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선수촌의 ‘기억 상징성’

2017.10.30 21:11 입력 2017.10.30 21:14 수정

[정윤수의 오프사이드]태릉선수촌의 ‘기억 상징성’

지난 주말의 경향신문 ‘커버스토리’를 흥미롭게 읽었다. 반세기 역사를 뒤로하고 문을 닫게 된 태릉선수촌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했다. 선수촌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의 기억까지 부분적이나마 복원했기 때문에 읽을 만했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태릉선수촌의 ‘기억 상징성’

문화재청은 2009년 조선 왕릉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면서 능역 안에 있는 부적합 시설을 모두 철거하겠다고 밝혔고 그 대상으로 서삼릉의 젖소개량사업소와 의릉의 옛 국가정보원 건물 그리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인순왕후가 잠든 강릉 사이에 있는 태릉선수촌이 지목되었다. 문화계에서는 상징적으로 한두 건물을 남길 수는 있지만 조선 왕릉의 원형 복원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체육계는 올림픽 금메달 116개로 상징되는 선수촌의 초창기 공간들, 즉 승리관이나 월계관 등 8개 건물은 보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 2015년 7월 문화재 등록을 추진했으나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두 개의 문화유산이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명분에서나 현실에서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조선 왕릉의 역사적 권위가 더 압도적인 듯 보인다. 등재 여부를 떠나서라도, 근세 이래 쇠락한 왕조의 왕릉은 마구잡이 개발의 대상이었던 바, 그 복원은 중요하다. 일제강점기에 효창원의 효창원골프장(1921년), 의릉의 청량리골프장(1924년), 유릉 터의 군자리골프장(1929년) 등이 들어섰고 5·16 쿠데타 이후에는 서삼릉의 한양골프장(1964년)과 뉴코리아골프장(1966년), 태강릉의 태릉골프장(1966년)이 들어섰다. 특히 서삼릉 지역은 당초 123만평에서 7만5000평으로 급격히 줄어들면서 그 자리를 농협, 한양골프장, 뉴코리아골프장,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등이 차지한 바 있다. 이렇게 서삼릉 부지가 함부로 매각되던 1961년부터 1969년 사이의 문화재관리국장 4명 모두 육사 출신이었고 군사정권 초기에 문화유산이 정권 마음대로 매각되거나 함부로 용도 변경되어 쓰였다. 1966년에 설립된 태릉선수촌도 이런 맥락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근대 문화유산으로서 태릉선수촌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인 문화유산에 비해 아직은 근대 문화유산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게 사실이지만 국내외의 여러 도시들에서 그들이 살아낸 20세기의 기억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문화적 업무로 대두되고 있다. 비단 정치사회적인 유산만이 아니라 일상 문화 전반의 건물, 조형, 공간 등은 물리적 보존을 넘어 한 시대의 집합적 감수성의 온전한 보전과 그 의미의 풍부한 해석을 위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사실 나는 작년 5월 이 지면에서 태릉선수촌에 대해 쓴 바 있다. 그때의 관점은, 물리적 보존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 선수촌에 응결된 각종 기억의 1차적인 수집과 전면적인 해석이었다. ‘국위선양’ 일변도의 기억만으로는 근대 문화유산이라는 지평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폭넓은 공감대를 얻기도 어렵다는 취지였다. 게다가 이번 가을에 새로 문을 연 충북 진천의 선수촌은 거의 모든 종목에 걸쳐 최고의 시설로 완비되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의 실질적 기능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고 봐야 한다.

지난 주말 경향신문의 커버스토리가 매우 시의적절했지만 한편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1966년에 왜 국가는 엘리트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공간을 만들었는지, 그 공간의 구성 요소는 어떠한지, 전반적으로 군 병영의 축소판이며 생활수칙 또한 사관학교 이상의 엄격함을 요구했던 그 정신적 지향의 의미는 무엇인지 좀 더 탐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해당 기사에서 어느 선수는 “태릉에 있는 동안은 1년 열두 달을 거기서 보냈어요. 고등학교·대학교 졸업식도 못 갔어요. 명절 때도 집에 못 갈 때가 허다했죠”라고 회상했다. 물론 고된 훈련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룬 곳이며 돌아보면 그때만큼 절실하면서도 즐거웠던 적은 없다는 회고다. 많은 엘리트 선수들이 태릉선수촌을 그렇게 기억한다.

그럼에도 그의 말처럼 “한창 나이에 갇혀서 운동만” 했던 선수촌의 기억이 국위선양의 좋았던 추억으로만 확정해도 좋은지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태릉선수촌의 과거 기억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뿐만 아니라 진천선수촌의 미래에 대해서도 더 많은 논의를 할 수 있으며, 이는 단지 엘리트 선수들의 생활수칙 문제를 넘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의미 있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는 1년 전의 생각을 조금은 수정하게 되었다. 선수촌의 주요 시설을 완전 보존하는 것은 여러 모로 무리지만, 봉건 왕조의 유산을 위해 20세기의 현대사가 녹아있는 문화유산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반대한다.

반드시 원형 전체일 필요는 없다. 물리적 공간(Space)의 기억이란, 불가피한 경우, 원형 전체나 부지 전부를 보존하지 않고서도 그 장소성(Placeness)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를테면 조명탑이나 전광판으로 최고 수준의 기억 상징물을 만들 수 있는 예술적 기법을 구사할 수도 있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압도적인 가치와 충돌할 경우에는 완전 철거라는 극단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적 상징성의 극대화를 통한 기억의 보존’을 차선책으로 구사해야 한다.

체육계는, 이를 위하여 근대 문화유산 보존에 관한 문화사적 원칙을 다시금 분명히 하되 그 실사구시를 위해 이 분야에 경험이 많은 건축가, 예술가, 문화기획자 등을 만나야 한다. 태릉선수촌의 문화사적 가치를 보다 세밀하게 확정하고 이를 ‘기억 상징물’로 보존해낼 수 있는 예술적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체육인의 땀이 배인’이라는 감성적인 접근은 더 이상 방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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