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 터질 때마다

2018.04.02 21:16 입력 2018.04.02 21:17 수정

청와대 홈페이지에 설치된 청원 게시판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만명 이상이 동의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청와대가 공식적인 답변을 한다. 여론에 대한 책임정치를 구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다.

[학교의 안과 밖]무슨 일 터질 때마다

청원 게시판이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 대중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청원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중은 선정적이거나 선동적인 주제에 쉽게 휩쓸린다. 특히 청와대 청원 게시판처럼 익명으로 동의를 표시할 수 있는 경우에는 주제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엄청난 동의가 몰릴 수 있다. 무책임한 대중 선동이 가능한 것이다.

그 결과 청원 게시판에서 20만명 이상 동의를 받아 접수된 청원들 중 상당수는 대통령 권한 밖의 것, 혹은 정부 개입의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약속이니 청와대는 대답을 해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답변해야 하는 청와대의 입장도 곤란하다. 이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식적이고 무난하면서, 반발이 비교적 적은 답변으로 얼버무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때 교육이 자주 선택된다는 것이다. 흉악 범죄가 발생해 국민들의 공분을 사면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천안함 침몰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면 “안보교육을 강화”하고,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발생하면 “안전교육을 강화”한다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선 학교의 시간표는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에 의해 이미 꽉 차 있다. 국가 교육과정은 수많은 교육전문가들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간 연구하고, 현장 교사들의 검토를 거친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 교육’을 급조해 추가한다면, 애써 만든 교육과정이 누더기가 되거나 ‘○○ 교육’을 형식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교육을 하루살이 누더기로 만드는 데는 진보, 보수 정권의 차이가 없다. 이번 정권에서 특별자문위원회까지 만들어 마련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대책은 결국 학교에 ‘메이커 교육’ ‘코딩 교육’을 추가하는 것이고, 저출산 고령화 대책은 초등학교 저학년 하교 시간을 늦추어 학교를 저렴한 어린이집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니, 분명 학교에 ‘양성평등 교육’ ‘성폭력 예방교육’을 강화하라는 공문이 날아올 것이다.

교육은 학생의 성장과 발달 단계에 맞는 수준과 분량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각 학년별 교육 내용과 교육 분량은 이러한 수준과 분량을 고려해 배치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서, 혹은 지금 쟁점이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교육 내용이 추가된다면, 이렇게 세심하게 배치되고 구성된 교육과정의 기초가 흔들리며 결국 공교육 전체가 균형을 잃어버린다.

인간의 신경계는 유한하다. 중요하다고 주장되는 것들을 한번에 모두 학습할 수 없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신경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 인간의 신경계는 학습과정을 통해 성숙하면서 구조화된다. 이 중요한 시기에 잘못 구조화된 신경계는 어른이 된 다음 바꾸기 어렵다. 나이가 어릴수록 새로운 교육요소의 도입이나 변경은 신중해야 한다. 작은 것 하나를 바꾸거나 도입하더라도 교사를 비롯한 교육전문가들의 폭넓은 토론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 무슨 일 터질 때마다 추가되는 ‘○○ 교육 강화’라는 대책은 제발 그만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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