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지’ 넘어 아시아와의 협업으로

2019.08.04 20:45 입력 2019.08.04 20:46 수정

한·일 경제대전이 시작됐다. 8월2일 일본은 27개국으로 지정하고 있던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일본에서 전략물자에 해당하는 1100여개의 제품을 한국으로 수출할 경우, 3년에 한 번 묶음 단위로 심사하던 것을 매번 각 품목별 개별 심사를 거쳐야만 가능하고 심사기간도 일주일에서 석 달여로 늘게 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소재 수출규제에 이은 후속 조치다. 부품·소재·장비를 주로 일본에서 조달해온 한국의 제조업체, 특히 중소기업들에 큰 제약이 될 전망이다. 일본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임을 언급해왔다.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 현금화 절차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국내에서도 행정부가 사법부의 결정에 개입하는 것이 헌법적 가치에 비춰 옳지 않다는 주장과, 외국 기업 자산을 국내에서 현금화하는 것 자체가 국제법 관점에서 선전포고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부딪친다. 우려와 전환의 시기가 다가온다는 생각이 복잡하게 엉킨다.

[양승훈의 공론공작소]‘한·중·일 삼국지’ 넘어 아시아와의 협업으로

산업 관점에서 부품·소재·장비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된 것이 반갑다. 제조업 진화와 대기업 편향을 넘어선 선진국형 일자리 창출을 위해 부품·소재·장비 강소기업이 필요하다는 논의는 진보진영에서 논의되어 왔지만, 분명한 정책 목표로 공표된 건 김대중 정권의 ‘소재 부품산업 육성전략’ 이후 20년 만이다. 안현호 전 산업부 차관이 쓴 <한·중·일 경제 삼국지>라는 책이 떠올랐다. 책에 따르면 일본은 대기업의 투자 부족, 제조업의 생산성 저하, 저출산에 따른 고령화, 조립 제조업 경쟁력의 약화라는 구조적 모순들이 쌓여 있다. 1차 경제규제는 ‘Made in Japan’의 마지막 보루인 반도체·디스플레이 부품·소재·장비 분야를 ‘전략무기’로 내세웠지만, 돌아온 것은 엔지니어를 에밀레종의 희생양마냥 짜내서 뭔가를 해낸다는 ‘공밀레’의 역습이었다. 대기업 총수들은 국산화가 ‘어렵다’는 호소보다는, 개발을 하기 위해 주 52시간제를 유예해달라는 등의 ‘민원’을 많이 전달했다. 어떤 기자는 반도체 엔지니어의 말을 빌려 “여름휴가만 반납하면 해낼 수 있다”는 목소리를 전한다. 책은 그냥 두면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하청 노릇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우수 기술인력 인건비를 국가가 지원하고, 벤처캐피털 등 금융시장 여건도 강화해야 한다고 전한다. 정부는 1조원의 소재산업 투자, 6조원의 금융 공급과 설비투자, 연구·개발(R&D), 인수·합병(M&A) 자금 지원을 발표했다. 재정의 여력이 있다면 훨씬 더 큰 재원을 투자해야 한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이 훨씬 더 큰 재정지출을 권고한 나라다.

한·일 경제대전은 제조업 진화를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행하기에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기회의 창’이 열린 상황이다. 미국 조지아텍 테일러 교수가 쓴 책 <혁신의 정치>는 국가의 혁신 역량이 상승할 동기로 국가적인 위기의식의 공유를 꼽는다. 그러한 전제에서 글로벌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고 시장 실패를 조정하면 혁신의 정치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위기의식과 응전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혁신의 정치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전환을 하려면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평을 ‘한·중·일 경제 삼국지’보다 넓혀야 한다. 한국 제조업은 한일청구권협정 원조금 외에도 일본과의 지속적인 기술협력을 통해 성장해왔다. 현대중공업은 가와사키조선소의 생산설계를 전수받았고, 삼성전자는 퇴직한 일본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도요타식 생산관리기법을 고민하지 않은 제조회사는 없다. 예전같이 갈 수 없다면 지금까지 밟아온 경로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2일 열린 아세안+3(한·중·일) 회담에서 싱가포르 외교부 장관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신뢰 관계 증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는 상호의존을 높여가야 하는 만큼 화이트리스트 대상국을 축소할 게 아니라 아세안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발언했다. 일본의 10대 수출국은 미국과 독일을 제외하면 모두 아시아 국가다. 한국도 미국과 멕시코를 제외하면 나머지가 아시아 국가다. 싱가포르 외에도 베트남, 인도, 말레이시아가 비중을 키우고 있다. 생산의 가치사슬 역시 아시아 전체로 확장된 지 오래다. 삼성전자나 LG전자의 베트남 공장은 중국의 생산성을 뛰어넘고 한국에 기술혁신을 전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무역의 특혜는 구미 선진국들에 초점을 맞춰왔다. 한·일 경제대전을 아시아 전체의 국가와 협업의 파트너십을 확장하는 단초로 활용할 수 있다. 1970년대에 선진국이 되어 구미와 같은 반열에서 아시아 국가들을 오랜 시간 아래로 보던 일본의 방식을 넘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촛불혁명으로 정착시킨 한국의 민주주의 리더십을 노동·인권·환경·안전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규범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기성세대들은 반일감정과 별개로 선진국 일본에 대한 체험에 근거한 경외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문화가 개방된 지 20년, 젊은 세대들은 성장이 정체된 일본을 접해왔기 때문에 특별한 위화감 없이 대등한 감각을 형성하고 있다. ‘한·중·일’로 지정학적 사고를 한정하는 경우도 드물다. 인식의 변화 가운데 일본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 중이다. 협력체제 복원이냐, 1965년 한일협정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환이냐라는 정부의 선택지가 남아있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지평이 한국사회에 펼쳐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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