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나치’ 대통령이 집권한 미국에서 벌어진 일

2023.05.20 07:40

‘첫 대서양 단독 비행’ 영웅이

루스벨트 꺾고 당선된 것으로 설정

반유대인 정책으로 파시즘 확산

사실과 상상력 교묘히 엮어

1936년 찰스 린드버그(가운데)가 나치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오른쪽)에게서 훈장을 받는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1936년 찰스 린드버그(가운데)가 나치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오른쪽)에게서 훈장을 받는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548쪽 | 1만8000원

필립 로스가 2004년 내놓은 이 작품은 ‘대체 역사 소설’이다. ‘최초 대서양 무착륙 단독 비행’으로 유명한 찰스 A 린드버그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벌어지는 일들을 한 유대인 가족 중심으로 풀어낸다. 허구의 시간 배경은 1940년 6월~1942년 10월이다. 단, 실존 인물에 관한 1940년 6월 이전이나 1942년 10월 이후 사건 묘사와 서술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비행사 복장으로 전당대회에 나타난 린드버그

린드버그는 1940년 6월27일 필라델피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그는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필라델피아공항에 착륙한 뒤 비행사 복장으로 대회장에 나타난다.

이전 린드버그는 독일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공군 중장 괴링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총통의 이름으로 훈장도 수여받았다. 히틀러는 린드버그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했다.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의 평등권, 사회권 등을 박탈하는 내용으로 인종차별법을 만든 1935년에 말이다. 이듬해엔 나치 훈장도 받는다.

린드버그는 미국이 독일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가하거나 영국과 프랑스에 원조하는 것을 “기필코 막겠다는 새로운 사명”을 추가해 고립주의자들의 우상이자 루스벨트의 적수로 떠오른다. “이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가장 중요한 집단들” 중 하나로 인구의 3%도 안 되는 유대민족을 지목한다. “유대인들이 이 나라에 가하는 가장 큰 위험은 우리의 영화, 언론, 라디오, 정부에 퍼져 있는 그들의 막대한 소유권과 영향력에 있다”고도 했다. 그는 “우리가 물려받은 유럽 혈통” “열등한 혈통의 침투” 같은 표현을 쓰곤 했다. 그는 자신과 루스벨트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전쟁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필립 로스 (C) Nancy Crampton. 문학동네 제공

필립 로스 (C) Nancy Crampton. 문학동네 제공

히틀러와 협약 체결한 ‘미국 대통령’

지명 이후 비행기를 몰고 48개 주를 돌아다니며 유세한다. 1941년 1월20일 대통령에 취임한 린드버그는 아이슬란드로 날아가 히틀러를 만나 이틀 동안 “진심에서 우러나온” 대화를 나눈 뒤 양국 평화 관계를 보장하는 협약에 서명한다. 호놀룰루에서 일본제국 정부의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 왕자와 외무장관 마쓰오카를 만나 하와이협약도 맺는다.

그해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을 두고는 “이 행동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공산주의와 그 해악의 전파를 저지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수호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소설은 아홉 살 유대인 소년 필립을 화자로 진행된다. 린드버그의 지명과 당선은 필립 가족에게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겨오던 신변의 안전이라는 중대한 권리를 그 어떤 사건보다 더 맹렬히 위협”한다. 지명 이후 필립 가족의 모든 것이 변한다.

린드버그 당선 뒤 워싱턴에 여행 간 필립 가족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예약한 호텔에서 쫓겨난다. 필립 아버지와 경찰관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링컨기념관 홀에 게티즈버그연설문이 있더군요.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적혀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호텔 예약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아니지 않소.”

동화정책 다음은 추방과 격리

린드버그는 ‘미국 동화청’을 만든다. 초대 동화청장에 랍비이자 필립 이모부가 될 라이오넬 벤겔스도르프를 임명한다. “미국의 종교적, 민족적 소수집단들이 더 큰 사회에 통합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 시행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 정책 중 하나가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유대인 소년 수백 명을 농장으로 데려가 8주 동안 일용 노동을 시키는 것이었다. 필립 아버지는 “그 해괴한 단체의 목적은 단 하나, 유대인 아이들을 제5열로 만들고 부모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거”로 여긴다.

필립의 형 샌디는 난생처음 뉴저지의 뉴어크를 떠나 켄터키주의 한 담배농장으로 가 일한다. 샌디는 이곳에서 동화청 프로그램을 선전하고, 청소년 참여를 유도하는 ‘고참병’ 역할을 하는 ‘징병관’으로 선정된다. 샌디는 린드버그 편이다. 린드버그 정부의 반유대 정책을 우려하는 유대인을 두고 “겁에 질린, 편집증에 빠진 게토 유대인들”이라고 비난한다.

“우리 중 가장 희생적이고 비타협적으로 린드버그를 증오하는” 필립의 사촌 형 앨빈은 캐나다군에 들어가 독일군과 싸우다 다리 하나를 잃는다. 부상 뒤 미국으로 돌아온 앨빈을 FBI가 감시한다. 어느 날 한 요원이 필립에게 다가와 앨빈의 동향을 캐묻는다. “린드버그 대통령에 대해선 아무 얘기도 안 하던, 필립군?” “형들이 누굴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있니?”

뉴스 프로그램 폐지한 자리에 댄스음악 프로

린드버그 임기가 길어지자 반유대 정서는 강화된다. 정부는 정책 강도를 높인다. 여러 회사 소속 유대인들을 격리하는 ‘홈스테드 42’ 프로그램도 실행한다. 메트로폴리탄라이프 뉴어크 지점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켄터키주 댄빌 지부로 발령받는다. “회사가 순순히 국가에 협력하자 아버지는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미국인들이 순응한 건 아니다. 3000만 시청자를 둔 뉴스 프로그램의 진행자 월터 윈첼은 파시즘과 반유대주의를 첫째가는 적으로 삼아 맹공을 퍼부었다. 린드버그의 친나치 철학과 정책을 연일 강도 높게 비판한다. “미국의 신사 숙녀 여러분, 권리장전이 휴지 조각이 되고 인종혐오에 물든 자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지금, 다음 희생자는 누구일까요?”

윈첼의 뉴스 프로그램엔 광고가 끊긴다. 그의 방송은 댄스음악 밴드 프로그램으로 대체된다. 랍비 벤겔스도르프는 윈첼이 거짓선동을 한다고 비난한다. 윈첼이 ‘홈스테드 42’ 정책을 유대인을 고립시키고 국가활동에서 배제하기 위한 파시즘 전략으로 매도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중등학교와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간 최초의 유대인 특권층은 동화청 정책을 지지했다.

미국 만화가 테오도르 소이스 가이젤가 친나치를 표방한 찰스 린드버그를 풍자한 만화다. 린드버그가 ‘나치 괴물’을 쓰다듬으며 “이 세계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건 히틀러가 아니라 루스벨트”라고 말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미국 만화가 테오도르 소이스 가이젤가 친나치를 표방한 찰스 린드버그를 풍자한 만화다. 린드버그가 ‘나치 괴물’을 쓰다듬으며 “이 세계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건 히틀러가 아니라 루스벨트”라고 말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윈첼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백악관의 파시스트’를 계속 비판한다. 선거운동 중 폭도들에게 테러를 당한다. 경찰은 폭도를 제지하는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 유대교 회당들도 공격당한다. 한 회당에선 폭발도 발생한다. 디트로이트의 유대인 수백 명이 온타리오주 윈저로 피신한다. 미국 나치, KKK단 등이 독일 유대인을 겨냥한 크리스탈나흐트, 즉 ‘수정의 밤’이라 불리는 사건을 본뜬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윈첼도 한 집회 도중 암살당한다. 여러 도시에서 시민들이 저항의 강도를 높여나간다. 이들은 “린드버그는 어디에?”라는 흑백 배지를 달았다.

이 작품은 대체 역사 소설이지만,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집권한 미국을 다룬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나 독일과 일본 점령하에 놓인 미국을 묘사한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보다는 상상의 여지가 덜 들어갔다. 가상 시간대에도 실존 인물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서술과 묘사가 많다. 실제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났을 법한 일들이다.

소설은, 린드버그가 실제 대통령 출마 권유 받은 데서 착안

로스는 후기에 “역사적 사실이 끝나고 역사적 상상이 시작되는 곳”을 탐구하려는 독자들에게 참고문헌을 제시한다. 루스벨트와 린드버그와 윈첼 등 주요 인물들의 실제 연대기도 넣었다. 현실의 린드버그 발언들은 소설 속 대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린드버그의 1941년 9월11일 연설 ‘누가 전쟁을 선동하는가’도 실었다.

소설은 린드버그가 아이다호주 공화당 상원의원 윌리엄 E 보라에게서 대통령 출마 권유를 받은 데서 착안했다. 한 집회에서 린드버그는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라는 연호와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린드버그의 친독일, 반유대주의 활동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멈춘다. 미국의 세계대전 참전을 반대하던 ‘고립주의자’ 린드버그는 1944년 일본군 전투기 한 대를 격추했다.

‘친나치 파시스트 대통령’ 후보자는 한 명 더 있다. 소설 속 ‘린드버그 정부’ 내무장관 헨리 포드다. 그 또한 실제 삶에서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독일계 유대인 은행가들’에게 전가했다. 노조에 폭력과 위협을 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인리히 포드가 미국에 파시즘운동을 확산시키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히틀러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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