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 국정원

2013.01.08 21:28
표창원 | 범죄학자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와 드라마 중에 <7급 공무원>과 <아이리스>가 있다. 모두 국정원 요원들의 활약상과 애환을 멋진 액션과 탄탄한 미스터리 구조 속에서 그려내 재미와 감동을 주었다. 아마 많은 청소년들이 ‘한국의 007’, 국정원 요원이 될 꿈을 가지게 해 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이스라엘의 모사드, 영국의 비밀첩보국(SIS, 일명 MI6)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최고의 전문가들. 나와 많은 청소년들이 기대하고 믿는 국정원의 모습이다.

실제로 내가 경찰관 생활을 하며 만났던 실무요원들의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 속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1992년 대테러 종합 모의훈련을 함께하며 경찰 협상요원이었던 나와 1박2일간 두뇌싸움을 벌이며 테러범 역할을 담당했던 당시 안기부 ‘장 선생’이 대표적이다. 외국 테러범의 인질상황을 설정했던 모의훈련에서 협상은 모두 영어로만 진행됐다. 미군 CID의 협상교육을 받았고, 경찰에서 누구보다 영어는 잘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였지만 유창함과 정확성은 물론이고 중동식 억양과 미국 본토 억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장 선생 앞에서 난 ‘어린아이’ 같았다. 영어만이 아니었다. 협상과정에서의 심리전 능력 역시 탁월했고, 훈련 막바지 경찰특공대의 진입 상황에서의 무술실력 역시 뛰어났다. 내겐 ‘장 선생’이 영원한 국정원의 롤 모델이다.

[표창원의 단도직입]‘풍전등화’ 국정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 선생’ 같은 전문 실무요원보다 ‘관계기관대책회의’ 같은 것을 주관하는 ‘국정원 관료’들을 접하면서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장 선생’ 같은 진짜 전문가들이 아닌 검찰 등 다른 행정기관 관료들이 낙하산처럼 고위직에 임명되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중앙정보부,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으로 여러 차례 간판을 바꿔 달 수밖에 없었던 ‘정치화’의 상처와 후유증은 일선 현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능한 실무요원들이 점차 한직으로 밀려나고 ‘줄을 잘 선’ 관료들이 득세해 권력을 추구하는 모습들이 감지된 것이다. 그 결과 과거 ‘음지에서 일을 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모토를 가졌던 국정원이 2002 월드컵 등 국제행사의 ‘공식 보안책임기관’을 맡겠다며 경찰과 힘겨루기를 해 다른 나라 경찰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2011년엔 우리나라 무기를 구입하겠다며 방문한 인도네시아 사절단의 호텔방에 국정원 직원들이 숨어들어가 노트북을 훔쳐보다 호텔 직원에게 발각된 뒤 숨어있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어이없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번 2012 대선 ‘국정원 직원 사건’에서도 ‘불법 선거개입’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민간인에게 미행당해 숙소와 일과까지 몽땅 감지당하고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선관위와 경찰이 와 문을 열고 조사에 협조하라고 하자 오빠와 부모까지 불러 언론 앞에 노출시키는 이해 못할 행동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도 국정원의 역량 약화를 보여준 단적인 예다. 바로 그 순간 북한에서는 미사일인지 인공위성인지를 쏘아댔지만 국정원에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북한은 발사계획을 철회했다’고 발표해서 어처구니없는 망신을 당하게 했다. 유사한 시기, 태국에서 MBC 기자가 북한 김정은의 형 김정남을 만나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국정원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몰랐을까, 아니면 대선에 이용하도록 방조한 것일까는 아직 미지수다.

국정원은 위기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첫째, 정치관료가 국정원을 장악해 정보와 예산, 인력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의도적 정치화가 아니라면 국제 첩보 세계에서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무능화·무력화돼 있다. 어떤 경우든 대수술이 필요하다. 생명은 살리되 뇌 속 암세포는 제거하는 정밀하고 체계적인 대수술만이 국정원을 살려내 국민이 신뢰하는, ‘한국의 007’로서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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