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식물 지키려 탐방객 제한하는 곰배령, 멧돼지 습격 괜찮을까

2013.09.22 22:39 입력 2013.09.23 12:00 수정

인제 점봉산의 ‘불청객’ 개체수 늘어나는 이유

“안 파헤쳐 놓은 데가 없네.” “멧돼지가 몇 백 마리는 되나 봐요.”

지난 12일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강원 인제군 점봉산 곰배령을 오르는 탐방객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인제군 기린면 강선마을에서 점봉산 곰배령까지 느린 걸음으로 3시간 남짓 걸어오르는 탐방로 주변에는 멧돼지 무리가 파헤친 듯 흙이 뒤엎어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저것은 멧돼지가 지나간 지 얼마 안된 흔적으로 보이네요.” 함께 점봉산을 찾은 국립수목원 오승환 박사(식물조사분류연구실장)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나무 뿌리 밑으로 땅이 깊이 파여 있었다. 탐방로를 따라가면서 한두 마리가 파헤친 작은 흔적은 숱하게 보였고, 멧돼지 떼가 교실 몇 개 크기의 땅을 넓게 파헤친 곳도 볼 수 있었다. ‘멧돼지의 습격’으로 부를 만했다.

멧돼지 흔적들은 대체로 탐방로와 멀지 않았다. 오 박사는 “사람이 만든 길이 동물에게도 다니기가 편하고, 동물이 만든 길이 사람에게도 다니기 편하다 보니 겹칠 때가 많다”며 “식물 연구자들이 산에서 조사하다 자신도 모르게 ‘돼지길’이라고 부르는 멧돼지가 만들어놓은 길로 들어가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고 귀띔했다.

강원 점봉산 곰배령을 찾은 탐방객들이 지난 12일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흔적 옆을 지나고 있다. |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강원 점봉산 곰배령을 찾은 탐방객들이 지난 12일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흔적 옆을 지나고 있다. |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 식물뿌리·지렁이 등 먹이 풍부… 기존 숫자의 2~3배 증가 추정
특정 식물 군락·경관 망치지만 동식물 다양성 높이는 측면도

■ 곰배령 초지 곳곳에 ‘멧돼지 폐허’

곰배령의 넓은 초지로 들어서자 탐방로와 먼 곳에도 멧돼지의 흔적이 많아졌다. 참여로, 수리취, 범꼬리, 산박하, 고려엉겅퀴까지…. 숱한 야생화들이 ‘화원’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는 초지에는 흙더미가 흉하게 드러난 부분이 곧잘 눈에 띄었다. 오 박사는 “점봉산은 먹잇감과 물이 풍부하고 다른 산보다 지형이 험하지 않아 동물들이 이동하기도 수월하다”며 “원래 멧돼지가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말했다.

연구논문들 속에서도 점봉산에 멧돼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강릉원주대 연구진이 2010년에 발표한 논문 <점봉산 신갈나무림의 초본층 식생에 미치는 멧돼지 교란의 영향>을 보면 조사지역 내에서 1년 동안 멧돼지에게 파헤쳐져 식물상에 영향을 받은 지역이 35.7%에 달한다. 또 능선부는 2년, 남쪽 사면은 3.7년, 북쪽 사면은 2.8년에 한 번꼴로 전체 면적이 멧돼지에 의해 교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멧돼지들이 이렇게 넓은 지역을 파헤쳐 놓는 주된 이유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이다. 냄새를 남겨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천적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대비하는 것도 있지만, 땅속에 좋아하는 식물 뿌리와 ‘작은 동물’이 많아 주둥이와 앞발로 거칠게 땅을 파는 것이다.

멧돼지 전문가인 국립공원연구원 종복원기술원 김의경 연구원은 “멧돼지가 땅을 깊게 파헤쳐 놓은 것은 칡 등의 식물 뿌리를 먹기 위해서이고, 표토를 살짝 뒤집어 놓은 것은 곤충이나 지렁이를 잡아먹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곰배령을 오르는 탐방로 주변에서는 멧돼지가 흙의 겉면만 살짝 뒤집거나 깊이 파헤친 흔적이 함께 보였지만, 곰배령 초지에서는 뿌리를 캐어먹으려 땅을 깊이 판 것이 많이 눈에 띄었다. 서울대 산림과학부 이우신 교수는 “멧돼지를 해부해서 위에 들어 있는 먹이를 하나하나 물에 씻어서 보니 지렁이가 많이 들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인근에서 적외선카메라에 포착된 멧돼지. |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인근에서 적외선카메라에 포착된 멧돼지. |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 멧돼지가 좋아하는 식물은 구근류

오 박사는 “멧돼지가 좋아하는 특정한 식물 종은 자취를 감추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며 “희귀식물인 금강초롱꽃 군락이 송두리째 사라진 곳도 있다”고 말했다. 멧돼지가 좋아하는 식물로 잘 알려진 얼레지도 뿌리까지 파헤쳐 먹은 탓에 찾아보기 힘든 곳도 있고,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에서는 앉은부채라는 이름의 식물이 없어지기도 했다.멧돼지가 즐겨 먹는 것은 알뿌리가 있는 구근류 식물이다.

원래도 멧돼지 수가 많았던 점봉산에서는 갈수록 멧돼지가 땅을 파헤쳐 먹이를 먹은 흔적이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개체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국립생물자원관 동물자원과 한상훈 과장은 “산간지역에서는 멧돼지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유독 점봉산에서 멧돼지들의 흔적이 많은 것은 이 지역에 멧돼지가 좋아하는 먹이가 많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며 “최근 유해 조수로 분류된 멧돼지 수렵 지역이 늘어나면서 안전하고 먹이가 풍부한 점봉산에 멧돼지가 몰려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점봉산이 멧돼지의 안전한 서식지이자 피난처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원래 서식하던 개체도 많은 데다 이동해온 개체들까지 합쳐져 2~3배 증가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우신 교수는 “기후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높아지면서 멧돼지 새끼들의 생존율이 높아지고 있다”며 “수렵을 피해서 도망간 멧돼지들도 안전한 산간지역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호랑이·표범 등 멧돼지의 천적이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고 멧돼지가 한 번에 낳는 새끼 수가 많은 것도 개체수 증가의 이유로 꼽히고 있다.

다만 연구자들도 멧돼지 수가 실제로 얼마나 증가했는지에는 아직 신중한 입장이다. 전수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의경 연구원은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멧돼지 한 마리가 서식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이고, 먹이를 먹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다”며 “암컷들은 새끼가 1~2살 될 때까지 데리고 다니는데 멧돼지 떼가 만든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실은 서너 마리가 주기적으로 먹이 활동을 벌인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곰배령 오르는 길에 보였던 교실 몇 개 크기의 흔적이 한 달여 동안 계속해서 멧돼지 무리의 ‘식당’으로 이용된 지역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 온난화로 어린 멧돼지 동사도 줄어

점점 잦아지고 있는 도심에서의 멧돼지 출현도 개체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2007년 이후 도심에 출몰한 멧돼지는 200여마리에 달한다. 이 교수는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부족한 먹이를 찾아다니다 길을 잃거나, 자기 영역에서 쫓겨나는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멧돼지들이 도심까지 내려오게 된다”며 “온난화로 인해 겨울철에 새끼들이 얼어죽지 않고 살아남는 비율이 늘어나면서 개체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지난 17일 국립공원관리공단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에서 포획된 멧돼지 한 마리에게 위치추적장치를 달아 서울 구기동 승가사 입구에서 방사했다(경향신문 9월18일자 10면 보도). 이동 경로와 서식 반경 자료를 파악해 멧돼지의 생태 특성을 추적하고 도심까지 내려오게 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멧돼지가 점봉산 경관을 망치고,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일시적으로 경관을 망치고 특정 식물종의 수를 감소시키는 역기능도 있지만 생물다양성을 높이는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점봉산 멧돼지가 식물과 토양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들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강릉원주대 연구진은 논문에서 “멧돼지 교란으로 인해 생기는 구덩이에서는 다른 지형보다 낙엽층이 발달하므로 애기앉은부채, 현호색, 오리방풀 등이 잘 발달할 가능성이 크다”며 멧돼지에 의한 교란이 신갈나무림 내 장소마다 다른 빈도와 강도로 발생하면서 전체 식물종의 높은 다양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멧돼지가 파헤친 지역에서도 2년 정도 지나면 상당수의 식생이 회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대 생명과학과 연구진은 지난해 한국환경생태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멧돼지의 임상 교란이 토양의 생물학적 활성에 미치는 영향>에서 멧돼지로 인해 토양이 교란된 시간·주기에 따라 토양 내에 유입된 낙엽 등의 유기물 분해 정도가 달라진다고 분석했다. 멧돼지가 파헤친 흙의 미생물량과 미생물 종류에 큰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승환 박사는 “멧돼지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 사라지는 식물들이 있지만 반대로, 멧돼지가 일으킨 환경 변화로 흙에 묻혀 있던 매토종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면서 새로운 식물종이 자라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 곰배령은

점봉산으로 오르는 중간의 고갯마루로, 곰이 하늘로 배를 향한 채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는 해발 1164m 정도로 다양한 야생화 군락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국내 자생 희귀식물의 30%가 살고 있는 곰배령은 식물 서식환경 보호를 위해 탐방객을 하루 3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곰배령 너머 점봉산 꼭대기로 가는 길은 입산을 통제하고 있다.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인 동시에 일부 지역은 설악산국립공원에 편입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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