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드는데 사명감은 '1'도 없어...후회 없이 오래 살아남고 싶을 뿐"

2018.08.03 15:07 입력 2018.08.03 18:51 수정

지금 한국영화계 한복판에 있는 영화사라고 해서 으리으리할 줄 알았다. 황정민, 최민식, 정우성, 강동원이 드나드는 곳이라면 넓고 쾌적한 호화 사무실을 연상하는 것이 당연하다.

서울 용산에 위치한 사나이픽처스 사무실은 그렇지 않았다. 잘못 들어섰다간 길을 잃을 듯 어지러운 간판과 복잡한 복도의 건물 5층이었다. 건물 소유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제대로 정비를 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지저분한 복도에서 형사와 살인자가 치고받는 액션신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실제로 이 건물 복도와 옥상에서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고 한다.

사무실 한쪽 공간에는 지난 영화에서 사용한 비품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대표실에 놓인 지난 영화들의 포스터, 몇 개의 영화상 트로피가 사무실의 정체를 드러냈다. 한재덕 대표(48)는 말했다. “일이 잘된 사무실을 옮기는 게 아니라고 해서…. 주변에 맛있는 식당도 많고요.” 창립작 <신세계>를 시작으로 <무뢰한> <검사외전> <아수라> <보안관> 등을 제작했고, <공작>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한 대표를 최근 만났다.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가  서울 한남동 사무실에서 개봉을 앞둔 영화 <공작> 포스터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이석우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가 서울 한남동 사무실에서 개봉을 앞둔 영화 <공작> 포스터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이석우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다음주면 <공작>이 개봉합니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들의 프로듀서, 제작자로 개봉을 겪으셨으니, 이젠 좀 덤덤하신가요.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시사회 전날부터 조금씩 긴장이 됩니다. 시사회하는 날 극장에 기자와 관계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영화가 끝나면 꼭 수능시험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기분이에요. 그건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네요.”

- 영화 흥행이 어느 정도 예측되나요.

“흥행은 잘 맞히지 못하지만, 욕을 먹겠다, 안 먹겠다 정도는 알겠더라고요.”

<공작>은 1990년대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남북한의 첩보전을 그린 영화다. ‘흑금성’이란 암호명으로 활동한 남측 스파이(황정민)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스파이는 대북 사업가로 위장해 베이징 주재 북한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에게 접근한다. 둘 사이엔 의심과 신뢰가 동시에 싹튼다. 하지만 남북의 정치상황은 둘의 운명을 거세게 휘감는다. 총이나 주먹이 아닌, 말과 분위기와 감정만으로 긴박감을 조성하는 스파이 영화다. 순제작비만 160억원대가 투입된 대작이다. 5월 제71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됐고, 해외 110여개국에 판매됐다.

- <공작> 제작이 쉽지 않았으리란 추측을 합니다. 기획을 시작한 시기가 박근혜 정권 때였고, 남북관계란 것이 워낙 변화무쌍하잖아요.

“사람들이 저보고 ‘용기 있다’고 하는데, 사실 생각이 없는 겁니다. 윤종빈 감독이 소재를 얘기할 때부터 ‘잘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전 영화 만드는 데 ‘사명감’이란 건 ‘1’도 없는 사람입니다. 투자가 쉽지 않았습니다만, 그건 지난 정권의 분위기뿐 아니라 예산이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김정일 별장’을 세트로 만들고, 흑금성이 활동한 1990년대 중국을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예산을 많이 썼어요.”

- 칸영화제 공개 당시엔 ‘어렵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많은 관객이 기대할 법한, 총 쏘고 격투 하는 액션 장면도 없습니다.

“제작자로서 제게 박쥐 같은 속성이 있는 것 같아요. 예술적인 동경이 있는가 하면, 돈도 벌고 싶거든요. 그건 아마 모든 제작자의 고민일 겁니다. 제가 어설프게 개입하기보단 감독을 믿는 수밖에 없죠. 작은 액션 장면이 있었는데, 그조차 편집 단계에서 삭제했어요. 사실 <공작>은 ‘남을 속인다’는 스파이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영화입니다. 권총 한 자루로 쑥대밭 만드는 영화는 아닙니다.”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가 자신이 제작한 영화 <공작> <아수라> <보안관> <대호>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석우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가 자신이 제작한 영화 <공작> <아수라> <보안관> <대호>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석우기자 foto0307@kyunghyang.com

2013년 사나이픽처스 창립작으로 <신세계>를 내놓았지만, 한재덕은 이미 <부당거래>(2010),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베를린>(2012)의 프로듀서로 이름이 높았다. 하나같이 상업적 성공은 물론, 한국영화의 흐름에 영향을 준 굵직한 상업영화들이다. 한재덕은 류승완, 윤종빈, 김성수, 오승욱 등 개성 있는 감독들과 작업했다. 배우 황정민과는 <공작>까지 사나이픽처스의 여덟 작품 중 다섯 편을 함께하는 기록을 남겼다.

- ‘사나이픽처스’란 이름은 어떻게 지었습니까. 젠더 문제가 중히 여겨지는 요즘 분위기와는 살짝 동떨어진 듯도 한데요.

“회사 이름에 대해선 조금 후회합니다. 지금도 영화 시작 전 ‘사나이픽처스’ 이름이 뜨면 부끄럽기도 하고요. ‘사나이’는 제가 예전에 쓰던 아이디였습니다. 받침이 없어 외국인들이 부르기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몇 가지 아이디어 중 직원들 상대로 투표했는데, ‘사나이’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제가 기타노 다케시 형님을 좋아해, 그의 영화사 이름(오피스 기타노)을 따 ‘오피스 사나이’로 하려다가 누가 ‘사채 사무실’ 같다고 해서 바꾸기도 하고….”

- 쟁쟁한 남자배우들과 많이 작업했습니다. 반면 여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는 거의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력이 없으니 좋은 배우들이랑 작업해야 부족한 실력이 가려지죠. 여배우 나오는 영화도 찍고 싶은데, 좋은 시나리오가 많지 않았습니다. 다음 작품인 <돈>은 신인 박누리 감독이 맡았는데, 여성입니다.”

- 창립작 <신세계>는 상업적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패러디되는 명장면과 대사들로 유명합니다. “살려는 드릴게” “드루와” “이러면 나가린데”…. <범죄와의 전쟁> <아수라>에도 그런 장면과 대사들이 있고요. 그런 장면은 미리 의도해 만드는 겁니까.

“영화를 찍다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을 만납니다. 대본에 있는 대사와 상황을 넘어, 현장에 있는 누구나 무릎을 치는 짜릿한 순간이 나오거든요. 그런 순간을 쉽게 표현하면 ‘명장면’이라 할 수 있겠네요. 찍을 때 감이 오기도 합니다.”

- 프로듀서로서 연속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어떤 기분이었나요.

“‘대체 왜 이러지?’ 하는 기분. ‘언젠간 안되겠지’ 하는 생각을 늘 밑바닥에 갖고 있었어요. 너무 잘되면 불안하잖아요.”

- 예상치 못하게 흥행한 영화는.

“<검사외전>이죠. 인기 있는 두 배우(황정민, 강동원)가 나오니 500만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970만 관객이 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이를 보이며 웃게 되더라고요.”

- 반면 가장 아쉬운 영화는 무엇인가요.

“<대호>입니다. 감독, 스태프, (최)민식이 형 모두 고생했는데 성과가 조금 안 좋았어요. 제가 조금 더 부지런했으면 나아지지 않았을까 후회했습니다.”

- <아수라>는 개봉 당시에는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쳤는데, 뒤늦게 열광적인 팬층이 형성됐습니다. ‘아수리언’이라 불리는 팬덤이 형성돼 영화를 반복해 보고, 극중 가상도시인 안남시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안남시민의 밤’이란 이름으로 상영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시장이 조폭, 타락한 경찰과 연루돼 온갖 불법, 비리를 저지르는 영화 내용이 특정 지자체를 연상케 한다고 해 다시 화제가 됐습니다.

“요즘 <아수라>를 다운로드 받는 분들이 늘어나 뒤늦게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공교롭다’고 하는 것 같네요. 현실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알았다면 제가 직접 투자해서 돈을 더 벌었겠죠(웃음). 김성수 감독님이 형사 영화를 만든 적이 없어서 개인적 욕망을 갖고 계셨고, 저도 그런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한 영화입니다. ‘남자들끼리 어깨동무하고 같이 지옥 가는 영화’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나요. 영화가 ‘잔인하다’는 평도 있었지만, 오히려 제가 더 부추겼습니다. 사실 폭력이 잔인한 거 아닙니까. 스포츠 경기처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힘의 우위를 자랑하니까요.”

- 제작하는 영화에 조폭, 검사, 정치인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많은 영화인들이 그런 직업군을 영화에 등장시키는 건 그곳에 사고와 갈등이 있기 때문이겠죠. 영화는 주인공과 반대자가 있고, 그 사이에 갈등이 있어야 진행됩니다. <토리노의 말>같이 일상을 다룬 영화는 예술영화 거장들이 만들 수 있죠. 전 그런 영화 만들 깜냥이 안됩니다.”

- <공작>은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 <신과 함께: 인과 연> 등이 맞붙는 최고 성수기인 여름 영화 시장 한복판에 들어갑니다. 다른 영화들에 신경이 쓰이시나요.

“이미 영화는 만들어졌으니, 다른 영화들의 상황에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저 내 자식이 무사히 학교에 도착해 시험 잘 보고 돌아오기 바랄 뿐입니다.”

- 세계 최고 권위의 칸영화제에 제작자로서만 두 차례(<무뢰한> <공작>) 가셨습니다. 레드카펫을 밟고, 영화 상영 후 기립박수를 받는 기분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꿈이냐 생시냐’ 했고, ‘언제 다시 오나’ 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 가다보니, ‘더 잘 만들어서 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작> 때는 레드카펫엔 같이 안 올라갔어요. 윤종빈 감독, 황정민, 이성민, 주지훈씨가 서 있으니 축구 올스타처럼 보기만 해도 좋았습니다. 전 그런 곳에 같이 서면 쑥스럽더라고요. 종영 후 기립박수 받을 때도 빨리 나오고 싶었어요(웃음).”

사나이 픽처스 창립작인 영화 <신세계>.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 이자성(이정재)과 조직의 2인자 정청(황정민)의 우정을 그렸다. 한국형 범죄영화의 한 정점. 영화 속 대사와 장면들은 숱하게 패러디됐다.

사나이 픽처스 창립작인 영화 <신세계>.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 이자성(이정재)과 조직의 2인자 정청(황정민)의 우정을 그렸다. 한국형 범죄영화의 한 정점. 영화 속 대사와 장면들은 숱하게 패러디됐다.

영화 <아수라>. 부패한 시장 박성배(황정민)와 그의 수하로 일하는 부패형사 한도경(정우성), 이들을 잡으려는 검사 김차인(곽도원)의 갈등을 그렸다. 최근 한 지자체의 상황과 연관해 다시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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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뢰한>. 도피중인 범죄자의 연인 김혜경(전도연)과 범죄자를 잡으려는 형사 정재곤(김남길) 사이의 기묘한 관계를 그렸다. 제68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진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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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 1990년대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남북한의 첩보전을 그렸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 진출작.

영화 <공작>. 1990년대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남북한의 첩보전을 그렸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 진출작.

한재덕은 군복무 시절 영화에 대한 꿈을 꿨다. 그는 “되는 일도 없고, 현실 도피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도피처로 삼은 영화를 업으로 삼기 위해 영화학교 시험을 쳤으나 세 번이나 떨어졌다. 이후 온갖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시나리오 교육기관에 들어가 다시 영화인의 길에 도전했다.

- 감독이 되려 하셨다면서요.

“잠깐 까불었던 거죠. 사실 감독이 받는 스트레스 강도는 제작자, 프로듀서보다 훨씬 셉니다. 제작자는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도 다음 작품을 준비할 수 있는데, 감독은 한 작품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실패하면 그대로 직업을 잃을 수도 있거든요. 영화는 짧게는 2~3년, 길게는 7~8년간 준비했다가 2~3주간의 개봉기간에 모든 게 결정납니다. 전 직업을 잃을 만한 용기는 부족합니다.”

- 2003년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스태프로 처음 영화계에 들어오셨는데요, 어떤 기분이었나요.

“겨울이라 추웠어요(웃음). 그래도 좋았습니다. 조명이 켜지고, 추운 야외 현장에서 입김이 퍼지는 기분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지금도 멀리서 조명이 켜진 모습을 보면 그 안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 영화계에 자리한 지난 15년간, 한국영화계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입니까. 제작자의 힘이 약해지고, 투자자의 힘이 강해졌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 같습니다.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 기획을 잘하는 제작자들은 주도권을 갖게 마련입니다. 투자자와 창작자 사이에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진 않습니다. 전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보고 ‘나쁘지 않게 만들었네’라는 평을 듣고 오래 살아남고 싶을 뿐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일들이 아쉽고 후회되지만,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려고 애씁니다. 제가 팬이었던 감독 형님들 모시고 얘기하고, 오래오래 복닥복닥 살았으면 좋겠어요.”

-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축구하고 땀 흘릴 때. 그리고 물론 영화가 잘될 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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