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만의 창구이자 인도로 들어가는 출입문…고대 해양력의 증거

2019.06.07 16:11 입력 2019.06.07 16:58 수정
주강현

(6) 고대의 항구도시 ‘로탈’

아주 오래된 인더스 문명의 항구도시였던 로탈은 인도 아마다바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의 위엄을 짐작하게 하는 고대 로탈 항구의 상상도.

아주 오래된 인더스 문명의 항구도시였던 로탈은 인도 아마다바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의 위엄을 짐작하게 하는 고대 로탈 항구의 상상도.

■ ‘신성한 암소’의 고향을 찾다

고대 인도는 아라비아해와 페르시아만을 통해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이집트와도 교류했다. 그에 대한 다양한 증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서도 로탈(Lothal)이라는 고대의 항구도시가 대단히 중요하다. 로탈을 설명하려면 인더스 문명부터 살펴봐야 한다. 로탈의 해양력은 오늘날 파키스탄 인더스강 하구의 해안 지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대인의 항해 능력은 생각 외로 저평가되는 일이 많지만, 실제 수많은 증거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그들은 별자리와 구체적인 항해표를 가지고 원양 항해를 서슴지 않았다. 실제로 현존하는 인도유럽어 텍스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 <리그베다(Rig-Veda)>는 고대인의 지적 능력과 과학기술, 자연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 등이 결코 미숙한 단계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아주 오래된 인더스 문명의 항구도시였던 로탈은 인도 아마다바드(Ahmadabad) 지역 돌카탈루카(Dholka Taluka)에 있는 사라그왈라(Saragwala) 마을 근처에 있었다. 부가보(Bhugavo)강 옆 사라그왈라 마을의 아름다운 우텔리아(Utelia) 궁전부터 찾았다. 아름답긴 해도 삐걱거리는 층계, 무너진 창문, 먼지 쌓인 침실, 거미줄 쳐진 주방이 흡사 공포영화 속 장면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은 생태사적 변천으로 인해 사막화된 황무지지만, 이곳에 궁전이 있었다는 것은 중세까지만 해도 살 만한 동네였음을 말해준다. 우물가에 소가 모여들면 동네 사람은 소에게 정성 들여 물을 먹인다. ‘신성한 암소’의 고향답다.

■ 고대의 ‘입’ 로탈은 죽음의 장소

로탈은 고대의 ‘입’으로 불렸다. 언어학적으로는 ‘죽음의 장소’로 해석된다. 모헨조다로(Mohenjo Daro) 역시 ‘죽은 자의 흙무덤’이다. 로탈과 모헨조다로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수천년을 이어온 고대 문명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남은 것은 벽돌뿐이다. 유물이야 20세기에 들어와 발굴된 것이고, 이곳 원주민에게 고대의 기억은 무너진 벽돌더미로만 남아 있다. 그러하니 ‘죽음의 공간’이며, 이는 문명의 부침을 일상의 언어로 함의한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우물가에 소가 모여들면 동네 사람은 소에게 정성 들여 물을 먹인다.

우물가에 소가 모여들면 동네 사람은 소에게 정성 들여 물을 먹인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에 위치
생태사적 변천에 지금은 황무지
아름다운 우텔리아 궁전 ‘방치’
아래쪽엔 ‘조선소 저수조’ 흔적

이곳 흐르던 사바르마티 강이
고대의 항구와 캄베이만 연결
페르시아만 통해 아프간까지
구슬과 보석 등 무역으로 번성
문명사 초기 인류의 도전 보여

평원이 이어지다가 나오는 조금 높은 언덕을 오르면 일망무제의 전경이 펼쳐진다. 유적지는 언덕에 집중돼 있고, 아래쪽으로 일반 주거지와 강으로 연결돼 바다로 나가는 조선소 저수조가 건설됐다. 오늘날은 로탈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대항해에 적합한 항구 조건에서 벗어나지만, 항구가 대체로 강항(江港)에서 해항(海港)으로 진화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해항은 태풍과 해일 등이 잦아 위험하기도 했다.

문명은 바다에서 거슬러 올라와 강 언저리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Harappa) 유적도 모두 인더스강 계곡에 밀집됐다. 강은 바다로 이어지는 동맥이었으며, 다시금 바다에서 문명의 본거지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였다.

■ 파키스탄 신드에서 인도 구자라트 쿠치까지

로탈이 위치한 인도 서북부의 구자라트(Gujarat)는 광활한 서해 저지대에서 파키스탄과 경계를 이루며, 주도는 아마다바드다. 구자라트 북부는 쓸모없는 습지지만, 남부는 기름진 평야여서 쌀·면화·보리·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인도 영역만 가지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파키스탄의 신드(Sindh) 지방도 살펴봐야 한다.

신드는 힌두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 언급되는데, 신드 최초의 마을 정착촌은 기원전 7000년으로 소급되며, 기원전 3000년경에는 이곳에서 인더스(하라파) 문명이 일어났다. 100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를 출현시킨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이 흐르는 파키스탄과 인도 북서부, 아프가니스탄 북쪽까지 포괄한다. 많은 식민도시를 거느렸고,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필적할 정도로 발전했다. 인더스 문명에 속하는 도시는 계획도시로 건설됐으며 하수도 시스템을 잘 갖춰 50만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거주했다. 신드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Achaemenes) 제국에 의해 무너졌고,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인이 이끄는 군대에 정복됐다.

수천년 전 영화를 보여주는 벽돌무덤이야말로 세계문화유산과 다름없다.

수천년 전 영화를 보여주는 벽돌무덤이야말로 세계문화유산과 다름없다.

신드에서 국경을 넘으면 인도 구자라트 북부의 건조한 사막 지대인 쿠치(Kutch)가 나온다. 쿠치는 말 그대로 ‘간헐적으로 젖었다가 건조됨’을 뜻한다. 인더스강은 쿠치의 란(Rann)으로 유입되며, 란은 삼각주의 일부를 구성하는 집수지다. 장마철에는 물속에 잠기는 얕은 습지대이며, 다른 계절에는 사막에 가깝다.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바니(Banni) 초원으로 유명하며, 쿠치 란의 바깥 띠를 형성하는 계절 습지대도 있다. 쿠치 란은 인도의 타르(Thar) 사막과 파키스탄 신드 지방에 위치한 황량한 소금 습지다. 그 덕에 란은 전통적인 소금 생산으로 유명하다. 소금 생산에 관여하는 공동체는 주로 무슬림이며, 가난한 그들은 전적으로 소금에 의지해 살아간다. 역사적으로 쿠치는 일찍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그리스 저작물에도 언급된다. 쿠치는 쿠치만과 아라비아해에 둘러싸여 있다. 쿠치에서 내려오면 로탈이 나온다.

■ 고대 무역로라는 다양한 증거

로탈은 다른 유적과 달리 포털 사이트에서도 상세 정보가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만큼 오지이고 덜 알려졌다는 증거다. 오늘날 로탈은 사막 지대다. 고대의 기후, 지리, 식생의 모든 조건은 당연히 지금과 달랐다. 이곳을 흐르던 사바르마티(Sabarmati)강이 이 고대의 항구와 캄베이만(Gulf of Cambay)을 연결했고, 캄베이만을 통해 페르시아만과 연결됐으며, 펀자브 지방을 통해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으로도 연결됐다. 나아가 고대 그리스 문명과 연결될 정도로 로탈이 위치한 인도 서북부는 대외 교류의 창이었다.

로탈은 하라파 도시와 사우라슈트라(Saurashtra)반도 사이의 무역로에 위치한 사바르마티강의 고대 무역 루트와 이어져 오늘날의 쿠치 사막이 아라비아해의 일부였을 때 여러 도시와 연결돼 있었다. 로탈은 고대에는 활력 넘치고 번성했던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이곳에서 제작된 구슬과 보석 및 귀중한 장식품이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석구석에까지 닿았다. 구슬과 금을 만들기 위해 발달시킨 기술과 도구는 40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페르시아만의 창구이자 인도로 들어가는 출입문…고대 해양력의 증거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5세기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는 명을 내려 부장 스킬락스를 인도양으로 보낸다. 그는 29개월 동안 인더스강 하구에서 수에즈 운하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탐험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로탈이 번창하던 시대에 인더스 문명과 고대 그리스 문명이 연결돼 있었다는 증거다.

그레코-인도 왕국이 또 다른 구체적 증거다. 이 왕국은 기원전 마지막 두 세기 동안 남아시아의 북서부 지역(주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다스리던 왕국이었으며, 30명 이상의 왕이 통치했다. 이 시기에 그리스와 인도의 언어와 종교가 융합됐으며, 이는 그레코-불교 미술에 강력한 흔적으로 남았다.

또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하라파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교역이 존재했다. 하라파 유적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물개와 저울 등이 발굴됐고, 반대로 페르시아만 유적에서도 하라파의 소소한 물건이 발굴됐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을 따라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산을 넘어 인도와 연결되는 루트도 있었다. 기원전 8세기경에는 인도와 바빌론 간의 해상 교역도 다수 이루어졌다.

로탈이 페르시아만의 창구라면, 동시에 페르시아 문명에서 볼 때는 로탈이 인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인도 북서부와 페르시아만이 지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지는 지도를 펼쳐보면 쉽게 이해된다. 아라비아해를 통한다면 그야말로 지근거리다.

■ 수천년 전 벽돌만이 그날을 증거하고 있을 뿐

하라파인이 도래하기 전(기원전 3000년), 로탈은 캄베이만의 본토에 접근할 수 있는 강 옆의 작은 마을이었다. 구리로 만든 다양한 도구, 구슬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풍요로운 경제수준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흙으로 만든 자기(ceramic)는 매끄러운 빨간 표면의 세련된 양식을 보여준다.

하라파인은 아늑한 항구, 풍부한 면화와 쌀 재배 환경, 구슬 제조 장인이 있는 로탈에 매료됐다. 로탈 서쪽 지역에는 로탈에서 제작되는 구슬과 주옥을 원하는 큰 수요가 있었다. 집중적인 무역망은 이곳 주민에게 큰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무역망은 국경 너머로 이집트, 바레인, 수메르까지 뻗어 있었다.

로탈 무역이 글로벌적이라는 증거의 하나는 페르시아만 바다표범 가죽의 발견이다. 항구의 번성은 돌 구슬, 구리, 상아, 조개, 목화 생산품을 서쪽으로 수출하는 데서 비롯됐다. 페르시아만 양식의 테라코타(terra-cotta) 도장 조각은 로탈이 외부와 적극적으로 접촉했음을 알려준다.

지금은 사막화된 벌판에 마른 나무 몇 그루가 쓸쓸히 서 있고 텅 빈 저수조에 남은 수천년 전 벽돌만이 그날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곳에서 조선산업이 싹트고 국제 물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벽돌 하나하나가 세계문화유산인 셈이다. 황무지 로탈은 문명사 초기에 인류가 시도했던 국제 항로의 거친 도전과 응전을 암시하는 결정적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 주강현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페르시아만의 창구이자 인도로 들어가는 출입문…고대 해양력의 증거


국립해양박물관장, 전 제주대 석좌교수.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민속학, 고고학 등 융·복합적 전방위 연구로 세계를 누벼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등대의 세계사> <독도강치 멸종사>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환동해 문명사>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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