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도취가 아무리 판을 쳐도 우리는 연결돼 있다”

2024.03.22 08:00 입력 2024.03.22 11:22 수정

폭력과 공포, 혼란···

비극적 사건이 지배하는 가상 도시 바카베일

단절된 삶이 주는 절망

희망은 뜻밖의 ‘낯선 타인’에게서 발견된다

<우주의 알>을 쓴 소설가 테스 건티. 은행나무

<우주의 알>을 쓴 소설가 테스 건티. 은행나무

우주의 알

테스 건티 지음|김지원 옮김

은행나무 |476쪽|1만8500원

“무더운 밤, C4호에서 블랜딘 왓킨스는 육체에서 빠져 나온다.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지만 거의 평생 이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며 살았다.”

테스 건티의 장편소설 <우주의 알>의 첫 도입부다. 1부의 첫장 ‘무(無)의 반대’는 세 단락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은유로 가득 찬 시처럼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경험을 ‘심장의 황홀경’ ‘천사의 공격’이라고 불렀지만, 블랜딘에게는 어떤 천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오십대 발광체 아저씨는 있다.…그녀는 마루에 피 흘리고 있는 그녀를 촬영하는 스마트폰이고, 중국 선전시의 초록색 공장 바닥에서 그 전화기의 90번째 단계를 조립하는 십대 아이의 벗겨진 메니큐어다. 미국 인공위성, 욕설, 그녀의 고등학교 연극 연출가 손가락의 반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돌아와 첫 장을 열면 수수께끼였던 문장들이 선명해진다. 등장인물에 따라 툭툭 끊기는 이야기들, 인터넷 기사와 댓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챕터들, 등장인물들이 쏟아내는 너무 많은 생각들 때문에 이야기의 갈피를 잡아 속도감 있게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더듬더듬 모자이크 같은 조각들을 이어가다 보면 결코 한 쾌로 엮이지 않고 몇 문장으로 요약해 버릴 수 없는 게 지금, 여기의 삶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돌고돌아 다시 읽는 첫 장은 쿠키영상처럼 새롭고, 클라이막스처럼 벅차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은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가상의 도시 바카베일이다. 한때 미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제조 공장이 있었던 바카베일은 20세기 중반 공장이 폐쇄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여기에 더해 공장의 저장탱크에서 수천 리터의 벤젠이 새어나와 바카베일의 지하수를 오염시키면서 주민들은 빈혈, 유산, 선천적 결손, 불임 등의 질환을 겪기도 한다. 바카베일은 유력 언론사가 꼽은 ‘죽어가는 도시 톱10’ 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한다. 바카베일은 GM공장이 폐쇄하면서 경제불황을 직격탄으로 맞은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시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플린트 주민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이들 도시를 모티브로 했음을 시사했다.

이야기의 중심 인물은 바카베일에서 나고 자란 18세 소녀 블랜딘이다. 그는 바카베일의 저가아파트 라라피니에르에서 위탁가정에서 독립한 3명의 소년과 함께 산다. 라라피니에르는 프랑스어로 ‘토끼장’이라는 뜻이다. ‘토끼장’ 아파트에는 쥐들이 들끓고 에어컨이 없고 절반은 창문도 없다. 블랜딘은 토끼장에 살기 전에는 “위탁가정 제도 내에서 저주받은 가보처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며 자물쇠 달린 냉장고들 속에서” 자랐다.

받아야 할 돌봄을 받지 못하고 타인과 긴밀한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블랜딘은 텅 빈 공허 속에서 내심 ‘진짜’를 갈망한다. 열일곱에 만난 음악교사 제임스는 블랜딘이 처음 ‘진짜’라고 느꼈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더 큰 상처만 입게 된다. 블랜딘은 그와의 만남에서 가장 살아있다고 느꼈지만, 제임스에게 자신은 “자기애적인 보급품”이었고, 그들의 관계는 “약탈적이고 착취적”이었음을 깨닫는다. 블랜딘은 학교에서 최고 명문대학의 진학을 권유받을 정도로 똑똑했지만,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둔다. 자신이 ‘진짜’로 살아가기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서다. “블랜딘은 자신이 부분적으로만 진짜고 부분적으로만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적 접촉에 어울리지 않다는 걸, 이게 항상 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을 초월하고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하며 신비주의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책 <우주의 알>. 은행나무

책 <우주의 알>. 은행나무

소설에는 블랜딘 외에도 기이한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결코 원하는 일이 아님에도 충동에 휩싸여 동물을 학대하는 10대 소년 잭, 모공에서 색색의 섬유가 자란다고 믿는 50대 남자 모리스, 자신의 부고기사를 직접 작성하며 죽음과 셀카를 찍었다고 증언하는 유명 여배우, 이케아에 집착하는 10대 소년 토드 등 소설 속 인물들은 각각의 방식대로 기행을 저지른다. 이들의 기행은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우스꽝스럽지만 소설이 툭툭 던지는 기괴한 현대사회의 모습과도 무관치 않아보인다.

소설은 현대사회의 혹독한 현실들을 배경화면처럼 끊임없이 보여준다. 사무실을 축소하면서 프라이버시 침해를 막는다며 통풍구 안에 백색소음 재생기를 설치한 회사, 살인적인 노동강도로 직원들이 잇따라 자살하자 직원들로부터 자살방지 서약을 받은 폭스콘의 이야기, 이상기후로 홍수가 나 강이 범람해 아파트가 침수돼도 기후위기와는 무관하다고 강조하는 주지사, 공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홍보하는 정치인과 부동산 개발업자, 길을 건너는 여성에게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남성 운전자, 참혹한 범죄 현장을 촬영하며 유튜브에 올릴 생각에 신이 난 10대 소년 등 소설이 곳곳에 흩뿌려놓은 현대사회의 단면들은 폭력과 공포, 혼란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현대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불안한 내면이 주로 조명되는 가운데 이야기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치닫지만, 작품의 결말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희망이 사라진 도시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절된 삶은 현대인들의 외로움과 고독을 절감케 하지만, 결국 희망은 뜻밖에도 낯선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작품 도입부에 조앤은 “C2호: 마라스키노 체리 한 병이 외로운 여자의 침실용 탁자에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작은 포크가 있다”로 가장 짧게 설명된다.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래키던 모리스는 공원에서 블랜딘을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모리스는 뜻밖의 현장에서 블랜딘을 보호하고 조앤은 블랜딘에게 관계의 가능성을 다시 열어보인다.

“우선 나는 자아도취가 아무리 판을 치는 세상이라 해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하겠다.” 작품에 등장하는 유명 여배우 엘시 블리츠가 ‘자가 부고 기사’에 쓴 글이다. 그는 멸종위기에 처한 피그미세발가락나무늘보를 위해 자기 유골을 경매에 붙이겠다고 유언하며 이 문장을 덧붙인다.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나면 결국 이게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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