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만화가 “아기공룡 둘리는 네버엔딩 스토리”

2021.06.05 13:02 입력 2021.06.05 17:15 수정

[주간경향·한국만화가협회 공동기획- 한국만화의 거장들] 김수정 만화가 인터뷰

김수정 만화가가 6월 1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김수정 만화가가 6월 1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20년 만의 귀환이다. 펜을 놓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둘리 아빠’로 유명한 만화가 김수정 작가(70)는 더 열심히 펜터치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2019년 말 출간한 3권짜리 아동소설 <모두 어디로 갔을까?>가 최신작이었기에 본업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떠나 새로운 길을 찾는 듯 보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펜에 잉크를 묻혀가며 전성기 시절 감각을 벼려내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빠르면 한달 안에 신작 만화를 내놓으려고 분주한 가운데서도 운동을 잊지 않으며 체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아기공룡 둘리> 외에도 <오달자의 봄>, <날자 고도리>, <천상천하> 등 아동에서 청소년, 성인까지 전방위적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소재의 만화작품을 꾸준히 냈던 그의 작품활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6월 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김 작가를 만나 끊임없이 이어진 그의 도전과 작가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한동안 캐나다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쉽게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

“지난해 5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운영 중인 회사 둘리나라도 캐릭터 머천다이징 사업이 주업무여서 담당직원들이 잘 처리할 수 있으니 한동안은 굳이 한국에 올 필요를 크게 못 느꼈다. 그런데 지금 예정 중인 신작 만화는 그림도 그려야 하고 컬러 작업까지 해야 하니 창작환경을 잘 갖춰놓은 한국이 편하더라.”

-이전까진 만화와 애니메이션 작업을 주로 했는데 의외로 복귀작이 소설이었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는 아동소설인데 처음부터 동화로 쓰려고 쓴 건 아니다. 처음으로 딸을 모델로 한 이야기다. 구상해둔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일단 글로 남기게 됐고, 캐나다에서는 만화 그림 작업이 쉽지 않아 결국 소설로 냈다. 그래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7년 걸렸는데 책 쓴 건 4년, 나머지 기간은 삽화를 그리고 책 찍어줄 출판사 찾느라 보냈다.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안 찍어줘 직접 냈다.”

-현재 작업 중인 작품은 어떤 내용인가.

“계획으로는 다음달에 2권 내려고 준비 중이다. 제목은 <너 죽으면 어디로 갈 거냐>로 생각해 놨는데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준 성인물 작품이다. <모두 어디로…>에 나오는 바람의 요정 이야기 다음으로 시리즈를 이어가 죽음의 요정이 나온다. 형식은 단편 에피소드를 모은 소품 형식인데 죽음을 이야기해도 내용은 가볍게 하려고 했지만, 재미가 없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만화 작업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다.

“이전까지 마지막 만화 원고가 나왔던 게 2001년이었고, 그리고 나선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다고 한동안 만화는 못 했다. 20년 만에 작업을 하니 손을 안 써 굳어버린 건 아닐가 좀 불안했다. 다시 펜터치 연습도 열심히 하는데 그래도 손이 생각보단 안 굳어 자신감이 붙더라. 태블릿 대신 종이를 놓고 펜소리 들어가면서 작업하는 걸 좋아하거든.”

-신작 말고 과거에 냈던 작품들을 복간할 계획도 있나.

“안 그래도 <작은 악마 동동>이라고 2001년 넉달 정도 짧게 연재했던 작품도 이번에 같이 내려고 한다. 1995년까지 한창 만화 많이 그리다가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하면서 연재를 중단한 기간이 6년 됐거든. 그동안은 마감에 쫓겨 만화 그리다가 6년 만에 다시 펜을 잡고 다른 연재 없이 그 작품만 하니까 정성스럽게 그릴 수 있어서 펜터치가 너무 잘 됐더라고. 이 <작은 악마 동동>이 작가로서 내가 봤을 때 가장 잘 그린 만화다. <아기공룡 둘리>도 다음 판을 내볼까 생각은 하고 있다.”

김수정 만화가가 자신이 쓴 아동 소설 <모두 어디로 갔을까?>를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김수정 만화가가 자신이 쓴 아동 소설 <모두 어디로 갔을까?>를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명실상부한 대표작 <아기공룡 둘리>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먼저 대부분의 명랑만화와 달리 <둘리>는 둘리가 시간 경과에 따라 성장해 자식도 낳는 결말로 이어졌다. 그렇게 구상한 이유가 궁금하다.

“말한 대로 많은 사람이 둘리의 결말이 어땠는지 궁금해한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둘리는 끝이 없다. 둘리의 새끼 돌리가 나오는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는 번외편이라고 봐야지. 재미삼아 낸 작품이고, 거기에서도 끝에 가면 시점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과거 둘리가 어렸을 적으로 시간을 되돌리며 끝난다. 그래서 아직 둘리 이야기의 끝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나도 모른다. 네버엔딩 스토리지. 막말로 내가 간 뒤 필요하면 누군가 이어서 할 수도 있을 테고.”

-마블의 <어벤져스>처럼 다른 작가들이 캐릭터를 계속 이어가는 방식으로 더 나올 수도 있을까.

“<둘리>가 이어진다고 해도 만화로 그리긴 어려울 것이다. 후속 작업은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지겠지. 그럴 확률이 높은 이유는 아직 만화 에피소드 중 끄집어내 애니로 만들 소스가 많기 때문이다. <뉴 둘리>(2008년 TV 방영)도 기본이 되는 만화책의 내용 중 3분의 1 정도만 도려내 26편의 애니로 만들었다. 나머지 3분의 2 중에서도 애니로 제작할 수 있는 소스는 많다. 국내 시장이 일본 시장의 반만 됐어도 극장판 애니 같은 작품도 더 나왔을 텐데 그 점은 좀 아쉽다.”

-<둘리>는 한국을 넘어 해외로도 진출해 판로를 개척하기도 했다.

“<얼음별 대모험>이 처음으로 1997년 무렵 독일에서 개봉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워너 브러더스도 차기작 제작에 공을 들여 우리와 함께 합작하는 식으로 추진했는데 그때 하필 IMF가 터지느라…. 달러 환율이 너무 올라 자금 조달을 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처음에는 양쪽에서 투자를 5 대 5로 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어렵다고 하니 워너 쪽에서 그럼 우리가 자금 더 낼 수 있다고도 하더라고. 그런데 그러면 자칫 판권을 뺏길 수 있어 결국엔 거절했고, 거의 다 된 일이 무산되고 말았다.”

-<둘리>를 리메이크해서 새로운 에피소드가 나오면 현대에 맞게 내용 각색도 할 생각인가. 네티즌 사이에선 고길동의 쌍문동 주택이 지금 시세로 20억원쯤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는데.

“배경은 현대화하는 각색이 필요하긴 하다. 그래도 다행히 쌍문동은 아직도 단독주택이 아파트보다 많은 동네라 변한 게 많진 않다. 사실 집값도 그쪽 동네는 비교적 안 오른 편이라 아파트는 좀 올랐어도 단독주택은 지금 시세로도 8억원이면 사더라. 쌍문동이 배경으로 나온 건 내가 처음 서울 와서 자취하던 동네라서다. 만화에 나오는 마이콜도 옆집 2층에 살던 당시 20살 정도 된 청년이 모델이었다. 마이콜처럼 장독대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내가 살던 주인집 큰딸이 예뻐서 잘 보이려고 노래를 불러댔나 싶어. 그런 주변 인물들과 일화를 은근슬쩍 차용한 게 많다.”

-<오달자의 봄>이나 <소금자 블루스> 같은 여고생 이야기도 그렇게 주변에서 취재해서 만들었나.

“<오달자의 봄>은 40년전 여학생들 이야기지. 당시만 해도 남녀 학생들이 같이 다니기만 해도 뭐라 그러던 시절이라 직접 대화하는 건 꿈도 못 꿨다. 내가 여학생들 이야기는 잘 모르니 빵집이나 분식집 구석에 앉아서 귀동냥으로 학생들 이야기 들으면서 그 학생들의 상황도 유추해 그렸다. <날자 고도리>도 취재차 당시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많던 을지로나 충무로 일대에 퇴근 무렵 술집에 자주 들러서 얘기를 들었지. 지금 생각나는 건 그때 여학생들도 그렇고 직장인들도 욕을 엄청 하던 게 생각난다. 요즘 애들 욕 많이 한다고 그러지만 그때도 다들 욕 천지였어. 물론 그대로 만화에 쓸 순 없었다.”

-시대상이 바뀌긴 했지만 둘리 캐릭터를 비롯해 여러 등장인물들 모습과 대사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에이, 촌스럽지. 왜 안 촌스러워 보이냐면 색감이 눈에 익고 계속 봐와서 그래. 둘리도 처음 나갈 때 고민을 많이 했다. 연재 중에 이야기가 풍부해지니 둘리가 악랄하게도 보이고 그러면서 그림이 아주 서서히 변해갔지. 애니 나오고 광고도 들어와 새로 그리면서 또 다듬어지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도 둘리의 원류를 찾는 데 고민이 많다. 앞으로는 또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도 고민이다.”

-둘리 캐릭터는 당시로선 드물던 공룡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아이디어는 자유로울 때 나오기도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나올 때도 있어. 둘리는 후자다. 그때는 만화 표현에 제약이 엄청 심할 때라 만화를 그리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심의실의 가위질이었다. 둘리를 구상할 때도 심의를 피해갈 방법이 뭘까 생각하다가, 사람 캐릭터 대신 동물이 나오면 희석이 되더라고. 동물 하면 떠오르는 개나 고양이보다 남들 안 그린 거 찾아 공룡을 택했지. 공룡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 동물이니 원시시대까지 올라갔는데, 그러다 보니 <고인돌> 아류 같더라고. 그래서 공룡이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현대화시키면 좋겠다 하는 쪽으로 간 거다. 다 코너에 몰리다 보니 찾은 길이었을 뿐이다.”

<아기공룡 둘리> 연재 당시 둘리와 고길동이 싸우고 있는 장면 / 둘리나라

<아기공룡 둘리> 연재 당시 둘리와 고길동이 싸우고 있는 장면 / 둘리나라

-둘리가 타고 온 빙산이 남극과 북극 중 어디서 왔는지 팬들 사이에서 논쟁도 벌어졌다.

“큰 공룡이 나오면 지면을 너무 크게 차지하고 사람과 밸런스가 안 맞아. 그래서 일단 아기공룡으로 했고, 아기공룡이니까 조금은 포악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아무리 만화라도 이야기엔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그럴듯한 포장도 필요했다. 그저 ‘뿅’ 하고 서울에 나타나면 재미없고 리얼하지도 않잖아. 고민 끝에 먼 옛날 얼음 속에 냉동된 둘리가 녹은 빙하를 따라 흘러 흘러 한강까지 오는 것으로 했는데, 사실 그때는 빙산이 흘러 서울까지 오는지는 알 수가 없었어. 당시 과학센터라는 곳이 있었는데 전화해 물어봤지. 남극의 빙산이 흘러 한강까지 올 수 있냐고. 그랬더니 뜬금없는 질문에 상담원이 말없이 피식 웃더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럼 질문을 바꿔 남극의 물이 흘러서 서울까지 올까 물으니까 그제야 ‘올 수도 있겠지요’ 그러더라고. 둘리 출신이 북극이냐 남극이냐 논쟁은 사실 내가 연재 중에 헷갈려 틀리게 쓴 부분 때문에 그런 건데 남극이 맞다.”

-둘리는 어떤 종의 공룡인지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했다.

“둘리는 외뿔공룡인 케라토사우루스다. 그런데 나중에 둘리 엄마를 그릴 때 푸근하고 순한 이미지로 하려고 이만한 초식공룡을 그려 설정이 안 맞게 돼버렸다. 그걸 알고는 ‘출생의 비밀’로 하고 앞으로 되도록 엄마에 대해 이야기는 안 해야지 마음먹었는데도 독자들은 끈질기게 ‘둘리는 육식공룡인데 엄마는 초식이냐’ 파고들더라. <얼음별 대모험>에서 설정 바꾸려고 은근슬쩍 둘리 엄마를 케라토사우루스로 그리기도 했는데 커다란 엄마 공룡 이미지가 워낙 깊이 박혀 있어 또 사람들이 거부감 느끼더라고. 그래서 또다시 원래대로 바꿨다(웃음).”

-최규석 작가가 2003년 <둘리>를 오마주해 그린 <공룡 둘리>나 엉덩국 작가가 2019년 그린 <애기공룡 둘리>도 주목을 받았다. 후배 작가들이 2차 창작한 작품을 보고 처음엔 충격을 받았다던데.

“최규석 작가는 졸업작품으로 <둘리> 오마주를 그리려는데 허락받고 싶다고 둘리나라에 연락이 왔다. 창작이라는 게 여러가지를 할 수 있는 것이니 하라고 했지. 그런데 내용이 정말 세더라고. ‘이건 아닌데?’ 싶었다.(웃음) 둘리 손가락이 잘리고 너무 살벌하니까. 그 작품 자체는 독립적으로 보면 못 그린 작품이 전혀 아닌데 사실 그래도 불편하긴 했어. 이후로 엉덩국 작가처럼 개인적으로 패러디한 것도 개성적인 표현이니까 할 수는 있지. 그런데 연극하는 팀에서 최 작가 작품을 바탕으로 연극을 하겠다고 연락이 온 적도 있다. 그렇게 공식화되는 건, 계속 인정하다 보면 걷잡을 수 없으니 안 된다고 했다. 다행스럽게 그만큼 센 작품은 더 안 나오더라(웃음).”

-사실 <둘리>의 파급력이 워낙 커 ‘둘리 아빠’로만 알려진 측면이 있지만, 작품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

“한번은 어린 독자한테서‘작품이 <둘리>밖에 없어요?’ 그런 말 들은 적 있다. 아닌데, 엄청 많은데. 둘리 하나로 천년만년 우려먹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작품 중에 좀 야한 성인물 그린 적도 있는데 잘 모를 거다. 여성 주간지에 연재한 <설화>라는 시대물이 있다. 처음엔 먹고살기 어려워 시작했는데 한달 정도 나가니 화제가 됐다. 그땐 여성지가 다방에 많이 깔릴 때라 다방에서 일하는 언니들의 필독 만화가 된 거야. 내용은 조선시대 첫날밤 신랑한테 소박맞은 여자 이야기다. 첫날밤인데 어둠을 틈타 괴한이 이 여자를 겁탈했고, 자결하려다가 죽지도 못해 결국 그 괴한에게서 사향 냄새가 났다는 증거 하나만 갖고 찾아서 복수하러 떠나는 이야기지. 결말은 겁탈을 사주한 게 신랑이었다는 반전이 나온다. 극화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 두달 만 하고 관두려 했는데 인기를 끌어 1년을 갔어. 리메이크 생각은 있지만 처음 그림이 구닥다리 느낌이라 아예 싹 새로 그려야 하니 만만치 않은 작업이긴 하다.”

-70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이 탄탄하다. 한때 트레이드마크였던 ‘파마머리’도 짧은 머리로 바뀌었고.

“운동을 안 할 수가 없는 게, 만화 하루라도 더 그리려면 체력이 돼야 한다. 다행히 지금도 펜으로 종이 긁을 수 있는 것도 눈이 별로 안 나빠져서기도 하고. 파마머리는 고수하고 싶었지만 세월은 못 속이더라. 머리가 빠지니 컬이 안 살아. 미장원 가도 이상하게 머리가 나와서 캐나다 있을 때 현지 이발소 가니까 그곳 아저씨가 머리를 심플하게 잘 하는 거야. 알고 보니 내 두상이 좀 서구 사람에 가까워서 캐나다 이발사가 맘에 들게 해주더라고. 그게 10년쯤 전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머리는 계속 짧아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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