 찾아 “북한이 평창올림픽 참가를 결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요 인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실무 작업에 돌입한 것도 유의미하다. 베를린에서 열린 ‘코리아 글로벌 포럼’에 참석한 천해성 통일부 차관은 “북한이 참가할 수 있도록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 국제사회와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이 포럼의 기조연설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은 핵 및 미사일 활동을 중지하고, 한·미는 군사훈련의 축소 또는 (일시적) 중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쌍중단’이다. 일부 유럽 국가가 선수단 안전을 이유로 올림픽 참가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현지 상황에 적극 대처하는 내용이다. 최문순 강원도지사와 김동일 도의회 의장, 민병희 도교육감도 ‘올림픽 평화를 촉구합니다’라는 공동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북한의 빙상 선수들이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것에 청와대가 즉각 우호적인 평가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부 종목에 한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북한에 와일드카드를 주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장웅 북한 IOC 위원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큰 문제가 생길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며 일각의 ‘보이콧’ 논란을 일축했다. 이런 정황들 속에서 문 대통령은 세계를 향한 첫 유엔총회 연설 중 3분47초를 ‘평화를 위한 평창올림픽’에 할애한 것이다. 아주 정교하지는 않아도 즉흥적인 발상은 아니다.

평화와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교재인 요한 갈퉁의 저서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다. ‘평평’이라고 줄여 부른다. 이를 활용하건대 적어도 내년 2월에 한하여 ‘평평평’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평화를 염원하는 평창올림픽’ 말이다. 유엔 연설에서 문 대통령도 “평화의 위기 앞에서 평창이 평화의 빛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이라고, 일부러 라임을 맞춰 표현했다.

선언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무엇이 ‘평화적 수단’인지도 검토해야 한다. 북한이 마지못해 엉거주춤 나오는 것은 ‘평화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평화의 진정한 개념과 스포츠의 관계에 대해 의외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던 대한체육회와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매우 정치편향적인 기구인 IOC가 공식적으로는 ‘정치와 스포츠의 분리’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추석을 앞두고 ‘평평평’을 상상하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추석 직후, 모든 관계자가, 특히 평창올림픽 실무 기관들이 ‘과정의 평화’를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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