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벽 허물고 모두에게 열린 도시…예술 하려면 베를린으로 가라

2017.10.08 21:16 입력 2017.11.10 16:18 수정

② 독일 - 21세기 문화수도 베를린의 실험

“변화의 속도 천천히”…주민들이 ‘젠트리피케이션’ 바람막이

대안문화 행위인 스콰트(빈 건물을 점거하는 행위)의 상징이 된 동베를린의 중심지 미테 지역의 ‘타헬레스’ 건물. 1990년 철거를 앞둔 이 건물을 전 세계에서 몰려든 예술인들이 점거하고 정부와 협상과 싸움을 반복해 입주권과 지원을 얻어냈지만 현재는 소유주와의 계약기간이 종료되면서 거주자들이 퇴거한 상태다, 방문 당시 철거가 한창이다.

대안문화 행위인 스콰트(빈 건물을 점거하는 행위)의 상징이 된 동베를린의 중심지 미테 지역의 ‘타헬레스’ 건물. 1990년 철거를 앞둔 이 건물을 전 세계에서 몰려든 예술인들이 점거하고 정부와 협상과 싸움을 반복해 입주권과 지원을 얻어냈지만 현재는 소유주와의 계약기간이 종료되면서 거주자들이 퇴거한 상태다, 방문 당시 철거가 한창이다.

독일 베를린 북서쪽 체트카우 예술인 레지던시(거주하면서 창작활동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간). 그래피티로 가득한 2층짜리 벽돌 건물에 다가서자 깔깔거리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옆 놀이터에서 네댓명의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오후의 뙤약볕 때문인지 한쪽에서 어린 아들이 타고 있는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는 몇번이나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길다란 건물을 지나 놀이터 반대편으로 가니 목가적 풍경이 나타난다. 토마토며 상추, 허브 따위가 잔뜩 심긴 널찍한 텃밭에서 한 중년 여성이 작물을 살피고 있었다. 레지던시 인근에 살고 있다는 그는 큼직한 토마토를 보여주며 “예전엔 이곳이 기차역이었다”고 말했다. 레지던시 코디네이터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아있던 터라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었다. “5년 전 이 레지던시가 들어오면서 삭막하던 동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이렇게 밭에서 채소도 키울 수 있고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도 생겼고요. 게다가 여기 있는 예술가들이 이곳 정원에서 멋진 전시회도 열어요.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영화를 보는 날도 있지요.”

레지던시 코디네이터 로타 셰이퍼는 “관련 시설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베를린시로부터 장기 임대를 받았다”면서 “문화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입주한 예술인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반응도 좋아서 문화행사 외에 다양한 공동 프로젝트도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예술가들은 거의 거저이다시피한 임대료를 내고 이곳에 입주할 수 있다. 6개월밖에 머무를 수 없지만 1년에 2차례 실시하는 공개모집 경쟁률은 상당히 치열하다. 모두 13명의 입주자 중 12명이 독일 밖에서 온 작가들이다. 이곳에 머물렀던 덴마크 출신 예술가 마지 혼은 “다른 국적을 가진 10여명의 예술가, 큐레이터들과 매일 토론을 벌이고 독서클럽 활동을 하면서 내 예술적 방향과 주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른한살의 설치미술가 노아라 퀸타나는 올 초 고향인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건너왔다. 오랫동안 상파울루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온 그가 베를린으로 온 것은 “세계 예술인들이 왜 몰리는지 궁금해서”였다. 베를린 남동쪽 란트베어 운하 옆 ‘글로가우 에어’가 그의 보금자리다. 한때 학교였던 이 건물도 예술가를 위한 비영리 레지던시로 변신했다. 지난 6월 방문했던 그의 작업실은 좀 어수선했다. 운동화와 모자, 신문지, 천조각 등 온갖 물건들이 시멘트 반죽을 뒤집어쓴 채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있다고 했다. “전시회 제목은 ‘강압 속의 형태’예요. 액체와 고체 사이의 긴장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죠. 정치적 맥락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읽힐 수 있어요. 우리가 유동적인 무엇을 고정하려고 할 때 형태라는 것이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지난 몇개월간의 생활을 통해 궁금증을 해결했는지 물었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도시인 것 같아요. 물질, 소비 위주로 돌아가는 다른 대도시와 달리 구성원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나 할까요? 다른 사람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이곳에선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어요.”

전 세계 예술가들과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도시 베를린. 현재 이곳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예술가는 대략 6000여명으로 집계된다.

■ 패기 넘치는 가난, 첨단이 된 역사

지금은 조금 진부한 표현이 됐지만 한동안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로 일컬어졌다. 2001년부터 13년간 베를린 시장을 지냈던 클라우스 보버라이트가 이를 슬로건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느 도시에서라면 좀체 상상할 수 없는 도발적인 문구지만 베를린이라 가능했다.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가난’하고 물가가 싼 도시에 속한다. 지난해 쾰른 경제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럽 주요 국가 수도 중 1인당 평균소득을 ‘깎아먹는’ 유일한 도시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의 수도지만 2015년엔 36억1000유로(4조4357억원)를 다른 부유한 주로부터 지원받았다. 글로벌 물가조사 사이트 엑스패티스탄닷컴(expatistan.com)에 따르면 베를린 물가는 올해 9월 기준으로 유럽에서 40위다. 베를린 아래에 있는 수도급 도시로는 빈, 마드리드, 아테네 정도이고 나머지 50여개는 동유럽 도시들이다.

베를린은 갤러리로 넘쳐난다. 베를린 외곽 앙게르뮌데에 있는 베토니스트 레지던시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한 미술작가는 “스페인에 있는 갤러리 전부를 합쳐도 베를린에 있는 갤러리 숫자보다 적다”고 말했다.

베를린의 국제 예술가 레지던시인 글로가우에어의 작업실에서 전시회‘강압 속의 형태’를 열고 있는 브라질 예술가 노아라 퀸타나. 퀸타나는 “인간적이고, 시민들의 자치성·자주성이 느껴지는 도시다. 다른 대도시에 비해 집세가 싸다는 실용적 장점이 있기도 하다”고 베를린을 설명했다.

베를린의 국제 예술가 레지던시인 글로가우에어의 작업실에서 전시회‘강압 속의 형태’를 열고 있는 브라질 예술가 노아라 퀸타나. 퀸타나는 “인간적이고, 시민들의 자치성·자주성이 느껴지는 도시다. 다른 대도시에 비해 집세가 싸다는 실용적 장점이 있기도 하다”고 베를린을 설명했다.

베를린 시내엔 박물관 138개와 갤러리 400여개가 있다.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머물 수 있는 레지던시도 30여곳. 전시회, 패션쇼, 음악회, 공연 등 1500여개의 이벤트와 축제가 연중 끊이지 않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DJ가 모여드는 베를린은 수준 높은 클럽문화로도 정평이 났다. 역사적 공간과 건축물, 공공기념물도 많아 이곳만큼 다양한 시대를 집약적으로 볼 수 있는 도시도 드물다.

쓰레기 집하장에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명소로 바뀐 ‘프린체시넨게르튼’은 예술가를 꿈꾸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으로, 아마추어 아티스트의 공연을 늘 감상할 수 있다. 베딩에 위치한 ‘SAVVY’는 베를린 예술의 현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영국 출신 큐레이터 데이비드 엘리엇은 “베를린은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특히 미술 분야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평가한다. 카셀 도큐멘타, 뮌스터 조각전, 베를린 비엔날레 등 환상적인 미술축제가 벌어진다. 열정적인 관람객들이 몰린다는 점, 더 환상적인 것은 대안공간, 열정적인 관람객 등 작가를 키우는 토양이 마련돼 있다는 것이다. 세계 미술 시장의 중심인 런던에는 상업화랑이 많은 반면 베를린은 치열한 대안 예술공간이 밀집해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썩 빛을 발하지 못하는 대안 예술공간들이 현재 베를린의 예술적 아이덴티티를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베를린의 상징적 거리는 구 동독지역이던 크로이츠베르크다. 길거리 패션부터 오트쿠튀르까지 망라한 패션 편집숍, 인스타그램의 성지가 된 카페, 물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향신료 가게가 뒤섞여 있는 사이로 건물 벽에는 자유분방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자전거 거치대, 작은 가게의 쇼윈도 한구석 등 곳곳에는 이름없는 예술가들이 남겨놓은 흔적이 발견된다.

엔게베카(nGbK·조형예술신협회)는 ‘예술로 국경을 초월해 21세기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모토를 내세운 공간이다.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는 이곳을 찾았을 때 입구에는 ‘이곳은 자유지대입니다’(This is a Free Zone)라는 전시회 안내 패널이 붙어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10년간 이어진 성소수자 저항문화 퀴어하나(queerhana)에 관한 영상 작품들이 전시 중이었다. 전시장 안에 설치된 작품 앞에서 소파에 누워 감상하는 관람객들도 있었다.

2015년 이곳에선 한국의 상황을 고발하는 전시회도 열렸다. 타이틀은 ‘금지된 그림들-동아시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검사와 검열’. 지난 정권 동안 예술표현의 자유가 통제되는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사회 참여적 예술을 하는 스페인의 예술가 후안 카를로스가 베를린 노이쾰른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겸 거주지에 서 있다. 그는 3층짜리 이 집에서 세 명이 살며 매달 360유로의 집세를 나눠 낸다고 했다. “베를린은 예술가들에게 희망과 기회가 있는 곳”이라며 “파리와 런던엔 상업 화랑이 많지만 베를린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대안공간과 관람객들이 있어 작가의 성장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사회 참여적 예술을 하는 스페인의 예술가 후안 카를로스가 베를린 노이쾰른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겸 거주지에 서 있다. 그는 3층짜리 이 집에서 세 명이 살며 매달 360유로의 집세를 나눠 낸다고 했다. “베를린은 예술가들에게 희망과 기회가 있는 곳”이라며 “파리와 런던엔 상업 화랑이 많지만 베를린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대안공간과 관람객들이 있어 작가의 성장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향한다

냉전의 산물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도시 베를린은 이념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현장이 됐다. 통일 이후 동베를린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동베를린의 공동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후의 양상은 여느 도시와 달랐다. 통상적으론 ‘공동화=슬럼’ 공식이 생겨나게 마련이지만 이곳은 비정하고 살인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의 피난처가 됐다. 이민자, 학생, 예술가, 성소수자들이 찾아들었다. 빈 건물은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좋은 작업환경이 됐다. 물가가 싸다는 현실적인 이유, 게다가 이념 대결이 무너진 상징적인 공간에 자유로운 정신이 깃들면서 특유의 개방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베를린 관광청의 크리스티안 탄즐러는 “현재 베를린의 형성과정은 ‘스콰트’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스콰트는 빈 건물을 점거하는 행위다. 동베를린에 남겨진 빈 건물에 입주한 예술가들은 다양한 작업과 실험을 하며 버려진 도시 재생에 나섰다. 동베를린 중심지 미테에 있는 ‘타헬레스’가 대표적이다. 백화점이었다가 포로수용소를 거쳐 오랫동안 폐허상태였던 이 건물에 갈 곳 없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었다. 정부는 이를 헐고 싶어 했으나 예술가들에겐 창작의 산실로 자리 잡아갔다. 오랜 다툼과 협상 끝에 정부는 이곳을 창작인 지원센터로 제공했다. 유명세를 얻으며 베를린의 대표적인 관광포인트로도 각광받던 이곳은 아쉽게도 현재 철거공사 중이었다.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노이쾰른에서 만난 후안 카를로스는 스페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3년 전 베를린으로 와서 공공참여 미술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3층 건물 꼭대기에 자리 잡은 집에서 그는 문학전공자, 학예사인 2명의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누구든 예술을 하려면 베를린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왜’가 아니라, ‘당연히’요.”

세계 최대의 현대미술 축제 ‘베를린 비엔날레’를 주관하는 KW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 영상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방문객들.

세계 최대의 현대미술 축제 ‘베를린 비엔날레’를 주관하는 KW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 영상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방문객들.

월세 360유로(48만원)를 그는 친구들과 나눠 낸다. 다른 도시보다는 여전히 싸지만 200유로이던 3년 전에 비해서는 크게 올랐다. 그는 “베를린에선 작품활동만 해도 다행히 먹고살 만한 환경은 된다”면서 “작가들과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 수익을 얻거나 시가 주최하는 페스티벌 참가, 정부 프로젝트를 통한 보조금 지원 등 예술활동만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시민들에게 싼값에 빌려주는 엔베카(NBK·신베를린예술협회), 외국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돕는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베타니엔 예술인의집) 등은 예술인들의 생계를 배려하는 베를린만의 정책적·제도적 장치들이다.

■ 난민도 시민이다

“‘플랙스(FLAX·Foreign-Local Artistic Xchange)’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난민 예술가의 활동을 돕고 문화적 협업을 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주는 프로젝트예요. 시리아, 파키스탄, 이란, 소말리아, 팔레스타인 등 이 프로그램에 소속되어 있는 난민 예술가만 64명입니다.”

미테지구 KW현대미술관 기획자 카차 자이들러가 설명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도시의 영혼은 난민들도 품어 안는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이 받아들인 100만명의 난민 중 상당수 예술인들은 베를린으로 향했다. 이곳엔 난민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정착을 돕는 기관도 많다. 페르가몬 박물관을 비롯해 베를린의 주요 대형 박물관들은 지난해부터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들을 박물관 도슨트로 채용하고 있다.

사회적기업 ‘리스타트’(Restart)는 난민 예술가들을 지역사회 예술 커뮤니티에 소개하고 작품 판매를 주선해주며 정착을 돕는다. 지난해 창립된 이 회사는 베를린에 이어 최근 오스트리아 빈에도 사무실을 냈다. 리스타트 대표 요나스 닙코프는 “몇년 전 난민을 위한 직업 박람회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고국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을 그들에게 독일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3D 업무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예술가 자립 플랫폼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리스타트는 지난해 말 함부르크와 빈에서 난민 예술가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시리아에서 화가였던 히바 하요. 난민들의 예술 활동을 돕는 ‘리스타트’를 통해 후원자와 동료를 만나 그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시리아에서 화가였던 히바 하요. 난민들의 예술 활동을 돕는 ‘리스타트’를 통해 후원자와 동료를 만나 그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마바프 아타르는 시리아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미디어 아티스트다. 2014년 고향을 떠나 2년간 이스탄불에 머물렀던 그는 “언젠간 베를린에 가서 내 꿈을 펼치겠다는 희망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 리스타트에 대해 알게 됐지요. 지금도 제가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퓨전 페스티벌에 참가해 전시회를 열었는데 관람객들을 만나면서 꿈이 실현됐다는 실감이 났어요. 앞으로는 제가 디자인한 액세서리와 옷을 파는 온라인숍도 열어보고 싶어요.”

30대 중반인 히바 하요는 시리아 다마스쿠스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했다. 고향인 라타키아를 떠나 베를린에 온 뒤 리스타트에 등록했으나 1년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독일어를 배우면서 홀로 세 아이를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리스타트는 저를 버려두지 않았어요. 제가 포기하지 않도록 심리적인 지원을 해주면서 제 작품을 계속 홍보하고 소개해줬지요. 이곳을 통해 친구들은 물론이고 후원자도 만나게 됐어요.” 그는 지난 8월 함부르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현재 베를린 난민센터에서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목표라는 그는 기관의 이름도 정해놓았다고 귀띔했다. “전쟁 이후의 예술. 어때요?”

■ 터전을 지키는 사람들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는 속도가 더디다고 하지만 베를린도 전 세계적인 ‘젠트리피케이션’ 바람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다양한 색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유지해 온 크로이츠베르크와 노이쾰른, 미테 등의 지역은 국제적 투자자들이 몰려 임대료가 상승했다. 원래 이곳에 살던 주민들을 비롯해 문화를 꽃피운 예술가들은 외곽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베를린은 베를린이다. 이곳의 방식으로 찾아낸 해결책은 경제발전과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처음엔 불가능한 일이라는 비관도 있었으나 최근 크로이츠베르크에서 거둔 작은 성과는 베를린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희망의 씨앗을 뿌려가고 있다.

지난해 이곳 주민들은 한 뉴스를 접하고는 고민에 빠졌다. ‘구글 캠퍼스’가 크로이츠베르크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구글은 런던, 상파울루, 마드리드, 텔아비브, 바르샤바 등에 이어 세계에서 7번째 구글 캠퍼스 계획을 야심차게 내놨다. 스타트업과 창업자를 육성하는 구글 캠퍼스는 세계 주요 도시 입장에선 매력적인 유치 대상이다.

하지만 크로이츠베르크 주민들의 반응을 접한 구글은 적잖이 당황했다. 주민들이 구글 캠퍼스 입주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는 지역별로 마을 지킴이 조직들이 있다. 지역 개발을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자리 잡으면서 생겨난 모임들이다. 대다수의 조직들은 무분별한 젠트리피케이션에 반대하는 운동을 지속해왔다. 자연히 이들은 구글 캠퍼스 설립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을 지킴이 조직인 ‘비짐 키츠(Bizim Kiez)’ 사무실로 콘스탄틴 세르지우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함께 활동하는 ‘글로라이헤(Gloreiche)’의 하티비그 힐겐슈타인, 코니 파이퍼를 소개했다. 크로이츠베르크에서 11년 동안 살았다는 힐겐슈타인은 크로이츠베르크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베를린 장벽이 헐린 뒤에도 이곳은 평화로운 마을이었어요. 원래 살던 사람들과 터키 이주민들, 학생들이 함께 지냈지요. 가난했지만 슬럼은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젊은이들과 예술가들이 찾으면서 유명한 지역이 됐죠. 그러면서 집값이 조금씩 오르더라고요. 다른 도시에 비하면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잘못된 것 아닌가요? 자기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마을인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떠나야 하다니요. 누구나 자기가 살던 곳에 살 권리가 있어요. 우리의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도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에요.”

콘스탄틴은 “크로이츠베르크가 변하는 것은 베를린이 변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크로이츠베르크는 베를린의 브랜드예요. 그런데 구글이 왜 들어오려 할까요. 이곳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살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이곳의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가져다 쓰겠다는 것에 불과해요. 기업 입장에선 당연한 욕심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다 쫓겨나게 됩니다. 지역 경제가 발전한다지만 가난한 주민들에겐 재앙인 거죠. 2004년과 비교하면 베를린의 집값은 69%나 올랐어요.”

올 2월 이곳에선 구글 캠퍼스 입주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6000명 이상이 모였다. 이들은 또 임대료가 올라 문을 닫을 뻔했던 가게를 구제하는 일에도 나서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가게 3곳을 살려냈다. 그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빵집 ‘필루’였다. 힐겐슈타인은 “10년 동안 장사를 했던 가게인데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을 뻔했다”면서 “영국에서 이곳에 투자한 건물주를 우리 단체들이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 문제를 정치인들에게 호소하며 고민해줄 것을 촉구했고 공개 토론회도 열었다. 지역 언론도 이 문제를 이슈화하면서 결국 건물주는 합리적인 선에서 임대료를 조정했다.

내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파이퍼도 말을 보탰다. “우리는 베를린을 사랑합니다. 발전을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먹고살 수는 있으니까 좀 더 천천히 발전하자는 거예요. 그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 이 도시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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