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폐기해야 할 ‘무제한 과로 허용 조항’

2017.11.19 21:24 입력 2017.11.19 21:28 수정
조현아 |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 환경의학과 의사회 이사

2008년 10월 어느 날, 충남의 어느 검진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느 날처럼 검진 버스를 타고 충북지방 구석의 어느 소규모 공장을 방문했다. 자동차 도색 및 수리 공장으로 열 명 남짓한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다. 악취 및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검진을 받는 노동자들은 소음성 난청 때문에 귀가 안 들려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늦가을인데도 땀으로 범벅이 된 얇은 속옷차림에 검은 기름때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분들은 공동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거의 하루 12시간씩 일한다고 했고, 한 달에 딱 두 번 있는 휴일에 읍내로 나가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한다고 하였다. 한 수검자가 말했다. “다들 이렇게 살지 않느냐. 내 주변은 다들 이렇다고. 이렇게 살지 않으면 입에 풀칠 못한다.”

[기고]폐기해야 할 ‘무제한 과로 허용 조항’

그날의 경험은 내가 직업환경의학과를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지금은 전문의가 되어 근로자 건강진단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하루에 수십명씩 만나고 있다. 근로자 건강진단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사업주가 실시하는 것으로, 단순히 고혈압, 당뇨병과 같은 건강 문제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련된 작업환경과 유해인자에 대한 노출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에게 듣게 된 이야기는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젊은이들이 선망해 지원하는 소방, 경찰 공무원들은 연속 이틀간 쉴 수 있는 부서가 거의 없다. 방송 노동자들은 휴식 없이 연속 48시간 근무를 하고 12시간 쉬는 경우도 있었다. 연구소 연구원들은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집에 가기도 힘들었다. 연구소가 일괄 소등한다고 하지만 개인 노트북으로 지속적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일반 사무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 막론할 것 없이 아침에 출근하여 정시 퇴근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지혈증, 당뇨 등을 진단받은 사람들에게 운동을 하고 의원에서 약을 처방받으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현실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병원 갈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유해인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장시간 노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2011년 고용노동부에서 발주한 한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30% 이상이 주당 52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고 한다. 장시간 노동이 뇌심혈관질환을 비롯한 여러 직업병 발생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시간 노동은 그 자체로 고된 노동 후에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도, 아파도 건강관리를 할 시간마저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은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주 40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하나 노사합의에 의해 초과근로가 가능한 경우 주당 52시간까지 일할 수 있고, 여기에 노동부 행정해석에 의해 근로시간 산정에서 제외된 주말에 특근까지 하면 최대 68시간까지 일하게 된다. 게다가 근로기준법 59조에서 대부분의 서비스 업종을 근로시간 특례업종으로 지정하여 주당 68시간을 넘겨서도 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길게 일하는 나라가 된 이유이다. 국제노동기구는 1935년 제45호 협약에서 주 40시간 노동을 제시하였고, 과거 장시간 노동 국가로 명성이 높았던 이웃나라 일본도 특례업종의 법정근로시간을 주 44시간으로 정하고 있고, 특례의 내용이 노동자의 건강 및 복지를 해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과 과로사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근로기준법 59조에 대한 개정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국민적 공감이 이제라도 확산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 이상 노동자들이 자신의 건강을 돈으로 바꾸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방관할 수 없다. 특례업종에 대한 규정은 폐지되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이 장시간 노동을 줄여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법으로 바뀌길 기대해 본다. 앞으로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이 진료실에서 노동자의 체념 어린 눈빛을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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