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임시정부 100돌, 아직도 민주공화제는 완성되지 않았다

2019.04.10 20:31 입력 2019.04.10 23:17 수정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19년 4월11일 신익희, 이동녕, 조소앙 등 애국지사 29인은 중국 상하이에 모여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의 탄생을 알렸다. 그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며 우리나라가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선언했다. 애국지사들은 또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새로운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임시헌장 10개 항은 민주와 공화, 평등, 자유, 평화 등 근대 민주주의 헌법의 요소를 다 갖추었다. 이러한 헌법의 가치는 제헌 헌법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해 대한민국의 출발이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임시정부 헌법에서 주목할 조항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민주공화제’란 문구를 헌법에 명시한 것은 세계 헌정사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황제가 다스린 전제군주국이었다. 일제 강점 직후만 해도 복벽주의, 사회주의, 민주공화주의 등 여러 정치이념이 제시됐다. 이런 와중에서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주와 자유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특히 3·1운동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학습장이었다. 3·1독립선언서는 새로 건립될 조국은 정의·인도·자유의 나라여야 한다고 못 박았다.

임시정부는 해방을 맞기까지 27년간 임시의정원의 의회정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임시정부의 활동은 의정원의 법령에 기반해 이뤄졌다. 의정원은 모두 5회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고 법령 제정을 위해 39차례의 회의를 소집했다. 임시정부가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유일 통합정부를 지켜갈 수 있었던 것은 의회정치의 힘이었다. 광복 후 민주와 자유의 가치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통해 더욱 신장됐다. 특히 6월항쟁과 뒤이은 헌법 개정을 통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등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됐다.

반면 공화주의의 진전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공화주의는 군주와 같은 특정한 개인이나 계급이 아닌 공공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념이다. 임시헌장 제3조는 남녀·빈부·계급의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며 평등 가치를 내걸었다. 정치·경제·교육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공화주의 정신이다. 제헌 헌법은 정의·인도·동포애를 명기하며 공화주의 가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현실에서 헌법의 공화주의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빈부·계급 간 격차는 커져가고 있다. 배려, 협력, 포용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특권층이 부와 권력을 독식하면서 소수자 등 소외계층은 각자도생해야 할 처지다.

10일 국회에서는 임시의정원 100주년 행사가 열렸다. 11일에는 정부 차원의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린다. 여야 원내대표 5인은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내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 중이다. 그런 행사도 필요하지만 임시정부의 통합정신, 공화주의정신을 되살리는 게 중요하다. 100년 동안 헌법 제1조를 지켜온 민주공화제를 뿌리내려야 한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 민주주의를 내실화하고 공공의 가치를 실천하는 일, 이것이 100년 전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응답이다. 언제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공허하게 외치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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