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한복판에서 ‘사치품이 된 예술’을 비틀다

2024.04.15 11:43 입력 2024.04.15 20:20 수정

프랑스 예술가 그룹 클레어 퐁텐 아시아 첫 전시

예술의 상품화 비판하며 기성품을 이용해 작품 만들어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주제인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전시

여성·이민자·기후위기 등 현대사회 문제 다뤄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전시 중인 클레어 퐁텐의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전시 중인 클레어 퐁텐의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세계적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매장인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지하 1층. 카페에서 에르메스의 테이블웨어에 담긴 호텔 신라 쉐프의 음식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인다. 클레어 퐁텐의 전시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면 잠시 길을 잃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당황하지 않고 카페를 가로질러 들어가면 이국적인 문양이 찍힌 낡은 타일 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는 샛노란 레몬 열매들을 만날 수 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는 프랑스의 예술가 집단인 클레어 퐁텐의 전시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청담동의 호화로운 분위기와 달리, 클레어 퐁텐이 전하는 메시지는 급진적이고 정치적이다. 바닥에 나뒹굴며 발에 채이기도 하는 모조 레몬 열매들은 작품명 ‘이민자들’로 경제적으로 열악한 유럽 남부의 상징이자, 우리가 사는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민자들을 상징한다. 악마의 형상을 한 남성이 여성을 과도하게 보호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보호’는 강자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저지르는 구속과 통제, 가부장제의 모순을 꼬집는 여성주의적 작품이다. 빨갛게 달아오른 지구의 사진을 담은 ‘오직 4도’는 직설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로 급박한 기후위기 현실을 보여준다.

클레어 퐁텐의 ‘이민자들(Migrants)’.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클레어 퐁텐의 ‘이민자들(Migrants)’.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와 영국 출신 미술가 제임스 손힐 부부가 2004년 결성한 예술가 집단 클레어 퐁텐은 프랑스 문구 브랜드에서 따왔다. 이를테면 ‘모나미’ ‘모닝글로리’와 비슷한 이름으로, 농담같은 이름을 지은 이유가 있다. 기존의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작가상을 버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적 행위로서의 예술, 제도 안에서 통제받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다루기 위해서다.

전시장 안에는 이들이 고유하게 창작한 작품은 없다. 기존에 존재하는 이미지와 사물을 사용한 ‘레디메이드 예술’을 선보인다. 변기를 전시장에 갖다놓고 ‘샘(Clear Fountain)’(1971)이라 명명했던 마르셸 뒤샹의 ‘레디메이드(기성품)’를 계승한다. 영어로 ‘맑은 샘(Clear Fountain)’을 뜻하는 클레어 퐁텐은 뒤샹의 ‘샘’에 대한 오마주이자, 예술작품의 상품적 지위를 비판했던 레디메이드의 급진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바람을 담았다.

안소연 아뜰리에 에르메스 아티스틱 디렉터는 “현대미술은 표면적으로 새로워 보이면서 논란거리 없는 내용을 문화산업에 공급하는 상품이 되거나 개인의 진정한 창의성의 결실인 듯 고가의 사치품이 되곤 한다”며 “클레어 퐁텐은 상징자본의 핵심인 차별화된 작업을 ‘차라리 하지 않고’ 대신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차용해 소유권에 도전하는 길을 택한다”고 설명한다.

나사가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화가 지오토의 그림을 액정이 깨진 핸드폰으로 찍은 뒤 확대해 지하철 광고판과 같은 라이트박스에 전시한 작품들, 어린이의 패딩점퍼를 세워놓은 ‘분실물’ 등 기성품들이 클레어 퐁텐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작품이 된다.

클레어 퐁텐의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클레어 퐁텐의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전시 주제의 모티프가 되기도 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가 클레어 퐁텐의 대표작이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문구를 여러 언어로 번역해 네온사인으로 설치한 작품으로, 전 세계 60개 언어로 제작했다. 오는 20일 개막하는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과 바티칸관에 모든 버전이 전시될 예정이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선 영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한국어 버전을 볼 수 있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문구도 다른 곳에서 빌려온 것이다. 2000년대 초 토리노에 유포된 ‘이민자들에게’라는 제목의 전단지에서 발견한 문구다. 클레어 퐁텐은 “외국인이 된다는 것은 상대적인 조건이다. 모두가 누군가에게는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클레어 퐁텐의 ‘애도(Lament)’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클레어 퐁텐의 ‘애도(Lament)’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지오토의 그림 일부를 크게 확대한 ‘보호’ ‘새들의 설교’ ‘애도’는 생동감 있는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가부장제와 인간 중심주의, 세계에 만연한 폭력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깨진 액정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고풍스런 르네상스 회화는 재미있게 느껴지면서도 위태로워 보인다.

“예술은 정치적 난민들의 장소가 된다.” 클레어 퐁텐은 말한다. 이들은 기성에 존재하는 이미지와 물건 등 자본주의 상품의 부산물을 재조합해 여성, 난민 등 이 사회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그림을 판매하는 갤러리가 아니라 현대미술가들을 후원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6월9일까지. 무료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전시된 클레어 퐁텐의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 유리창 안으로 전시장 옆에 있는 카페가 보인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전시된 클레어 퐁텐의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 유리창 안으로 전시장 옆에 있는 카페가 보인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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