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버튼을 누를 때마다···기억해야 할 것들

2023.04.14 16:44 입력 2023.04.14 23:12 수정

고대부터 20세기 냉방시스템 개발

1950년대 프레온을 거쳐 현재까지

냉각 기술의 역사를 꼼꼼히 짚어

정치사회·문화·환경 파장 등 분석

에세이와 저널리즘 오가는 구성

‘냉방을 하지 말자’가 아닌

사회적 ‘공공 냉방’의 중요성 역설

건물 외벽에 빼곡히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앞을 상인이 지나가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건물 외벽에 빼곡히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앞을 상인이 지나가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일인분의 안락함

에릭 딘 윌슨 지음·정미선 옮김 | 서사원 | 624쪽 | 3만5000원

한여름 낮 동안 달구어진 방이 밤까지 식지 않을 때면 에어컨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생각한다. ‘에어컨은 위대한 발명품이다’. 냉방 기술의 탄생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꿨다. 사막 한가운데 현대적인 도시가 들어섰고, 이 안에서도 쾌적한 일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자연을 거슬러 온도를 낮추는 ‘냉각’의 기술은 몇백 년 전만 해도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사실 냉각의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기록될 만큼 길다. 고대 이집트에서 고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해보려 머리를 굴렸다. 헐렁하고 가벼운 옷을 입거나 아예 입지 않음으로써 열을 빠져나가게 했다. 북아메리카 남서부, 페르시아와 인도 사람들은 건축 설계에 힘을 썼다.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지역에 속하는 이곳에서 어떻게 건물을 지어야 열 흡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잘 이해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자연을 거스르는 방식은 아니었다. 이른바 ‘자연형 냉방’이다.

여기 한 남성이 있다. 미국 중남부 테네시주 출신의 에릭 딘 윌슨은 뉴욕 퀸즈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친다. 환경 인문학과 인종 문제에 관한 글을 쓴다. 그런 그에게 기후위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너무 광범위하고 크고 서서히 진행되는 파괴는 피부에 쉽게 와닿지 않는다”고 여긴 그는 ‘기후 폭력’과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냉각’에 대한 연구였다.

<일인분의 안락함>은 윌슨이 냉각 기술의 역사를 추적하고 이에 따른 사회·정치·문화·환경적 파장을 분석한 책이다. 600쪽이 넘는 이 책은 테네시주 멤피스의 한 도로를 달리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윌슨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차를 운전하는 것은 윌슨의 친구 샘이다. 샘은 구식 냉매 형태의 오염 물질을 파괴하는 작은 친환경 에너지 회사의 직원이다. 그는 사용된 적이 있거나 비축된 프레온 가스를 찾아 미국 곳곳을 다니고, 이를 구매해 에너지 효율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파괴했다.

프레온 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1980년대 이후 정부는 프레온 가스 생산을 금지했지만, 여전히 미국 전역에 프레온 가스는 남아 있었다. 개인이 이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윌슨은 프레온 가스의 구매 현장을 따라다니며 프레온 가스를 둘러싼 이야기를 파헤치고, 이를 독자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에세이’와 ‘저널리즘’을 오가며 나아가는 책의 독특한 진행 방식은 여기서 비롯된다.

폭염 특보가 발효된 날, 서울 용산구 남산에서 바라본 시내 모습. 사진은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높은 온도는 붉은색으로, 낮은 온도는 푸른색으로 표시된다.  문재원 기자

폭염 특보가 발효된 날, 서울 용산구 남산에서 바라본 시내 모습. 사진은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높은 온도는 붉은색으로, 낮은 온도는 푸른색으로 표시된다. 문재원 기자

이 지점에서 냉각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고대 자연형 냉방부터 20세기 초 최초의 냉방 시스템 발명, 1930년대 냉매 발명, 중앙식 냉방 시스템이 백인 중산층 주거지의 표준 규격으로 자리 잡은 1950년대, 프레온의 유해성이 발견돼 생산이 중단된 1980년대를 거쳐 2020년대 현재까지 꼼꼼하게 소개한다.

흥미로운 것은 냉각과 냉매가 과학이나 기술 외에도 사회, 정치, 문화, 환경과 깊숙하게 연결돼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냉각 기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준다. 1902년 최초의 완전한 냉방 시스템이 들어선 것은 뉴욕 증권거래소였는데, 이는 거래소에 냉방 시스템을 갖춰 거래원들이 무더운 여름에도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냉각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종차별적 사고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도 드러난다. 초기 에어컨 광고는 멕시코 등 더운 지역의 사람들이 ‘게으른’ 이유가 날씨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뒤처진 것이라며,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적 공포를 자극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 ‘윤리적인 삶을 위해 냉방을 하지 말고 더위를 참자’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오히려 냉방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고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저자는 에어컨을 켜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책의 원제가 <애프터 쿨링>인 이유다.

“바라는 것은 에어컨이나 모든 종류의 편안함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냉방 장치 버튼을 누를 때마다 (…), 인공적으로 냉방된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냉동실을 열 때마다, 즉 이런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막중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저자는 공공성의 회복과 모두를 위한 냉방, 즉 ‘공공 냉방’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공공 냉방이란 적절한 환경에서 모든 사람이 냉방 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 공공장소를 활성화하거나 지역사회가 통제하는 재생에너지 공급 등도 제안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한 사례는 흥미롭다. 1995년 시카고에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폭염을 연구한 결과, 도시 폭염 속 생존과 냉방 장치 소유 여부가 큰 관련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누가 살아남느냐는 해당 공동체의 사회적 회복력과 훨씬 더 관련이 있다. (…) 사망률이 높은 지역과 상대적으로 회복력 있는 지역 간의 주요 차이는 보도나 상점, 공공시설, 사람들을 친구나 이웃과 접촉하게 하는 공동체의 존재에 있었다. 사망률이 높은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이 흑인이고 가난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지역사회가 버려졌기 때문에 취약했다.”

[책과 삶]에어컨 버튼을 누를 때마다···기억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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