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박태원 ‘골목 안’

2012.01.06 19:43

이 땅에서 글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서구의 모더니즘 운동은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수사법으로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비판하면서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일상의 가치를 앞세운다는 데 그 뜻이 있다. 그에 비해서 식민지 조선의 모더니즘 작가들은 먼저 서구식 교육을 통해 개화주의와 서구 근대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인식된 서구 근대는 결국 일본이라는 필터를 통해 들어온 사이비일 뿐이었다. 이태준도 그러했지만 박태원 역시 근대주의자였으면서도 식민지 근대를 비판하고, 고통받는 당대의 민족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는 모더니스트로 출발하여 리얼리스트로 마친 자기 모순이었으나 어쩌면 이 땅에서 글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가의 운명이었다.

박태원은 1909년 서울 수송동의 개화된 중인층 집안에서 출생했다. 경성제일고보(경기고) 재학중 ‘조선문단’과 동아일보에 시와 산문을 발표했고, 일본 법정대학에서 수학하다 중퇴 후 귀국하여 ‘수염’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1933년 결성, 이태준·정지용·김기림·이상·박팔양·이무영 등이 활동했던 순문학적 동인 성격의 ‘구인회’와 뜻을 함께했다. 이듬해에 숙명여고보를 수석 졸업한 보통학교 교원 김정애와 결혼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등의 작품을 쓰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박태원은 일제 말기에 몇 편의 대일 협력에 관한 글을 남기는데 소극적인 친일 행적으로 평가된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위원장에 홍명희, 공동부위원장에 이기영·한설야·이태준이 피선되었을 때 박태원은 중앙집행위원을 맡아 남로당계의 문예운동 실무진으로 활동했으나 1948년 남한에 체류하고 있었기에 검거 처형을 모면하려고 보도연맹(좌익전향자 조직)에 가입한다. 그의 월북 동기에 대해서는 전쟁 발발 직후 서울에 온 이태준·오장환·이용악 등을 따라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설도 있다.

내가 1989년 방북했을 적에 박태원은 이미 1986년에 작고했고, 그의 말년처 권영희(2001년 작고)가 보통강 구역의 아담한 아파트를 혼자 지키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박태원이 누워서 집필하던 큰 방을 보여주었다. 스프링 침대 하나가 놓였고 작은 책장이 있었다. 나 때문에 온 식구가 모였는데, 박태원의 장녀 박설영(차녀 박소영의 막내아들이 영화감독 봉준호), 권영희와 전 남편 정인택(작가)의 딸인 정태선·태은 자매였다. 장녀 설영은 평양기계대학의 교수로 재직했고 정태선은 무용가, 태은은 나중에 작가로 활동했지만 당시에는 인민군 교향악단의 첼로 주자였다.

지금은 여러 자료에도 나오지만 구인회 시절 박태원과 이상, 정인택은 경성의 모던보이 짝패들이었다. 신여성 권영희는 처음에 이상과 애인관계였는데 정인택이 연모해 자살 소동을 벌인 끝에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다. 적극적인 친일행적을 했던 정인택은 해방공간에서 조선문학가동맹, 보도연맹을 거쳐 월북한다. 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구금, 처형했는데 인민군이 구금시설을 접수하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수감자들 가운데 박태원이 끼어 있었다는 게 권영희의 증언이다. 박태원은 1950년 7월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먼저 월북한 동료 문인들을 따라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인택이 전쟁 중 죽고 두 딸과 남은 권영희는 평양에서 장녀 설영만을 데리고 살던 박태원과 1956년 재혼한다.

같은 해 이태준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숙청됐던 ‘8월 종파사건’ 이후 박태원은 평남 강서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함흥 시골 소학교 교장을 지낸 뒤 1960년 평양으로 복귀한다. 그후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16권으로 계획하고 제1권을 탈고하고 2권을 집필하던 중에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 병원에 가보았더니 양안 시신경 위축이란 진단이 나왔다. 그는 실명되기 전에 한 장이라도 소설을 더 쓰기 위하여 서둘렀다. 시력 보충을 위해 새로 도수 높은 확대경을 준비했고 1965년 어느 날, 평양에 돌아와 자료를 읽던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쓰러졌다. 둘째 권이 거의 끝날 무렵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원고지 모양으로 특수 틀을 만들어 손가락으로 더듬어 글을 썼다. 1976년에 뇌출혈로 두번째 쓰러져 당초 계획한 16권을 <갑오농민전쟁> 삼부작으로 바꾸어 집필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부인 권영희에게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2부까지 마치고 1981년에는 언어장애까지 와서 구술능력을 상실한다. 뒷부분은 권영희가 박태원의 메모와 자료에 의거하여 집필해 읽어주고 박태원은 고갯짓과 눈짓으로 의사소통하면서 완결한다. 1986년 7월 그는 사망했고 1988년에 남한에서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박태원은 구인회의 동인이었던 김유정과 비교해볼 때 완전한 ‘서울내기’였고 도회적인 작가였다. 그는 현진건처럼 개화된 중인층의 자식이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박태원은 근대주의자였으면서도 식민지 근대를 비판, 고통받는 당대의 민족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것은 박태원과 더불어 이태준에게도 있었던 피할 수 없는 이중성이었지만, 염상섭이나 채만식이 생동하는 인물과 시대를 복잡한 삶의 다층적 구조로 형상화해낸 것과는 달리 이 둘은 연민으로 관조하거나 주변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길을 택했다. 박태원이 해방과 분단을 통과하며 북에서 또 한번의 자기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은 엉뚱한 노릇이 아니라 그가 <천변풍경>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하고 구체적인 생활의 세계가 징검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박태원이 <천변풍경>에 연이어 썼던 비교적 긴 단편 ‘골목 안’(1939)을 애틋한 마음으로 골랐다. 이 작품은 사시장철 악취가 풍기는 골목 안 순이네 가족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영감은 집주름(가옥 거간꾼)이고 할멈은 골목에서 유일하게 가로등을 달아 ‘불단집’으로 부르는 댁의 잔일거리를 돕는다. 슬하에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바람 피우다가 행방을 감췄고 둘째아들은 싸움질이나 일삼더니 권투선수가 됐다. 셋째아들은 이류 중학생이다. 카페 여급인 맏딸 정이와 달리, 얌전하던 둘째 순이가 의사 아들과 연애를 하더니 결국 순이를 떼어놓으려는 거간이 등장한다. 이런 와중에 영감은 막내아들 학교의 후원회 발기인회 모임에 나가 이웃의 자식농사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거드름을 피운다. 모더니즘이건, 리얼리즘이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시인 김수영 투로 말하자면 그런 건 ‘양놈 X대강이나 빨아라!’쯤 되리라.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참고 견디며’ 폭풍 속의 가냘픈 잔등 같던 한 소설가는 구술과 눈짓과 고갯짓으로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하소설과 함께 인생의 막을 내린다. 그에게 글을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조선노동당’의 지도편달이었을까, 아니면 글을 쓰지 않으면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어느 예술가의 시간의 미망을 뛰어넘으려던 싸움이었을까. 박태원의 병석을 지키던 권영희가 전한 몇 장의 편지에는 남한에 남겨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회한 넘치는 글귀가 보인다.

“어디 이름들이나 한번 불러보자. 소영이, 일영이, 재영이, 은영이, 내 그지없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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