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큰 슬픔 앞에 우리가 해도 되는 건 웃지 않는 것뿐일까

2022.11.11 16:02 입력 2022.11.11 18:42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10·29 참사 애도 기간, 예능 결방이냐 아니냐라는 양자택일을 넘어

이태원 핼로윈 참사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에 8일 시민들이 작성한 추모 메시지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이태원 핼로윈 참사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에 8일 시민들이 작성한 추모 메시지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당시, 모든 게 흐릿한 와중에 뜬금없이 뚜렷한 기억 하나가 있다. 방송국에서 종일 참사 관련 뉴스 특보를 내는 중에 MBC에선 특보와 특보 사이 비는 시간에 드라마 <생의 한가운데>를 특별 편성했다. 하희라가 보험설계사로 나왔고, 중년의 경쟁으로 점철된 삶에 후회를 느끼는 자동차 세일즈왕의 의문사를 다룬 이야기로 기억한다(당장 자료가 거의 없어 제목도 겨우 찾았고 1994년 세계 가정의날 특집 3부작 드라마였다는 것도 글을 쓰는 지금에야 알았다). 아직까지 머릿속에 왜 남았는지 모를 드라마 속 몇 장면의 디테일은 삼풍 참사라는 충격적 경험에 의한 소위 ‘섬광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당시엔 그나마 삶의 소중함에 대한 드라마의 주제 의식 때문에 편성했으려니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도 기억난다. 정치나 사회에 특별한 관심 없던 중3 소년이었지만, 적어도 이런 사건 앞에서 방송국이 뭔가를 굳이 내보낸다면, 여기엔 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기대로 드라마의 장면 장면을 읽어보려 했다. 건물과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때, 방송의 문화적 재현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그게 무슨 의미였을지는 이렇게 오랜 시간 기억 속에 반복 재생되며 남아있다.

오직 웃거나 웃지 않는 것만이 애도 판별의 실천적 기준 될 때 문화적 상상력은 뭘 할 수 있나

하지만 현재, 방송은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느냐는 것으로 국가적 재난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듯하다. 지난 10월29일 핼러윈 기간 서울 번화가에서 벌어진 압사 참사 이후 윤석열 행정부는 11월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했고, 이에 맞춰 방송사들은 예능 프로그램 상당수를 결방했다. MBC는 <나 혼자 산다>와 <놀면 뭐 하니?>를, KBS는 <이별도 리콜이 되나요?>를, SBS는 <신발 벗고 돌싱포맨> 등을 결방하며 애도에 동참했다. 케이블과 종합편성채널도 마찬가지다. 예능 결방에 대한 한국일보 기사대로 “시청자 다수의 감정을 살피는 건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예능 제작진들이 갖고 있는 책임”일지도 모르며, 아직 침통함이 가시지 않은 중에 왁자지껄 웃고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건 직관적으로도 썩 적절하진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의문이 생긴다. 큰 슬픔 앞에서 우리가, 그리고 방송이 문화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웃지 않는 것뿐일까. 좀 더 정확히 말해, 해도 되는 것은 웃지 않는 것뿐일까. 문화적 엄숙주의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오직 웃거나 웃지 않는 것만이 애도의 유무를 판별하는 단 하나의 실천적 기준이 될 때, 문화적 상상력은 애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너무나 당연히 국가애도기간이 끝나고 예능을 다시 방영하더라도 사건과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능 결방이 소극적으로 최소한의 예를 갖추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관에서 주도하는 문화행사 취소는 웃음을 포함한 일상의 감정과 추모 행위를 분리시키려는 작업처럼 보인다. 연말까지를 애도기간으로 정한 서울 용산구의 경우 관내 자치회관에서 운영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모두 취소했으며, 퀴어 아티스트 히지 양의 경우 “공연 하나는 자진해서 취소했고 다른 하나는 서울시의 권고로 취소”됐다고도 밝혔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 일정 기간 웃음을 자제하자는 사회적 절제를 오직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애도를 증명하라는 국가적 통제로 전유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 통제의 가장 심각한 점은 그 강제성에 있지 않다. 웃음기 없는 일정한 추모의 기간을 지나면 사건 이전의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할 것처럼 허구의 시계열을 작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심각한 사기다. 다시 <나 혼자 산다>를 보며 웃는다는 것이 10월29일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될 수 없다. 일상으로의 복귀와 회복은 사건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닌, 애도의 벽돌로 일상의 터전을 새롭게 짓는 것이다. 여전히 웃으며, 하지만 또한 여전한 웃음은 아닌 채로.

문화 행사·축제를 줄줄이 취소…사회적 절제를 웃음기 없는 얼굴로 증명하라는 ‘관제 애도의 뻔뻔함’

웃음도 추모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너무 방어적이다. 오히려 웃음 없인 진지한 애도가 불가능하다 말하고 싶다. 실제로 나는 지난 일주일간 심한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종종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이번 참사에 대한 대통령실 입장이 김은혜 홍보수석을 통해 밝혀질 때마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 119 구조요원 옷을 입고 붕괴 현장에 들어가 건물 설계도를 꺼내오며 일약 스타 기자가 됐던 그가, 바로 그 참사 현장의 기억을 치우고 지어진 주상복합아파트 아크로비스타에 사는 대통령의 입이 되어 또 한 번의 국가적 재난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는 걸 보며 웃지 않기란 어렵다. 심지어 지난 11월8일 국정감사에선 추궁을 받는 도중 ‘웃기고 있네’라고 메모하며 공분을 샀는데, 사실 누구보다 웃기고 있던 그가 그런 메모를 적는 것을 보며 자기 지시적인 코미디가 완성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전성기 몬티 파이튼을 능가하는 부조리 코미디가 빤히 벌어지는 중인데, 이것을 외면하고 슬퍼하기만 하는 애도란 얼마나 추상적인가.

지난주의 예능 결방을 존중하면서도 아쉬웠던 건, 그 추모가 요식적이거나 너무 엄숙해서가 아니라 웃음을 통한 애도의 가능성을 애초에 포기해서다. 만약 결방한 자리에 김은혜 홍보수석이 출연해 삼풍 참사 당시의 무용담을 밝혔던 2008년 MBC <무릎팍도사> 방영분을 편성했더라면 그 행간에 얼마나 많은 웃음과 통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웃음과 슬픔, 일상과 추모는 얼핏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순을 기꺼이 껴안고 지양해내는 것에 문화적 상상력의 위대함이 있다.

부조리 꿰뚫는 농담, 망자를 위한 노랫말…다양한 문화적 참여로 애도의 길 넓힐 때 요식적 감정표현이 설 자리 줄어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에 대한 나의 기억이 그러하듯,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이 국가적 참사 앞에 방송이 무엇을 안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느냐는 기억일 것이다. 문화 행사나 축제를 줄줄이 취소시키는 관제 애도의 뻔뻔함과 예능 일부를 결방한 방송국의 조심스러움을 등치시킬 수는 없다. 다만 일상의 한 축을 이루는 대중문화 소비의 즐거움과 추모의 감정을 분리할 때, 다양한 문화적 재현과 참여를 통한 애도의 가능성은 축소된다. 국가 권력은 문화에 침묵을 강요하지만, 발화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주도적으로 침묵하게 된다. 그 침묵은 공백으로 남지 않고, 외신과의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책임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도중 동시통역 기기 음성 전송 문제에 대한 책임을 되묻는 한덕수 총리의 질 나쁜 농담 같은 것으로 채워진다. 공연과 예능도 애도가 될 수 있다는 방어적 입장을 넘어, 방송국을 비롯한 대중문화 참여자들의 분발이 필요한 건 그래서다. 사태의 부조리를 꿰뚫는 농담이, 망자의 부재를 가슴에 새기는 노랫말이, 큰 힘과 큰 책임에 대한 서사적 재현이 담론의 공백을 채울수록, 총리의 질 나쁜 농담과 ‘근조(謹弔)’ 없는 검은 리본과 경찰을 질책하며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는 대통령의 화법처럼 온갖 쭉정이 같은 요식적이고 모호한 감정표현이 들어설 자리는 줄어든다. 이 넓은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신 웃거나 웃지 않는 양자택일의 좁은 길에 애도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구속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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