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대혁명 50주년

<상>“난 살인범” 평생 자책…홍위병도 ‘문혁’ 광기의 희생자였다

2016.05.10 15:57 입력 2016.05.10 23:50 수정

죽은 자도 산 자도 편치 않은 ‘어두운 과거’

[중국 문화대혁명 50주년]<상>“난 살인범” 평생 자책…홍위병도 ‘문혁’ 광기의 희생자였다 이미지 크게 보기

충칭대·충칭사범대 등 10여개 대학이 몰려 있는 중국 충칭(重慶)시 샤핑바구. 이곳의 한 공원 구석에는 문화대혁명(문혁) 때 숨진 홍위병들의 무덤이 있다. 중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홍위병들의 안식처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붉은 수호부대(衛兵)라는 뜻의 홍위병은 50년 전인 1966년 시작된 문혁 당시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준군사조직이다. 홍위병들은 낡은 습성·사상·관습·문화의 ‘사구(四舊) 타파’를 외치며 지식층을 ‘우귀사신(牛鬼蛇神·악질분자)’으로 몰았다. 파괴와 폭력이 난무했다.

특히 충칭은 홍위병들 간의 대규모 노선 충돌이 잦았던 곳이다. 홍위병들은 충칭사범대에서 처음으로 학내 권력을 얻기 위한 탈권(奪權)투쟁을 벌였고, 이 싸움에 성공한 날을 기념해 ‘8·15’라는 분파를 만들었다. 충칭에서는 1967~1968년 ‘8·15’와 또 다른 학생 분파인 ‘반도저’가 서른 번 넘게 무력으로 맞붙었다. 소총뿐 아니라 기관총, 박격포, 탱크도 동원했다. 샤핑바구의 공원묘지에는 이 과정에서 희생된 400여명이 묻혀 있다. 대부분 평범한 공장 노동자나 학생이었다.

이들은 죽어서도 편치 않다. 묘소 주변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고 폐쇄회로(CC)TV가 24시간 감시한다. 사진을 찍는 것도 금지돼 있다. 평소에는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고 청명절 등에만 개방된다. 가족들이 방문할 수 있는 기간도 연중 열흘 정도다.

마오쩌둥이 1966년 5월16일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문혁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5·16통지’를 내려보낸 지 16일로 꼭 50년이 된다. 홍위병들은 문혁에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죽은 자들은 철저한 통제 속에 잊혀져 가고, 산 자들도 괴롭게 남은 생을 보내고 있다. 왕이위(王翼豫)는 16세이던 1967년 홍위병으로 나섰다가 19세의 다른 홍위병을 살해했다. 40년 넘게 자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살인의 죄책감을 짊어지고’라는 글을 통해 스스로 “나는 살인범”이라고 밝혔다. 2014년 1월 봉황TV에 출연한 그는 “당시 친구 20여명과 거리를 다니며 혁명을 핑계로 욕설과 폭력을 일삼았다”며 “학교 수업이 없어지자 청소년들이 군복을 입고 야생마처럼 거리를 활보했다”고 회고했다.

왕이위는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폭력을 쓰면 쓸수록 통쾌했고, 사람을 때리는 일이 즐겁기까지 했다”고 했다. 다른 홍위병을 살해한 것은 1967년 8월5일 반대파와 유혈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였다. 그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려 애썼으나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했고, 몇 달간 집 안에만 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베이징의 집을 떠나 우한, 광저우, 하이난을 떠돌았다. 하이난에 있던 그를 찾아온 군인들이 베이징 공안국에서 구류형을 선고했다고 통보했을 때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고 떠올렸다.

“찾아온 군인들에게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그제야 평온을 찾았다. 그런데 구류형을 통보받은 뒤에도 한동안 체포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더 힘들었다. 빨리 죗값을 치르고 싶었다.” 그는 하이난과 베이징의 감옥에서 1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다.

천루이성(陳瑞生)은 문혁 기간의 경험을 적은 책 <잊기 힘든 특별한 세월>에서 “‘자본주의파를 부수자,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주석 만세,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를 외치고 다녔지만 문혁이 대체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당 간부였던 아버지조차 “문혁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다”고 답했다고 회상했다. 문혁이라는 이름의 광기 속에서 지식층 인사와 관료뿐 아니라 문혁에 앞장섰던 홍위병들도 희생된 것이다.

중국에서 문혁과 홍위병의 ‘어두운 과거’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이달 초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대규모 음악행사가 열렸다. 한 그룹이 문혁 당시의 홍위병 군가들을 공연했다. 그러자 행사를 주최한 국립오페라·무용단 측은 성명을 내 “공연자들이 신뢰를 짓밟는 짓을 했다”고 맹비난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중국 당국의 속내를 드러내보인 에피소드였다.

어머니를 홍위병 공원묘지에 안장한 64세 시칭성(席慶生)은 지난 4월 뉴욕타임스에 “공산당은 자신의 흉터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동안 홍위병들의 아픔은 개인적 경험으로 치부됐으며 문혁은 제대로 평가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저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마오쩌둥의 사상과 위상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필화(筆禍)를 겪은 소설가 옌롄커(閻連科·58)는 9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인터뷰에서 “지금까지도 문혁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짚으며 “그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피하지 말고 어두운 과거와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문혁·마오쩌둥에 대한 입장은…개인의 과오로 규정 ‘혁명영웅’ 부정 안 해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평가는 아직 온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마오쩌둥(毛澤東·사진)의 공과 및 체제의 정당성과 연결되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50주년]<상>“난 살인범” 평생 자책…홍위병도 ‘문혁’ 광기의 희생자였다

중국 정부의 문혁에 대한 입장은 중국 공산당이 1981년 문혁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은 후 변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1981년 6월27일 제11회 6중전회에서 통과시킨 ‘건국 이래 당의 일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혁은 지도자의 과오로 시작됐고 반혁명집단에 이용당해 당, 국가, 민족인민에 심각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마오쩌둥의 개인적 과오라는 뜻이지 ‘혁명영웅’ 마오쩌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린뱌오(林彪), 4인방 등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도 읽을 수 있다.

공산당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민간 차원의 문화대혁명 논의를 금지시켰다. 과거사 정리작업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의 규모도 공식적 수치가 없다. 외국 연구자들이 추산한 것(100만~700만명)부터 4인방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예젠잉(葉劍英) 전 국방부장이 1978년 회의석상에서 발언한 2000만명까지 들쭉날쭉하다. 저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루돌프 럼멜은 문혁을 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뜻의 ‘데모사이드’로 규정하기도 했다.

문혁이 남긴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은 거꾸로 문혁 시대의 향수를 부르는 원인이 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빈부격차가 심각해지면서 마오쩌둥 말기의 주장을 따르는 마오좌파들의 ‘문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노년층, 빈농, 저소득층들이 호응하고 있다. 또 신좌파들은 문혁이 자본주의 성향이 강한 특권 관료층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이란?

50년 전 5월16일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발표된 마오쩌둥(毛澤東)의 ‘5·16통지’로 시작된 중국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십년 동란’이라고 불린다.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마오쩌둥이 극좌적 계급투쟁을 빌려 라이벌인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 등 실리파를 몰아낸 권력투쟁이었다.

여기에 대기근, 한국전쟁 물자 동원으로 민생고를 겪던 도시 노동자와 청년층의 불만이 더해져 ‘괴물’ 홍위병을 낳았다. 1966~1968년 득세하던 홍위병이 진압된 뒤에도 마오쩌둥 개인숭배에 앞장선 린뱌오(林彪)와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 등 4인방에 의해 문혁은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문혁은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다음달 4인방이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 기간 정치적 박해로 숨진 희생자는 최소 100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