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횡 전모 담고 있는 <최태민 보고서> 9년 추적기 - 박근혜는 어떻게 최태민 일가에 ‘포획’되었나

2016.10.30 13:01 입력 2016.11.02 09:59 수정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최태민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최태민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역학엔 관재수(官災數)라는 운수가 있다. 대략 ‘관청으로부터 재앙을 받을 수’ 또는 ‘풍문 등으로 괴로움을 당할 수’ 정도로 풀이된다. 역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등기부등본 등에 1956년 6월 23일 생으로 기록되어 있는 최순실씨의 사주가 궁금할 것이다. 이번에 불거진 ‘최순실 게이트’는 최씨 인생에서 최악의 관재수에 해당할 터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이름이 ‘송사’에 공개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87년 9월이다. 육영재단 어린이회관구사위원회의 유인물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된다. “어린이회관에서 사심없이 일하신 경험 많은 직원들은 타의에 의해 물러났고, 무능하고 꼭두각시에 불과한 사람에 의해 1970년부터 발행되던 어깨동무가 설립자의 뜻을 무시한 채 폐간되었으며 (중략) 이러한 일들은 설립자와 박근혜 이사장님의 취지를 무시한 최태민, 최순실 부녀와 그에 추종하는 어용 간부들에 의하여 행해졌고….” 여기서 설립자는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말한다.

‘최순실’ 87년 육영재단 분규 최초 등장

육영재단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최씨 일가의 전횡이 1983년 최태민의 여동생, 즉 최순실의 고모가 들어오면서 시작된 것으로 기억했다. “그 무렵 최태민씨가 아버지 상을 당했다. 지금의 장승배기에 집이 있었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영안실로 가지 않고 집에서 상을 치렀다. 방문했던 최태민가(家)는 그냥 평범한 보통 가족이었다. 그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놀라운 부를 축적했는데, 그게 최씨 부녀 및 일가친척을 동원해 빼돌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 당시 직원들의 인식이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위원회의 서면조사에서 최순실씨는 “당시 강남에서 운영하던 유치원이 잘 되어 돈을 벌었던 것”이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돈을 잘 번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최씨 소유로 되어 있는 강남구 신사동 미승빌딩이 그가 운영하던 초이유치원 자리다. 유아교육사업에 관심이 많던 최씨는 ‘민 국제영재교육연구원’이라는 연구소도 차려 소장이 되었다. 이 기관은 당시까지 유일한 영재교육기관이었다. 기자는 2012년, 최씨와 함께 논문을 쓴 교수를 접촉해 최씨와 남편 정윤회씨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육영재단 분규 현장 등에 뿌려진 최태민 목사 비난 소책자.

1990년대 초반 육영재단 분규 현장 등에 뿌려진 최태민 목사 비난 소책자.

최씨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그녀의 경력이나 과거활동에 대한 오보 역시 속출했다. 원래 이름은 최필녀이며, 최순실로 개명했다는 보도가 대표적이다. 새마음봉사단 사무총장을 역임한 최필녀는 후술할 ‘최태민 보고서’에도 등장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의 부인으로, 보고서가 작성된 시점에 35세의 유부녀였다. 얼굴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기록원에는 1979년 9월 3일 최씨가 ‘새마음봉사단’이 거리모금한 1억원의 수재의연금을 당시 박찬현 문교부 장관에게 전달하고 담소를 나누는 사진이 공개되어 있다. 뉴스타파가 공개한 그해 6월 11일 한양대 교정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 참석한 최순실씨의 영상도 국가기록원의 ‘대한뉴스 1242호’에서 볼 수 있다. 문공부가 제작하던 대한뉴스는 과거 극장에서 영화상영 전 틀어주던 국정 뉴스다.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함께하는 영상이 유신정권 말, 전국 극장가에서 상영되었던 셈이다. 새마음봉사단 사무총장은 30대 후반에서 40대의 여성이 맡는 자리였다. 유정회 국회의원을 역임한 신동순씨도 이 단체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이 역시 ‘최태민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신동순씨는 단국대 장충식 이사장의 부인이다. 2014년 12월, ‘보고서’에 부인이 등장하는 것을 아느냐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장 이사장은 “그렇지 않아도 최순실로 시끄러워 아침에 아느냐고 처에게 물어봤는데 몰랐다고 한다”며 “처가 사무총장을 맡은 일 관련으로 최태민씨를 그가 있던 아현동 사무실에 방문해 만나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최순실 게이트’의 최대 미스터리는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 목사로부터 대를 이어 딸 최순실씨에게도 ‘의견을 묻고 도움을 받는’(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긴급사과문 중) 관계가 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먼저 아버지 최태민씨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 최태민 대동하고 노태우 면담?

“찾으시라! 들으시라! 대한민국은 ‘세계주인국’이 될 운세를 맞이했다는 칙사님의 권능과 실증의 말씀을.” 1973년 7월, 대전시내에 뿌려진 전단지다. 여기서 칙사(勅使)는 최태민을 가리킨다. 최씨는 대전시 선화1동 동사무소에 숙소를 마련하고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최태민씨가 영생교를 이끌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그가 이끌던 교회는 영세교(永世敎)였고, 조희성의 영생교와는 무관하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출간된 책 <태자마마와 유신공주>에 따르면 작고한 사이비종교 연구가 탁명환씨가 대전의 최태민 숙소를 찾았다. “숙소의 벽에는 색색의 둥근 원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나무자비조화불’이라는 주문을 계속 외우면 만병을 통치할 수 있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는 주장이었다. 그게 그가 말하는 ‘영세계의 법칙’이었다.”(앞의 책 14쪽) 책에 따르면 탁씨는 이런 말도 남겼다. “최태민에게 마술이든 일종의 최면술이든 그런 묘한 것이 있는 것 같다. 박근혜도 아마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것 같다.”(탁명환씨의 아들인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이에 대해 “아버님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며, 다만 그 관련성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선 뒤,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노태우 대통령은 각계각층의 인사를 만났다. 대상자에는 박근혜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약속장소인 신라호텔에 박근혜씨는 최태민과 함께 나왔다고 한다.” 1991년, 육영재단 분규 중 뿌려진 ‘7개의 이름 가진 목사라는 희대의 사기꾼 최태민’이라는 소책자에 실린 글이다. 최태민은 이 자리에서 노태우 당선인에게 박정희가 국부(國父)이며, 육영수가 국모(國母)라는 주장을 폈다고 소책자는 전하고 있으니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중에는 흔히 ‘최태민 보고서’라는 이름이 붙은 그의 비리전력 등을 담은 문서가 돈다. 이 문건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문건을 최초 보도한 <신동아> 관계자는 “보도 후 참여정부 말기 여당 고위인사의 개인 홈페이지에 ‘안기부’라는 닉네임으로 이 문건이 잠깐 올라왔다 삭제된 적이 있는데, 그것이 퍼진 것 같다”고 말했다. 흔히 중앙정보부 문서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문서 자체는 안기부 시절인 198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서 1912년 생인 최태민이 76세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 문건의 진위 여부를 오랫동안 취재해 왔다.

안기부는 ‘최태민 보고서’ 왜 만들었나

2009년, 기자를 만난 이 문건 제작에 간여했다는 전직 정보기관 인사는 문건이 제작된 배경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당시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이 <근화보> 등 월간지를 만들어 과거 구국봉사단 활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규합하고 MBC와 인터뷰를 하는 등 정치활동을 재개한다는 설이 있었고, 또한 당시 청와대(노태우 정부)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또 하나의 파일이 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과정에서 CD 등에 담겨 유포된 ‘최태민에게 놀아난 박근혜’라는 제목의 파일이다. 이 파일은 <인사이드 월드>, 각종 여성지 및 타블로이드, <중앙일보>에 ‘청와대 비서실’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시리즈 중 최태민-박근혜 관계 의혹 관련된 부분만 집중적으로 취합해 놓은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당시 이 사안을 취재한 기자가 김진 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암암리에 돌다가 2006년쯤 공개된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

1990년대 초반부터 암암리에 돌다가 2006년쯤 공개된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

“봉사단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던 김동분이라는 여자와 송 학장이라고, 6·25사변 때 부산 국제시장 안에 있었던 건국대학 학장이 한 무더기의 문건을 들고 찾아왔던 것이 기억난다.”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88·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상임이사)의 말이다. 김씨 등이 찾아온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김 전 국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사전에 약속된 ‘비밀연락루트’가 있었다. 대통령에게 부치는 편지를 봉한 뒤 다시 겉봉에는 조상호 당시 의전수석비서관에게 보내는 편지로 밀봉하는 형식으로 해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이나 차지철 경호실장이 열어보지 않고 다이렉트로 박정희 대통령이 편지를 받아보는 통로였다. 그 경로로 신문사로 들어온 제보 내용을 ‘최태민에 대한 99가지 의혹’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보냈다. 김 전 국장이 올린 이 문건이 오늘날 ‘최태민 보고서’로 알려진 문서의 기초사실이 되었다. 중정이 정리한 보고서는 다시 1980년 전두환 집권 이후 최태민을 재조사할 때 만들어진 합동수사본부 문서, 그리고 이후의 ‘안기부 문서’의 골격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최태민 보고서의 작성에서 김 전 국장의 역할에 대한 추정은 있었지만, 당사자 증언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전 국장은 파일을 읽고 화가 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에 대한 조사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내가 올린 글을 보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조사를 시켰다. 김재규는 경찰정보, 대인정보, 검찰정보, 보안사 등 일종의 ‘오피셜 인텔리전스 루트’로 최태민 관련 정보를 취합했다. 중정이 박정희 대통령의 책상에 올려놓는 보고서는 이런 공식 루트에 기반한 정보였다. 반면 차지철도 경호실장을 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국회나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경호실 정보기구’를 만들었다. 나중에 목사가 된 조광작이라는 사람이 총괄한 것으로 안다.” 1977년 9월 12일 최태민에 대한 이른바 ‘친국’이 열렸다. 김 전 국장이 전하는 실상은 이렇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재규를 불러 이야기를 들은 뒤 다시 차지철을 불렀다. 회의를 하고 난 다음 차지철에게 큰 영애(박근혜)가 ‘최태민은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으로 모략한다’고 매달렸다. 차지철은 왜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그렇게 집착하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과정에서 유포되어 논란이 되었던 ‘최태민 파일’ 표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과정에서 유포되어 논란이 되었던 ‘최태민 파일’ 표지.

김 전 국장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것에는 최태민 문제가 ‘먼 원인(遠因)’으로 작용했다고 봤다. “최태민 친국을 기점으로 차지철은 김재규를 박정희로부터 차단했다. 김재규뿐만 아니라 장관 등 국무회의 임원들도 박정희를 만나려면 차지철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간경향>은 김 전 국장을 두 차례에 걸쳐 만나 취재했다. 첫째는 단독으로, 둘째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였다. 첫 취재 당시 그는 “박근혜가 최순실 건을 빨리 털고 가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우려했다. 두 번째 취재는 JTBC가 이른바 ‘최순실 태블릿PC’를 공개한 다음날이었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박근혜가 몰락하고 레임덕이 온다는 등의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간 대통령이 법정에 서게 될지도 모르는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최태민에서 시작된 비리가 단지 개인 간의 비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비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 편에 서서 상대 박근혜 후보의 검증을 맡은 정두언 의원은 10월 27일 <경향신문>에 이번 최순실 게이트, 특히 국정 기밀사안이 가득 들어 있는 태블릿PC가 유출된 건에 대해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이 사태를 지휘하는 사람이 있다면 ○○○”라며 이 사건의 성격이 “○○○의 복수전”이라고 밝혔다. ○○○는 전후맥락으로 보아 정윤회다. 정말 그럴까. 당시 정두언 의원 등이 취합한 자료의 작성자는 김해호 목사다. 이번 게이트에서 2014년 12월 ‘정윤회 국정농단 의혹사건’ 당시 구속되었던 박관천 전 청와대 행정관의 “우리나라의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는 박근혜다”라는 말에 앞서 7년 전인 2007년에는 김해호씨가 남긴 “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과 최순실의 꼭두각시”라는 말이 화제를 모았다. 2007년 최태민 파일은 김씨가 취합한 자료를 기초로 만들어진 파일이다.

이후 김해호씨는 구속된 뒤, 6개월 징역을 살고 집행유예로 나왔다. 그는 최순실씨 등으로부터 당시 사자(死者)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20억 손해배상 요구를 받기도 했다. “그제 광화문 앞을 지나는데 한 20여명 대학생들이 꼭두각시 박근혜를 최순실이 조종하는 그림을 그려놨더라. 속으로 쓴 웃음이 나왔다. 나더러 대예언가라고 하는 인터넷 게시글도 봤다. 사실 피눈물을 흘리며 (감옥에서) 반년을 보내고 나왔다. MB가 당선되었으니, 폭로댓가로 호의호식을 하지 않았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청와대로 불러 밥 한 끼 대접받지 않았다.” 10월 28일, 기자와 통화한 김해호씨의 말이다. 자신이 9년 전 주장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과 관련 그는 “국가적 비극이 된게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국민들로서는 어이없는 고통이겠지만 나에게는 머리가 쭈뼛서는 고통이었다. 6개월 트라우마가 6년이 갔다. 지금도 좁은 공간에 가서 밥을 먹으면 한 여름이라도 문을 열어놔야 한다.” 그는 현재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최대 미스터리는 이것이다.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관계는 무엇이길래, 저토록 전횡이 가능했을까. 상식적으로 널리 알려진 현몽이야기(“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박근혜에게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만으로 4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신의’가 설명될 수 있을까. 앞의 <태자마마와 유신공주> 책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실려 있다. 최태민은 신학대학 학장 J목사에게 “육 여사와 박근혜만이 알고 있는 둘만의 비밀을 전했다”는 것이다. ‘둘만의 비밀’이란 도대체 뭘까.

지난주 <주간경향>이 만난 정윤회씨 아버지 정관모씨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2006년 이른바 면도칼 피습 당시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최순실씨가 간호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당시에는 최태민씨의 둘째딸(최순득씨)이 영향을 미치는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관모씨의 증언에 따르면 순득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성심여고 동기동창(8회)이다.

박근혜 만남 가능했던 ‘현몽’의 비밀은

앞의 ‘최태민 보고서’에는 최순실씨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횡령 비리에 ‘차녀 최순득’이 거론된다. “*봉사단 장부상 3000만원 지출 기장 없이 경노병원 장부에 전액 임금된 양 허위기장한 후 77.4.27-8.27 경노병원 경리과장인 차녀 최순득과 공모, 4회에 걸쳐 병원자금 424만원 인출.” 김해호씨의 2007년 기자회견에서 거론한 최씨 일가의 전횡 항목에도 순득씨의 부동산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사건에서 순득씨와 관련된 의혹은 이제 막 제기되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최씨 일가의 비선실세 의혹을 추적해 온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금까지 나온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국민과 함께 진실을 밝혀낼 것”이라고 말했다.

영세계 칙사관이라는 명의로 태몽, 현몽, 기도, 신유 등의 상담을 한다고 안내하는 전단지. 대전시 일대에 1973년 7월달에 뿌려진 전단이다. /현대종교 제공

영세계 칙사관이라는 명의로 태몽, 현몽, 기도, 신유 등의 상담을 한다고 안내하는 전단지. 대전시 일대에 1973년 7월달에 뿌려진 전단이다. /현대종교 제공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2012년 대선 당시 이 동기동창들이 모여 찍은 당시 회고담 영상이 유튜브에는 등록되어 있다. 이 동영상을 검토해 봐도 최순득이라는 동창은 나오지 않는다. 정유라에 이어, 또 다른 의혹의 축으로 떠오른 사촌 장시호씨(개명 전 장유진)는 순득씨의 딸이다. 순득씨도 순실씨 모녀와 딸 유진씨처럼 개명했을까. 일단 등기부등본 상에는 2014년 6월 16일까지 개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된다. 8회 동창회 관계자 ㄱ씨는 “동기 중 최순득이라는 이름은 없다”고 말한다. 정윤회씨의 아버지 정관모씨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대전일보 1973년 5월 13일자 4면에 ‘칙사’를 자처하던 최태민 측이 낸 광고/현대종교 제공

대전일보 1973년 5월 13일자 4면에 ‘칙사’를 자처하던 최태민 측이 낸 광고/현대종교 제공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崔太敏 목사의 사위를 비서로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朴 의원이 아직도 崔 목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능력이 되니까 쓰는 거예요. 대개 사람을 쓰고 일을 할 때 가까이 잘 알던 사람들을 쓰는 것 아닌가요.”

2002년 4월, 최태민 관계 의혹을 따져묻는 <월간조선> 기자의 질문에 대한 박근혜 당시 의원의 답이다. 최태민 목사에 대한 질문을 꺼내들자 박 의원의 반응은 ‘격앙’이었다고 기사는 전한다. “저의가 뭐예요.”(박 당시 의원의 말)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박 의원은 최 목사를 옹호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중·고등학교 동창 순득씨의 존재는 최 목사가 어떻게 퍼스트레이디 박근혜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하나의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순득씨의 ‘휴민트 정보’가 최태민 목사의 현몽 주장에 결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요 국정문서가 담긴 태블릿PC의 공개로 그간 10년 넘게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선실세 의혹이 사실로 판명난 것은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 시해 37주기 하루 전인 10월 25일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이제 막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1979년의 박정희 시해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대표적인 불행한 사건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사건은 그 출발점이 되었던 ‘최태민과 박근혜의 만남과 40년의 포획’이라는 최대의 의문을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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