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국민, 계급’ 번역가 “보편주의가 왜 차별·배제를 더 강화했는지···예리한 통찰, 지금도 유효”

2022.04.25 17:29 입력 2022.04.25 20:01 수정

34년만에 ‘인종, 국민, 계급’ 첫 번역·출간한 김상운씨

인종과 민족은 전통의 산물 같지만

자본주의 전개 과정서 발생한 허구

국가·국민 개념 당연시하는 생각

인종주의의 씨앗 될 수 있다는 경고

‘인종, 국민, 계급’ 번역가 “보편주의가 왜 차별·배제를 더 강화했는지···예리한 통찰, 지금도 유효”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80)와 ‘세계체제론’의 이매뉴얼 월러스틴(1930~2019)이 함께 쓴 <인종, 국민, 계급>(두번째테제)이 출간 34년 만에 한국에 첫 번역·출간됐다.

1988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된 이 책은 인종주의의 지속적인 확산을 자본주의·민족주의와 결부해 예리하게 분석했다는 평을 받으며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이론의 고전이 됐다. ‘인종’이라는 차별·배제적 담론과 ‘국민’이라는 통합의 논리, ‘계급’이라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개념이 얽힌 복잡한 현실을 포착한 두 학자의 시선은 인종주의를 비롯한 세계적 갈등을 통찰하는 해석 틀을 제공했다.

30년이 넘게 흘렀어도 책에 담긴 분석은 유의미하다. <인종, 국민, 계급>을 번역한 현대 정치철학 연구자이자 전문 번역가 김상운씨(52)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인류학·사회학 등 기존의 보편주의 담론이 해명하지 못했던 인종주의를 둘러싼 문제에 타당한 분석을 제공했다”며 책의 가치를 설명했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2020년 미국의 블랙라이브스매터 운동이나 국내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 등 인종주의 문제들은 반복되고 변주되며 재생산되고 있다”면서 “이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는 이상 계속해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말했다.

김 번역가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현대 정치철학의 흐름을 재독하는 것”에 주목해온 연구자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비롯한 미셸 푸코의 강의록을 번역해왔다. 그는 국내에 <인종, 국민, 계급>의 번역·출간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국내에서도 책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있었고, 출판 시도도 있었다. 다만 이전에는 마르크스주의 쇄신의 측면에서 주목을 받아 관련 내용만 부분적으로 번역됐을 뿐,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내용은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번역가 김상운씨는 “죽을 때까지 100권의 번역서를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인종, 국민, 계급>은 공식적으로 그의 18번째 번역서다. 우철훈 선임기자

번역가 김상운씨는 “죽을 때까지 100권의 번역서를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인종, 국민, 계급>은 공식적으로 그의 18번째 번역서다. 우철훈 선임기자

책에는 출간 30주년을 기념해 발리바르와 월러스틴이 2018년 열린 콜로키움에서 나눈 대화가 수록돼 있다. 여기서 두 저자는 이 책이 1980년대 ‘인종’을 주제로 주최한 세미나에서 출발했음을 밝힌다. 김 번역가는 “당시 세계적으로,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미 ‘SOS 인종주의’라는 반인종주의 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관련 문제가 첨예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책은 인종, 국민, 계급 등에 대한 개념과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분석한 두 저자의 글을 교차하는 형식으로 엮었다. 김 번역가는 이 책이 “시장경제의 보편화 경향과 불가분한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같은 배제와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준다”고 말했다.

김 번역가에 따르면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론’, 발리바르는 ‘국민적 사회구성체’ 등 서로 다른 분석 틀을 사용하지만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라는 통찰을 공유한다. ‘한국인’ ‘일본인’ 혹은 ‘백인’ ‘흑인’ 같은 인종과 민족의 개념은 유전 혹은 전통의 산물처럼 이해되지만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발생한 허구의 개념이며, 이것이 계층화에 따른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문화’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월러스틴에게 인종주의는 “법 앞의 평등이나 기회균등과 같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제약 속에서 노동자의 계층화와 극히 불공평한 분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다. ‘가구(household)’의 재생산을 통해 특정 인종·민족 집단에 속한 개인들은 지위와 소득이 낮은 직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발리바르는 인종주의가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동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국민과 국가의 개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민족주의 자체가 인종주의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내포한 분석이다.

김 번역가는 “월러스틴은 자본주의는 보편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보편주의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면, 발리바르는 민족주의라는 보편주의 자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번역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책에서 공백을 느끼는 대목도 언급했다. 그는 “책에 실린 대화에서 저자들이 직접 언급하듯 종교에 대한 내용이 누락돼있다. 여기에 더해 젠더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 이는 후속 연구자들 몫으로 남은 과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책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유효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경제생산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공존에 대한 모색은 없이, 오히려 중국과 일본 등에 대한 혐오정서를 자극하는 ‘값싼 민족주의’ ‘맹목적 애국주의’가 들끓는 상황이 문제적이다. 책에서 보듯 이것은 곧 인종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전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하기에는 무겁고 어려운 책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이 책에 조금이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는 “월러스틴의 글은 상대적으로 쉬우니 그냥 읽어도 된다. 다만 발리바르 글을 읽을 때에는 책에 실린 2018년판 서문, 후기, 1997년판 서문을 순서대로 읽은 뒤 두서 없이 글을 읽어보는 방법을 권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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