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

영화 ‘우주전쟁’의 교훈

2005.09.01 18:13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얼마 전 H.G. 웰스 원작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우주전쟁’이 개봉되었을 때, 인터넷 게시판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막강한 기술력으로 지구를 초토화하던 외계인(원작에서는 화성인이다)이 감기같은 바이러스 미생물체 때문에 맥을 못 추더니 결국에는 자멸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이 결말을 빼면 영화는 볼 만했다는 의견이 많았고, 개중에는 영화가 원작에 충실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균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의 시초는 몇백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6세기 말,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 일환으로 북미의 인디언 부락을 탐험했던 과학자 토머스 해리엇은 1588년에 ‘버지니아의 새로 발견된 땅에 대한 보고서’를 추밀원에 제출했다. 여기에서 그는 백인 탐험대들이 인디언 마을을 지나칠 때, 인디언들이 무척 빠른 속도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이는 영국인들의 몸에 서식하던 홍역이나 감기 바이러스 때문이었는데, 백인들에게는 면역이 생긴 가벼운 질병이 인디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힘 앞세워 약자정복 기도-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가버린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와서 자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총알’을 쏘아댄다고 생각했다. 백인은 멀쩡한데 인디언만 죽어나가는 현상은 해리엇 같은 과학자에게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인체를 구성하는 4가지 담즙의 균형이 깨지면 질병이 생기고 그것이 심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외부에서 침입해서 질병을 일으킨다는 생각은 영국 과학자에게도 상상할 수 없던 것이었다.

인디언들이 상상했던 ‘보이지 않는 총알’은 해리엇의 보고서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그로부터 몇십년이 지나서 유럽 과학자들은 미생물을 발견했다. 시간이 더 흐르고 19세기 후반기에 파스퇴르나 코흐와 같은 과학자들이 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1890년에는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 ‘보이지 않는 총알’의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항체와 항원 개념을 사용한 면역이론도 발전했다. 1898년에 출판된 웰스의 ‘우주전쟁’의 결말은 당시의 ‘첨단 과학’을 반영했다.

웰스의 ‘우주전쟁’은 영국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소설이다. 화성인이 무차별 지구를 정복한다는 설정은, 영국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자행하는 만행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자와 토착민이 맞부딪쳤을 때, 토착민만 새로운 병원체에 노출되리라는 법은 없다. 제국주의자들도 낯선 병원체 때문에 사망할 수 있다. 해리엇을 비롯한 영국인들이 간과했던 웰스의 ‘반전’이었다. 지구를 정복하던 외계인들이 갑자기 패퇴했듯이, 웰스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예상치 못한 이유 때문에 몰락할 수 있음을 경고했던 것이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만들 때 9·11테러의 사회적 분위기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했지만, 영화의 외계인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상징하는지 아니면 부시 정권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감독은 이를 관객의 판단에 맡긴 것처럼 보인다.

-소설이 100여년만에 현실로-

그렇지만 20세기를 돌이켜보면 웰스의 통찰력은 끔찍한 현실로 드러났음을 볼 수 있다. AIDS 병원균은 아프리카의 특정 지역에 동물과 토착민에게 있던 질병이었는데, 무분별한 개발과 확장이 이를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국한되었던 서나일(West Niles) 바이러스도 지금은 북미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 동물의 고기를 더 싸게 먹고자 했던 인간의 ‘제국주의적’ 욕망은 광우병과 조류독감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힘을 앞세워서 소수자와 약자를 정복하려 하는 제국주의는 그 대상이 누구이건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반격을 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 이것이 웰스의 ‘우주전쟁’이 지금까지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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