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헤이그 밀사 신임장의 옥새, 할아버지 우당이 위조해서 찍었다”

2023.03.01 06:00 입력 2023.03.01 08:06 수정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종찬 이사장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22일 서울 중구 예장동 이회영기념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과 관련해 그동안 연구하고 탐문해온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명의 특사가 지닌 신임장의 옥새 직인은 우당이 황제의 옥새를 모방해 전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종찬 이사장의 뒤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22일 서울 중구 예장동 이회영기념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과 관련해 그동안 연구하고 탐문해온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명의 특사가 지닌 신임장의 옥새 직인은 우당이 황제의 옥새를 모방해 전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종찬 이사장의 뒤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할아버지 우당이
‘보소당인존’ 보고
전각 연습
외삼촌 조남승은
옥새 위조범으로 기소

1907년 6월25일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준(李儁·당시 48)과 이상설(李相卨·37), 이위종(李瑋鍾·20) 세 명의 특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1907·6·5~10·18)는 이미 열흘 전에 개막했다. 을사늑약의 강압적 체결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파견된 이들은 고종 황제의 옥새가 찍힌 신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석을 요구했다. 신임장에는 정사(正使) 이상설, 부사(副使) 이준과 이위종을 보내 우리의 외교권을 되찾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왼쪽에는 ‘대황제’라는 글자 아래 수결(手決·자필 서명)이 있고 그 밑에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직인이 찍혀 있다. 당황한 일제는 신임장을 확인하고자 사진이라도 입수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인장이 위조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십수년 전 학계에서 제기됐다.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어 다른 문서의 황제의 인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임장 사진은 언론이나 교과서 등 많은 책에 실렸지만 진본은 찾지 못했다.

헤이그 밀사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옥새(왼쪽)와 1909년 고종 황제가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에게 보낸 서신에 찍힌 정본 옥새.  신임장에 찍힌 옥새는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어 다른 문서의 황제의 인장과 다르다.

헤이그 밀사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옥새(왼쪽)와 1909년 고종 황제가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에게 보낸 서신에 찍힌 정본 옥새. 신임장에 찍힌 옥새는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어 다른 문서의 황제의 인장과 다르다.

3·1절을 맞아 지난 22일 만난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87·전 국정원장)은 “헤이그 특사 신임장에 찍힌 인장은 우당이 옥새를 위조해 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인 그는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우당이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보고 전각(篆刻)을 연습했다는 사실과 “옥새 위조범 조남승을 기소했다”는 황성신문 1910년 6월5일자 기사, 그리고 조남승의 여동생인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 등을 제시했다. 헌종 때 편찬된 ‘보소당인존’은 왕실에서 사용되던 도장과 헌종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도장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700점이 넘는 인장이 날인돼 있다.

- 우당이 헤이그 밀서에 찍은 옥새를 위조했다는 확신이 든 계기는 뭔가요.

“우당은 전각이 수준급이에요. 1932년 우당이 옥사하신 후 아버지(이규학)는 상하이 집에 화단을 만들고 우당의 유품을 숨겨두셨어요. 1945년 해방과 함께 화단에서 꺼낸 우당의 유품에는 우당이 새긴 전각 30여점이 포함돼 있었죠. 그런데 지난해 말 누군가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보소당인존에 우당이 남긴 전각들과 똑같은 인장들이 있다고 말해줬어요. 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껏 찾아낸 것만 해도 5점이 같아요. 우당이 옥새 위조를 보소당인존을 보고 연습했다고 확신해요.”

- 보소당인존에 실린 인장들과 우당의 유품에서 나온 전각 형태가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옥새를 우당이 위조했다고 확언할 수 있나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제 어머니의 생전 말씀에 의하면, 헤이그 밀사 사건 후 일본 경찰이 제 외삼촌이자 왕실 비서관이었던 조남승의 묘동 집에 들이닥쳐 소지했던 모든 문서들, 특히 옥새를 감췄다며 추궁하고 장판까지 뜯어내 수색했어요. 외삼촌은 체포됐고요. 이후 황성신문 1910년 6월5일자에 ‘옥새 위조범 조남승을 기소한다’는 기사가 실렸어요. 일본은 신임장에 찍힌 옥새가 위조됐다고 판단한 것이고 위조범으로 외삼촌을 의심한 거예요.”

황성신문 1910년 6월5일자 “옥새 위조범 조남승 기소” 보도.

황성신문 1910년 6월5일자 “옥새 위조범 조남승 기소” 보도.

1910년 6월5일자 황성신문은 ‘조남승 기소’라는 제하에 “옥새 玉璽 위조범 조남승은 약림 若林 경시총감의 귀임을 대 待하여 기소하기로 결정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관련보도는 6월24일과 7월31일에도 이어졌다. 이종찬 이사장은 “앞서 1910년 5월27일자 황성신문에는 ‘조남승과 밀상 密箱’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태황제 폐하가 비서원승인 조남승에게 황제의 칙서 勅書 위조, 옥새 玉璽 위조 문건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외교 문건을 비밀 철상자에 넣어서 숨기도록 했다. 조남승은 최종적으로 뮈텔 주교에게 부탁하여 약현성당에 은밀 보관하였다. 그러나 이 밀상이 발각되어 통감부에서 조남승을 구속하고 이를 중대시하여 압수한 밀상과 문건 일체를 일본으로 보냈다.” 이종찬 이사장은 “뮈텔 주교는 친일주교”라고 말했다. 뮈텔 주교가 비밀 철상자의 존재를 일제에 알렸다는 것이다.

- 조남승은 옥새 위조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까.

“아뇨. 이 사건은 그해 8월 경술국치 이후 후속 보도가 없었고 흐지부지 종결됐어요. 외삼촌도 풀려났고요. 일본은 헤이그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1910년 7월20일 강제 폐위한 데 이어 8월29일 국권까지 빼앗았어요. 그런데 신임장에 찍힌 옥새가 위조된 것으로 알려지면 고종 폐위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니 사건을 덮어버린 거죠.”

- 위조했다는 옥새는 우당의 유품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거지요.

“우당이 바로 없애버렸겠죠. 발견되면 큰 문제가 되니까요.”

고종이 믿을 사람 없자
수결·옥새 밖에서 준비
신임장 작성하란 윤허만
외삼촌 통해서
할아버지에게 내렸을 것

헤이그 밀사 신임장

헤이그 밀사 신임장

- 고종이 특사를 파견하면서 왜 신임장에 옥새를 찍어 보내지 못했다고 짐작합니까.

“을사늑약 체결 후 궁궐은 일본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어요. 궁인 중에도 일본 스파이가 많아 황제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죠. 그러니 고종이 수결이나 옥새도 밖에서 준비해 신임장을 작성해도 된다는 윤허만 조남승을 통해 우당에게 내렸을 겁니다. 일본의 감시가 삼엄해 궁내에서 옥새를 찍는 신임장 제작이 어려운 데다, 사후에 문제가 되어도 황제는 ‘모르는 일’로 발뺌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국평화회의의 일정이 촉박했던 특사들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거고요. 그래서 고종이 이런 작업을 우당에게 책임지고 전담케 했다고 봅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기자실에서 3인의 특사 명의로 된 공고서를 이위종 부사가 발표한 다음날인 6월28일 오전 10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준명전에서 황제를 알현한다. 당시 이토와 고종의 대화는 <고종실록> 48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폐하! 보호조약이 싫으면 일본에 선전포고하시오.”

“짐은 모르는 일이오.”

“헤이그에 간 패거리들이 신임장을 갖고 있는데요?”

“그거야 짐이 어찌 알겠오.”

“그러면 저들이 마음대로 위조한 거란 말이오?”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다면 그들이 국법을 어긴 죄인이죠?”

- 우당이 옥새를 위조했다는 논거를 학계에도 보고했습니까.

“이 인터뷰를 통해 처음 밝히는 거예요. 이를 증명할 책임은 역사학자들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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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의 여섯 형제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외에 독립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2월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했다. 당시 처분한 명동과 남대문 일대 토지만 해도 현재 시세로 5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바탕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의열단’을 후원하는 등 국외 항일운동 전반에 걸쳐 큰 역할을 했다. 우당은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신채호·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운동을 벌였다. 1932년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66세의 나이에 고문 끝에 옥사했다.

- 고종의 급사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우당이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한 것을 보면 당시엔 왕정을 이어갈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런 우당은 이후 어떤 이유로 아나키즘에 빠졌을까요.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여운형이 베이징에 머물던 우당을 찾아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우당과 아우인 성재 이시영, 여운형과 아우 여운홍 등 29명의 국내외 독립운동가가 1919년 4월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집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를 열었죠. 하지만 우당은 이들이 감투 다툼이나 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 베이징으로 돌아와요. 이후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을 보고 돌아온 조남승과 조소앙을 만난 후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 인식을 갖죠. 그러다가 그즈음 일본에서 유학하고 대거 베이징에 들어온 아나키스트들의 설득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한 거예요. 결국 자유의지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거죠.”

- 우당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어요. 우당의 둘째형인 이석영 선생의 둘째아들 규서가 일제 밀정에게 밀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진실인가요.

“사지(死地)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면서 우당은 형님인 이석영에게만은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찾아갔어요. 이석영은 눈물로 동생과 이별한 후 끼니도 거른 채 우울해했죠. 이규서는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성병을 앓았어요. 연충렬이라는 사람이 병원에 데려다주고 병원비도 내주면서 이규서의 환심을 샀어요. 연충렬은 일제의 밀정이었어요. 그에게 이규서가 작은아버지가 다녀간 이야기를 무의식중에 흘린 거예요. 이후 이규서는 제 삼촌인 이규창과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처단됐어요.”

이종찬 이사장은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상하이의 소학교에 다니다 열 살 때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듬해 임정요인들은 미군이 빌려준 비행기를 타고 환국했고, 그의 가족은 난민선을 타고 귀국했다.

-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어서 되레 어려움을 겪은 일은 없었습니까.

“육군사관학교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후 구술시험을 볼 때, 정부의 국장급 이상 공무원이나 군 장성의 추천이 필요했어요. 아버지 동지이자 광복군 출신인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의 추천서를 받았죠. 그런데 구술시험 당일 면접관이 일본군 출신 생도대장 이용 장군과 참모장이었어요. 이용 장군이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길래, ‘저희 집안과는 중국에 살던 시절부터 세교가 있던 분들’이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귀관의 집안도 소위 독립운동한 집안이냐’며 몹시 경멸조로 반문하더라고요.”

-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억압받던 해방 이후 한국의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군요.

“그 자리에서는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궜지만, 분노가 치밀었어요. 고민 끝에 내가 당한 모욕을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얼마 후 아버지는 민영구 제독을 만난 자리에서 이 일을 전하셨어요. 화가 난 민 제독이 그 자리에서 이종찬 진해 육군대장 총장에게 항의전화를 하셨다고 해요. 이후 그들이 꾸지람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어요.”

그는 1960년 육사를 졸업하고 1965년부터 1980년까지 국가 정보기관에 복무했다. 1981년 치러진 제11대부터 1992년 열린 제14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줄곧 서울 종로·중구 또는 종로의 국회의원(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에 당선됐다. 1995년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했고, 1998년 DJ 정부 탄생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DJ 정부에서 안기부장(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임명돼 국정원장으로 물러났다.

광복회는
정치화해선 안 되고
이권단체여서도 안 돼
싹 쓸어버리고
원점서 다시 시작해야

- 김원웅 전 회장이 자금 횡령 혐의로 중도 사퇴하고 이후 회장으로 선출된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근씨가 부정선거 의혹으로 직무집행이 정지되는 등 광복회가 내홍을 겪고 있어요.

“싹 쓸어버리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해요. 광복회는 정치화해서는 안 되고 이권단체여서도 안 돼요. 이권은 타락을 불러오니까요. 광복회 카페도 보훈처가 운영하고 거기서 나온 수익금을 나눠주면 모를까, 광복회가 직접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지금은 까마귀 근처에 백로는 가지 않겠다며 광복회에 발길을 끊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많아요. 조직을 재정비해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국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명예로운 단체로 거듭나야 합니다.”(지난 28일 전화통화에서 그는 “27일 보훈처가 여야 합의로 보훈부로 승격된 만큼 광복회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배상
한국 대법원 판결을
일본에 강제할 수 없어
일본 기업 자발적 참여
유도하는 게 바람직

- 일제 강제징용 배상문제를 두고 한·일 양국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일본에 강제할 수 없습니다.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을 우격다짐으로 강요하지는 말자는 거예요. 그럴 경우 한·일 외교는 돌이킬 수 없어요. 기사다 총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2015년 외무장관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주도해 일본 예산으로 10억엔을 출연한 사람이에요. 이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파기했으니 우리에게 신뢰가 있을까요?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선 우선 우리 정부 예산에 한국 기업·시민들의 기부금을 받고 일본 기업은 자발적 참여가 이뤄지도록 유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 피해자와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윤 정부의 강제징용 문제 해결 방식이 한·일 위안부 합의와 같은 후유증을 낳을 거라는 우려가 있어요.

“박진 장관이 피해자들을 만났잖아요. 경청하고 반영되도록 노력하되 그분들을 내내 업고 외교할 수는 없는 거예요.”

- 내년 1월1일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직 국정원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공수사를 안 하면 국정원이 왜 필요합니까? 대공수사는 고도의 기술과 인내심이 필요해요. 수십년간 축적한 경험에 의해, 또 해외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수사해야 하죠.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일을 순환보직하는 경찰이 맡는 건 맞지 않아요.”

-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된 것은 조작 등 국정원이 수사권을 남용하고 국내 정치에 개입해 왔기 때문이에요.

“사람의 문제이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에요. 김대중 대통령의 하명을 받고 나는 ‘SAVAK(이란 정보기관), No! MOSSAD(이스라엘 정보기관), Yes!’라는 구호 아래 대대적인 국가정보기관 개혁을 단행했어요. 국가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개입, 민간기업을 상대로 한 이권운동, 국민사찰, 인권유린 등을 근절시켰죠. 같은 맥락에서 댓글공작, 알선수재, 정치공작 혐의 등으로 14년2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감형을 나는 반대했어요. 과잉충성이던, 정권의 지시던, 정보는 타락하면 안 돼요.”

윤석열 대통령
혼자만 부지런히
뛰어다니지 말고
큰 것만 챙기라
나머지는 밑에 맡겨야

- 아들(이철우 연세대 교수)의 절친인 윤석열 대통령에게 특별히 들려줄 고언이나 충고의 말씀이 있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무 혼자만 부지런하게 뛰어다니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대통령은 큰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장관들에게 맡기는 게 좋아요. 내 말의 의미를 윤 대통령은 알아들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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