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명 사상에 책임 없다?···JR을 바꾼 10년의 싸움

2023.04.14 16:09 입력 2023.04.14 23:12 수정

2005년 600여 사상자 낸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오보·책임 회피·은폐·2차 가해 전형적 ‘레퍼토리’

유가족 아사노 “유가족의 사회적 책임” 10년의 기록

“운전사 탓”이라던 사고 추적, JR의 안전경시 경영 폭로

유가족과 JR 함께 진상규명 구성···안전 대책 마련

세월호 9주기·이태원 6개월···한국 사회에 던지는 ‘교훈’

2005년 4월 25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당시 사진. 과속으로 달리던 쾌속열차가 탈선, 전복되면서 앞쪽 2량이 선로변 아파트 1층에 부딪혀 있다. 글항아리 제공

2005년 4월 25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당시 사진. 과속으로 달리던 쾌속열차가 탈선, 전복되면서 앞쪽 2량이 선로변 아파트 1층에 부딪혀 있다. 글항아리 제공

궤도 이탈

마쓰모토 하지무 지음·김현욱 옮김|글항아리|424쪽|2만1000원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5년 4월25일 아침,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곡선 선로를 주행하던 쾌속열차가 철로로부터 5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아파트로 돌진했다. 과속으로 원심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선로를 이탈한 것이다. 전철의 1량과 2량이 처참하게 찌그러졌다. 마치 얇은 철판을 압력으로 구겨버린 것 같았다. 이 사고로 107명이 사망하고 562명이 다쳤다.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다.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이후 벌어진 일들을 여느 사회적 참사와 다르지 않았다. 사고 현장이 파악되기 전 ‘건널목 사고’라는 오보가 성급하게 나갔으며, 유가족에 대한 정보 제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가족의 사망 여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누구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아야 할 유가족들은 ‘정보의 진공 상태’에 놓였다. 사고 이후 JR 서일본은 책임을 회피하며 형식적 사과만을 일삼았다. 사고의 원인을 조직과 시스템의 문제에서 찾기보다는 운전사 개인 탓으로 돌리려 했다. 사고조사보고서가 JR에 유출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보상금’을 이유로 조롱당하는 등 2차 피해를 입었다.

2005년 4월 25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JR 후쿠치여마선 탈선 사고 당시 사진. 과속으로 달리던 쾌속열차가 탈선, 전복되면서 앞쪽 2량이 선로변 아파트 1층에 부딪혀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05년 4월 25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JR 후쿠치여마선 탈선 사고 당시 사진. 과속으로 달리던 쾌속열차가 탈선, 전복되면서 앞쪽 2량이 선로변 아파트 1층에 부딪혀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유가족들은 ‘사회적 참사’ 이후 따라오는 국가와 기업의 책임 회피라는 익숙한 레퍼토리를 10년에 걸친 싸움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로 써낸다. 그 핵심엔 아사노 야사카즈라는 인물이 있었다. 도시계획 컨설턴트인 아사노는 고베 대지진 복구 후의 도시 재생에 깊이 관여했으며, 일본의 급성장과 개발로 인한 사회적 재난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맡아온 전문가였다.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 아사노는 아내와 여동생을 잃었다. 둘째 딸은 중상을 입었다. 가족을 잃고 고통에 빠진 그는 책임회피로 일관하는 JR 서일본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사노는 말한다. “JR은 사고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원인을 검증해야 한다. 그 결과를 유가족, 피해자에게 제대로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게 우리 유가족들의 사명,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궤도 이탈>은 2005년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 10년간 싸워온 아사노와 유가족들의 싸움에 대한 기록이다. 책은 아사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의 지난한 진상규명 과정과 JR 서일본의 안전 시스템 개선 과정을 추적해나간다. 포기하지 않고 싸운 끝에 유가족과 가해 기업 JR은 한 테이블에 앉아 진상 규명과 대책을 만드는 과정에 함께했다.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9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는 6개월이 됐다. 아사노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과 교류하면서 “유가족으로서 재난 참사를 사회화하는 게 우리의 책무”라는 공통인식을 형성해왔다. 이태원 참사로 딸 최유진씨를 잃은 최정주씨는 추천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애도와 위로를 하기에 앞서 관련 단체나 지자체, 중앙 정부는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해득실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고 숨기고 침묵하는 방식으로 참사를 대한다”고 썼다. 사회적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참고서적이다.

책의 이야기는 두 축이다. 아사노 야사카즈라는 인물이 모든 것을 걸고 열차 사고의 진상규명과 JR의 시스템 개선을 위해 싸운 이야기가 한 축이라면, ‘JR 서일본의 천황’이라 불렸던 이데 마사타카를 중심으로 철옹성같이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조직 JR이 대형 인명사고를 내게 된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파고드는 것이 다른 한 축이다. 탈선 사고 당시 고베신문 기자였던 마쓰모토 하지무는 아사노 개인의 이야기와 JR 조직 사이를 오가며 1960년대 후반부터 이뤄진 일본의 고도경제성장, 철도 민영화 과정 속에서 벌어진 참극인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를 입체적이면서도 정밀하게 그려낸다. 2019년 고단샤 논픽션상 수상작이다.

2014년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는 아사노 야사카즈. 그는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고, 딸은 중상을 입었다. 윤희일 기자

2014년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는 아사노 야사카즈. 그는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고, 딸은 중상을 입었다. 윤희일 기자

‘당하는 쪽’에서 싸우는 원칙주의자 아사노

아사노 야사카즈는 고도경제성장과 국토 개발의 시대에 교토의 도시계획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다. 일본의 전국 종합개발계획으로 신칸센과 고속도로 등 교통망이 정비되고 대규모 공업지대 개발을 가속화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들어 ‘국토의 총파괴’라고 할 만큼 하천 범람과 산사태가 빈발했다. 아사노는 도시계획에 “주민의 관점이 전혀 없다”는 걸 느끼며 회의를 느끼던 중 ‘국토문제연구회’라는 스터디 그룹에 참가하게 된다. 고통받는 주민들 입장에 서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이 국토문제연구회의 일이었다. 국토연구회는 “주민의 요구를 민주적으로 취합해서 하의상달로 상명하복이 아니라 하의상달로 움직이는 ‘주민주의’”를 지향했다. 아사노는 “기술자로서의 내 위치를 주민, 더 정확히는 ‘당하는 쪽’ 입장에 두려고 했어”라고 말한다. 그는 원칙을 완고하게 내세우는 ‘전투형 컨설턴트’였다.

“지원자가 피해자가 됐다.”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이후 아사노는 말했다. 아사노는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슬픔은 묻어둔 채 JR을 상대로 한 싸움에 나섰다. 그는 “가족이 희생된 사고를 ‘우연히 일어난 불행한 일’로 끝내고 싶지 않다. 사회 전체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며 ‘사고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사고 피해자 모임 ‘4·25 네트워크’에 참여하며 진상규명에 나선다. “가해자 JR이 사고를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설명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가해 기업이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JR은 그러지 않았다. ‘사고의 사회화’는커녕, JR 조직의 문제로도 여기지 않으려 했다. 운전사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려 했다. 사고 직후 책임지고 사임한 임원 3명이 ‘낙하산’으로 자회사에 부임했다. 사고 후 2년 뒤 공개된 사고조사보고서는 운전사의 운전 실수, 개인의 주의 소홀을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아사노가 보기에 사고조사위가 지목한 ‘원인’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사고의 사실관계뿐 아니라, 운전사가 왜 그런 운전을 했는지 배경의 요인까지 분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사노는 징벌적 일근교육, 여유가 없는 철도 시간표 편성, ATS-P(자동 열차 정지 장치의 새 버전) 미설치, 회사 전체의 안전 관리 체계를 ‘사고 원인 4항목’으로 지목했다.

[책과 삶] 600명 사상에 책임 없다?···JR을 바꾼 10년의 싸움

잘못된 인간관과 왜곡된 안전의식이 빚은 참극

JR 서일본은 철통같은 관료주의적 조직인 동시에 안전보다는 이윤을 우선시한 조직이었다. “몹시 경직된 관료주의, 책임과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절대 양보도 하지 않는” 조직문화의 중심엔 ‘JR 서일본의 천황’이라 불린 이데가 있었다.

국철이 민영화되며 만들어진 JR 서일본은 적자 노선을 떠안아 취약해진 경영 기반을 메꿔야 했다. 이데는 ‘어반 네트워크’를 내세우며 오사카를 중심으로 배차 간격을 촘촘하게 편성하고, 출퇴근 시간대의 속도를 올렸다. 사고가 난 후쿠치야마선은 시간표를 개정할 때마다 여유 시간이 줄었고, 역에서의 정차 시간도 줄었다. 운전사들은 쫓기듯 운전해야 했고, 열차 지연은 만성적이었다. 안전 시스템 개량 또한 방치됐다. 설비 투자에서도 신형 차량 도입 등에 돈을 썼으며, ATS-P 설치 등 안전성 향상을 위한 설비 투자에는 인색했다.

이데는 안전 시스템을 갖추는 것보다는 직원들의 ‘정신무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운전사가 운전 실수를 한 경우 일근교육이라는 ‘징벌적 교육’을 실시했다. 반성문 쓰기, 선로의 잡초 정리, 화장실 청소, 상사와의 면담에서 장시간 질책과 욕설 듣기, 조회 시간에 공개적 망신 당하기 등으로 구성된 ‘일근교육’은 운전사들에게 막대한 스트레스였다. ‘학대에 가까운 일근교육’으로 자살한 운전사 유가족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당시 운전사는 거듭된 운전 실수로 패닉에 빠져 있었다. 운전 실수가 상부에 보고돼 질책받을 것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앞서 역 승강장을 지나쳐 정차하는 ‘오버런’으로 후진하는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지연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과속을 했고, 곡선 선로를 들어설 당시 차장에게 상부에 허위 보고를 부탁하고 무선 내용에 신경쓰느라 브레이크를 제때 밟지 못했다. “잘못된 인간관”과 “왜곡된 안전의식”이 빚은 참극이었다.

2005년 4월 25일 107명의 희생자를 낸 JR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사고 당시 탈선 열차가 충돌한 아파트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가운데 열차가 철로 위를 지나가고 있다. JR서일본은 이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의 운행시간을 조정, 기관사들이 여유를 갖고 열차를 몰 수 있도록 해다. 윤희일 기자

2005년 4월 25일 107명의 희생자를 낸 JR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사고 당시 탈선 열차가 충돌한 아파트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가운데 열차가 철로 위를 지나가고 있다. JR서일본은 이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의 운행시간을 조정, 기관사들이 여유를 갖고 열차를 몰 수 있도록 해다. 윤희일 기자

유가족과 가해 기업이 함께 마련한 안전 대책

아사노는 다른 유가족과 같이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억누르고 ‘기술자’와 ‘컨설턴트’로서 냉철한 면모를 보인다. 사고 이후 이데가 완전히 물러난 뒤 기술직으로서는 처음으로 JR 서일본의 사장이 된 야마자키 마사오와는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야마자키와는 ‘기술자’로서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아무리 의견이나 입장이 달라도, 대화의 창을 닫아서는 안 된다. 끈질기게 협상 자리에 앉아 상대방을 파악한다. 그렇게 아군을 만들고 합의점을 찾는다”는 ‘전투형 컨설턴트’의 자세로 JR을 대한다. 그 결과 피해자와 가해 기업이 같은 테이블에서 사고 원인에 대해 대화하는 전례 없는 자리가 마련된다.

사고로부터 4년째인 2009년 12월25일 유가족과 JR이 함께 참여하는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과제검토회’ 첫 모임이 열린다. 아사노는 이 자리에서 “책임 추궁은 일단 미뤄둔다”고 말한다. 가해 기업에 대한 분노가 사라진 것도, 가족을 잃은 상처가 아문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최대한 객관적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 차이를 전제로 하면서도, 서로 겸허한 자세로 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사고를 바라보겠다”고 말한다. 과제검토회를 거쳐 2012년 ‘JR 서일본 안전 팔로업 회의’가 발족하고 2014년 최종 보고서를 내며 활동을 마무리 짓는다. 징벌적 교육이 없어지고, 운전사 개인의 실수에 책임을 묻는 대신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파악하고 운행과 배차 간격을 늘리는 등 개선이 이뤄졌다. 아사노의 10년에 걸친 긴 싸움, 긴 여정의 결과였다.

아사노는 개인적 감정은 묻어둔 채 협상가와 기술자라는 공적인 자아를 철저히 내세우며 움직였다. 하지만 그도 사고 직후 “화산 분화구에 남겨진 기분”이라며 깊은 상실감과 고통에 빠졌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진상규명에 매진하면서 건강도 악화됐다. 협심증과 뇌경색이 찾아왔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사노의 활약은 영웅적이지만, 그가 예외적이고 특출한 유가족이었던 건 아니다. 가족을 잃은 상처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보통의 유가족이었다. 다만 “피해자의 심경을 사회적 문제로 만들어야 전문가”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의 삶의 궤도를 따랐다. 저자는 말한다.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 달릴 수 없듯이, 피해자가 돼서도 그 궤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책과 삶] 600명 사상에 책임 없다?···JR을 바꾼 10년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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