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외반출 불가”···문화재 밀수범들과의 피말리는 싸움 50년

2018.11.05 12:25 입력 2018.11.05 18:25 수정

불법 반출된 지 19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선제 묘지 앞면. 이선제 묘지는 옆면에도 글자를 새겨 상감기법으로 마무리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불법 반출된 지 19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선제 묘지 앞면. 이선제 묘지는 옆면에도 글자를 새겨 상감기법으로 마무리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1998년 5월 부산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소속인 양맹준 감정관의 눈에 심상치않은 감정품이 보였다.

‘분청사기 상감 경태 5년명 이선제 묘지’라는 글씨가 새겨진 묘지(墓誌)였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행적, 자손의 이름, 묘지(墓地)의 이름, 그리고 나고 죽은 때 등을 기록한 글이다. 명문으로 보면 ‘분청사기 상감 경태 5년명 이선제 묘지’는 ‘경태 5년’ 즉 1454년(단종 2년) 글씨와 문양을 백상감한 분청사기로 만든 이선제라는 인물의 묘지라는 것이다. 이선제(1390~1453)는 광산 이씨 상서공파의 5세손이었으며, 세종~단종 등 세 임금을 모시면서 34년동안 학자이자 사관, 관료로 활약한 인물이다.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않은 유물이었다. 양감정관은 ‘내 목이 칼이 들어와도 해외로 반출할 수 없다’는 식으로 버텼다. 그러자 반출을 꾀한 인물은 돌돌 말아서 고무줄로 묶은 만원권 뭉치를 내밀었다. 그러나 양 감정관은 “뇌물 공여로 신고할 수 있으니 흥정하려 들지 마라”고 일침을 놓고는 “유물은 여기에 두고 3~4일 후에 귀국할 때 찾아가라”고 했다. 유물 반출은 양 감정관 덕분에 일단 무산됐다.

이 유물은 도굴품이었다. 광주에 있던 이선제의 무덤에서 도굴되었지만 아무도 도굴된지 모르는 유물이었다. 도굴신고가 없었으니 양감정관으로서는 도굴품인지 몰랐다. 그랬으니 묘지를 압류할 수도,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양 감정관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유물을 압류하지는 못했지만 미술을 전공한 최춘욱 감정관에게 실측도를 그리게 했다. 또 묘지 앞쪽과 뒤쪽을 묘사한 그림을 담은 제보 조서를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과 각 공항, 항만 문화재감정관실에 보냈다.

한달 뒤 기어코 일이 터졌다. 밀매단이 서울 김포공항의 세관원을 매수한 뒤 감정절차를 아예 생략한 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이선제 묘지’를 일본으로 밀반출해버린 것이다. 광산 이씨 문중은 신문에 도난-밀반출 기사가 날 때까지 이른바 ‘이선제 묘지’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본 적도 없었다. 무덤 안에 있었던 묘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지난 50년간 문화재감정관실은 총 85만점의 유물을 감정했고 이중 1만2000건이 넘는 유풀의 해뵈반출을 불허했다.|박도화의 ‘국외반출 불가 문화재 현황과 감정기준 개선방안’ 논문에서

지난 50년간 문화재감정관실은 총 85만점의 유물을 감정했고 이중 1만2000건이 넘는 유풀의 해뵈반출을 불허했다.|박도화의 ‘국외반출 불가 문화재 현황과 감정기준 개선방안’ 논문에서

광산 이씨 문중은 신문에 난 도물 및 밀반출 기사를 보고서야 부랴부랴 묘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당연히 도굴 당한 시기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상의 분신과 다를바 없는 묘지를 잃어버렸으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1454년(단종 2년) 땅속에 묻힌 ‘이선제 묘지’는 언젠가인지도 모르는 시점에 도굴되어 유통되었고, 후손들조차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1998년 6월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던 것이다.

이 유물은 결국 뒤늦게 불법반출을 확인한 일본측 소장자의 조건없는 기증에 16년만에 무사히 환수됐고. 지난 6월17일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됐다. 이 과정에서 양맹준 감정관이 기록해놓은 실측도와 제보조서는 이 유물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뿐이 아니다. 화원화가인 이의양(1768~?)이 1811년 그린 ‘송호도(松虎圖)’도 역시 문화재감정관실이 ‘해외반출 불가’ 판정을 내려 국내에 남게된 유물이다. 또 회화식 지도를 근간으로 그린 실경산수화인 10폭 병풍 ‘진주성도’ 역시 문화재급의 판정을 받고 해외반출이 금지됐다. 중국회화인 ‘소동파 소상’은 1885년 청나라 문인인 정정로(1797~1859)와 조선말기의 역관인 홍승현이 쓴 찬문이 있는 반신 초상화이다. 이 역시 문화재감정관실이 ‘반출금지’ 판정을 내린 작품이다.

해외로 밀반출됐다가 무사히 환수된 ‘이선제 묘지. 도굴된지도 모른채 일본으로 밀반출됐지만 실측도와 유물 그림을 그려놓은 문화재감정관과 문중,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 그리고 뒤늦게  불법반출품임을 알고 기증한 일본인 소장자 등의 노력으로 무사히 귀환됐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해외로 밀반출됐다가 무사히 환수된 ‘이선제 묘지. 도굴된지도 모른채 일본으로 밀반출됐지만 실측도와 유물 그림을 그려놓은 문화재감정관과 문중,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 그리고 뒤늦게 불법반출품임을 알고 기증한 일본인 소장자 등의 노력으로 무사히 귀환됐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문화재감정관실은 해외로 빠져나가는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1968년 처음 만들어진 기관이다. 1968년 당시 김포공항과 부산 수영비행장에 신설됐다. 현재는 공항과 항만 19곳에서 문화재감정위원 60여 명이 근무한다.

문화재감정관실이 지난 50년동안 검사한 물품은 총 85만여점인데 그중 1만2000여 점의 일반동산문화재의 국외반출을 막았다.

지난해에는 2만2000여점 중 76점의 국외반출을 불허했다. 50년간 도자공예품이 6만7000여점(33.3%)으로 가장 많고 회화(29.5%) 공예 및 민속자료(22.2%), 조각(4.1%), 전적류(3.5%) 순이다. 감정관실의 반출금지 판정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것이다. 국가 및 시도지정 문화재와 등록문화재는 물론 비지정문화재의 해외 수출 및 반출은 모두 불허되고 있다. 비지정문화재라도 도난 및 도굴 신고만 들어오면 적발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선제 묘지’의 경우처럼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줄 모르거나, 혹은 신고가 들어오지 않을 경우 국외 반출 여부를 판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또 문화재의 세부목록이 없어도 판정은 어렵다. 예컨대 어느 가문에서 전적류와 서적 등 1000여 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한 경우를 상정해보자. 이 경우 잃어버린 문화재의 세부목록이 없다면 대체 무엇을 도난 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도난신고를 해봐야 도난목록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다면 수사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문화재청은 오는 9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문화재감정관실 5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함께 ‘문화재감정관실의 현재와 새로운 모색’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다. 박도화 문화재감정위원은 “최근 10년간 반출 금지된 동산문화재는 총 1420점인데, 전체 감정 수량의 0.7%”라며 “도자 공예품, 민속자료, 전적류 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현재 감정관실에서 감정하는 해외유출물품은 50년 이상된 것 중에서 가치가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물품을 대상으로 한다. 박 위원은 “현재 문화재 매매업자들은 고미술 거래를 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유물의 국외반출 금지 규제를 완화하라고 요구한다”며 “내년 상반기에 동산문화재 규정 개선안을 마련해 입법화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김현권 문화재감정위원은 “제작 시점 50년이라는 기준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외반출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50년 혹은 100년 같은 단순한 기준보다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고민 속에서 문화재별로 상이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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