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냐 환경이냐… 가리왕산 교목 벌목 논쟁 다시 불붙어

2013.04.12 21:16 입력 2013.04.12 21:26 수정

2주간 쓸 평창활강장 때문에 주목 등 5000그루 이상 베기로

환경단체 “임시 경기장 짓고 생태이식으로 더 많은 나무 살려야”

■ 숲 가치 인정, 조선시대에도 관리한 보호구역

능선에는 길도 없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며 산 속을 400미터쯤 기어올랐다. 숨이 가빠져 가슴이 터질 즈음 지름 수십㎝ 나무들이 빼곡한 숲이 나타났다. 수백년 된 거목들이 많아 ‘목신들의 숲’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하늘로 곧게 뻗어있는 나무들은 원시림의 느낌을 주며 보기에도 좋았다.

지난 8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활강경기장 예정지로 지정된 가리왕산을 찾았다. 전날 내린 눈으로 쉽잖았던 산행은 몇차례 이곳에 와본 적 있는 녹색연합 임태영 간사가 길을 안내해줬다. ‘목신들의 숲’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임 간사는 “이렇게 곧게 잘 자라있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한 거목들을 보는 안타까움이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활강경기장 건설예정지인 강원 정선군 북평면 가리왕산 숲속에서 지난 8일 녹색연합 임태영 간사가 훼손 위기에 놓인 수십, 수백년 된 나무들을 둘러보고 있다. 정선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활강경기장 건설예정지인 강원 정선군 북평면 가리왕산 숲속에서 지난 8일 녹색연합 임태영 간사가 훼손 위기에 놓인 수십, 수백년 된 나무들을 둘러보고 있다. 정선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이달초 공개된 산림청의 가리왕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보전·복원 및 지정해제계획에는 이 지역의 나무 대부분을 벌목키로 돼 있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과 경기장 부지가 겹치는 78만3180㎡에 서식하는 나무 5315그루 중에 2.27%에 불과한 121그루만 다른 곳으로 옮겨심고, 나머지는 베어버리기로 한 계획안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활강경기장 예정지로 잡힌 가리왕산 중봉~하봉 사이의 숲은 문외한의 눈으로 보기에도 단 2주일간 열리는 올림픽을 위해 훼손하기에 아까워 보였다. 눈 돌리는 곳마다 신기한 형태의 왕사스래나무들이 있고, 국내에 서식하는 대표적 활엽수인 신갈나무도 잘 자라 있었다. 경기장 꼭대기로 예정된 해발 1360m 지점 사이에는 희귀종인 분비나무가 분포하고,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임 간사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가리키며 “여기 잘 자란 나무들 중에 살아남을 나무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산림청이 옮겨심기로 계획한 나무들은 직경 14㎝, 높이 5m가 안 되는 어린 나무들이다. 수백년 된 거목들은 옮겨심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작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이유로 빼버린 것이다. 10m 이상 자란 신갈나무들은 대부분 노쇠목으로 분류됐고, 15m 넘게 큰 전나무들과 함께 베어버려질 운명에 처했다. 숲의 가치를 높이 사 철저히 보호해온 지역의 키 큰 나무들이 어느새 보존가치가 떨어진다고 집단 벌목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높이 1561m의 가리왕산 숲은 식물학계에서 다양한 나무가 섞여 자라는 특이한 환경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가에서도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조선시대에도 가리왕산은 국가에서 관리하던 봉산으로 삼아왔다. 봉산은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을 말한다. 현재도 개발행위는 완전히 금지돼 있고 등산이 허가된 중턱 너머의 보호지역은 들어가려 해도 미리 정선국유림관리소의 입산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올림픽이냐 환경이냐… 가리왕산 교목 벌목 논쟁 다시 불붙어

■ 산림청 비용·편리 이유로 어린나무 121그루만 옮겨

수천년 이어진 원시의 숲이 파괴될 위기에 처한 것은 정부가 전북 무주를 제외하고 국제규격에 맞는 활강경기장을 세울 유일한 곳으로 가리왕산을 택했기 때문이다. 남자 활강경기장의 올림픽 기준 표고차는 800~1100m이며, 높이 1561m인 가리왕산은 이에 들어맞는 지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임 간사의 안내로 활강경기장 예정지인 가리왕산 중봉과 하봉 사이의 임도 중간쯤에서 활강경기장 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올림픽조직위가 왜 가리왕산 개발을 고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가파른 경사면이 산 중턱까지 매끈하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벌목만 하면 바로 스키장으로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가리왕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지 않았다면 스키장 건설붐이 일었던 1980~90년대 이미 원시림은 스키장으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가리왕산 활강경기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확정 때부터 논란이 됐다. 특별법이 아니면 절대로 개발과 훼손이 허용되지 않는 산이기 때문이다.

올림픽조직위나 강원도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 활강경기장 계획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면적이 훼손되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국제 규격을 맞추면서도 면적을 최소화했다는 것이다. 실제 중봉 정상부인 해발 1400m 부근에서 출발하는 남자 경기장은 현재의 중봉과 하봉 사이로 옮겼다. 남자연습경기장은 만들지 않고 여자연습경기장을 활용하는 방안 등도 마련됐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리조트를 만들고, 활강경기장을 스키장으로 이용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그러나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경기가 열린 무주 덕유산에서 특별법을 통해 자행된 파괴가 똑같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이미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 리조트 조성계획도 실현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2주간 대회를 치르며 가리왕산 숲은 훼손되고 활강경기장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안 논쟁은 여기서부터 다시 불붙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숲과 토양까지 심각히 훼손하는 정식 활강경기장을 짓지 말고 임시 경기장을 짓고 철거하자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관로는 임시 파이프를 설치하고 대회 후 철거하면 올림픽 후 다시 숲을 복원하는 것이 쉽다는 것이다.

환경단체들은 나무 이식도 나무만 파내서 옮기는 방식보다 주변 토양을 포함해 서식공간을 그대로 떠내서 옮기는 비오톱 공법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임 간사는 “이미 산림청이 경북 김천 바람재 백두대간보호구역 등에서 실효성을 확인한 공법”이라며 “2.27%보다 훨씬 더 많은 나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식할 공간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121그루만 옮기는 것도 이현령비현령식 시각”이라고 덧붙였다. 산림청과 올림픽조직위는 다음주쯤 최종 보전방안을 확정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단체들은 “정부와 강원도가 의지만 있다면 환경을 보전하고 더 많은 나무를 살릴 안을 짤 수 있을 것”이라며 2.27% 계획보다는 진전된 안을 기대하고 있다.

■ 인근 주민들 “도로 직선화 없다면 숲 훼손 반대”

눈 덮인 가리왕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만났다.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였다. 올림픽 개최에 들떠 있으리라는 생각과 달리 그곳에는 또다른 암초가 시끄럽게 돌출해 있었다. ‘폐교가 된 숙암초등학교부터 나전삼거리까지 숙암리를 지나는 국도 59호선의 7.5㎞ 구간을 직선화하지 않으려면 활강경기장도 평창군에서 다시 가져가라’는 것이다.

정선군 번영회장을 맡고 있는 고충일씨는 “애초에 정선군이 주민들 취수원인 가리왕산의 환경 훼손을 감수하고, 스키장이나 리조트로 활용하는 사업성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리왕산에 활강경기장을 짓기로 한 것은 도로 직선화라는 군민들의 숙원이 이뤄질 수 있다는 약속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강원도와 국회의원들이 직선화를 약속했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4차선 도로 계획이 2차선 도로로 축소되더니 아예 계획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가리왕산 주변의 마을들을 둘러볼 때마다 ‘59번 국도 직선화 없는 동계올림픽 결사 반대’ 등의 살벌한 구호가 새겨진 현수막 수십개가 눈에 보였다. 고씨는 “이렇게 주먹구구식이라면 굳이 아름답고, 아까운 가리왕산을 파괴할 이유도 없다. 곧 주민들이 국토부와 기재부를 찾아 항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환경’ 불씨를 낳은 가리왕산의 활강경기장은 조용한 산골 마을에 또다른 개발의 생채기를 만들고 있었다.

산림청의 가리왕산 개발 구상이 조만간 확정 발표된다. 가리왕산과 숙암리는 그 내용과 수위에 따라 다시 시끄러워질 운명이었다. 산 속에도 산 밑에도 전운이 흐르고 있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