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에 12조원 수혈

특정기업 부실 ‘한은 발권력’으로 메워…국민 부담은 ‘무시’

2016.06.09 00:23 입력 2016.06.09 00:25 수정

정부 원하던 대로…한은서 직접 개입 ‘급한 불 끄기’

“부실 책임 안 묻고 사회적 합의 없어…재벌 봐주기”

<b>유일호 “명분 충분”</b>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8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 등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미지 크게 보기

유일호 “명분 충분”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8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 등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8일 정부가 발표한 12조원 규모의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실탄 조성에 재정 투입이냐 발권력 동원이냐를 놓고 줄다리기를 해온 정부와 한국은행이 만들어낸 일종의 절충안이다. 정부는 한은의 발권력 동원은 물론 추후 한은의 직접 출자 가능성까지 열어놓음으로써 당초 원하던 바를 대부분 얻어냈다. 한은으로선 정부가 현물출자 등으로 부담을 나눠 지는 모습을 보이고, 대출 회수 장치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발권력을 동원할 명분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자평한다. 이에 따라 당장 급한 불은 끄게 됐지만 특정 기업의 부실을 재정과 한은의 발권력으로 메우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됐다. 국민 부담으로 귀결되는 사안을 정부가 국민적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추진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손실이 예상되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해 우선 정부는 연내에 1조원 규모의 현물출자를 하고, 내년 예산에 두 은행에 대한 현금출자 소요액을 반영하기로 했다.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는 한은의 대출금 10조원과 기업은행이 정부의 현물출자를 받아 대출하는 1조원 등 11조원 규모로 조성된다. 정부가 일단 2조원을 내놓기로 함으로써 한은이 나설 수 있는 모양새를 만들어준 것이다.

자본확충펀드는 한은이 기업은행에 대출을 하면 기업은행이 자본확충펀드에 대출해 산은이나 수은이 발행하는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지원한다. 코코본드는 유사시 투자금이 주식으로 강제 전환되거나 상각되는 채권으로, 국제기준(바젤Ⅲ)에 의해 자본으로 인정된다. 당초 정부는 한은이 국책은행에 직접 출자해주길 원했지만 한은은 손실 가능성과 독립성 훼손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펀드는 11조원을 한꺼번에 조성하는 게 아니라 지원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재원을 마련하는 ‘캐피털 콜’ 방식으로 운용된다.

한은의 직접 출자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니다. 정부 발표문은 ‘시장 불안이 금융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는 경우 정부와 한은은 수은 출자를 포함해 다양한 정책 수단을 강구’한다고 명시했다. 한은의 수은 출자 시 정부가 지분을 조기에 양수하도록 ‘노력’한다는 문구도 들어 있다. 상황에 따라 양측 간 갈등이 재연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한은이 대출 방식으로 자본확충펀드에 참여하는 것도 결국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국민 부담은 불가피하게 됐다. 정부는 구조조정에 한은을 끌어들인 근거로 ‘한은은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할 때에는 금융 안정에 유의해야 한다’는 한은법 1조 2항을 든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국책은행의 건전성 문제로 시장에 자금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금융이 불안해지는 것은 명확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책은행의 관리·감독을 맡고 있는 금융당국은 물론 부실 기업의 대주주 역시 책임지는 자세가 부족한 상황에서 금융 안정을 명분으로 중앙은행을 끌어들이는 게 적절하느냐는 논란은 여전히 남게 됐다.

한은이 돈을 찍어 시중 통화량이 늘어나면 물가가 오르고 금리가 내려가기 때문에 한은은 늘어난 통화량을 흡수하기 위해 통화안정증권 등을 발행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비용 발생이 불가피하다.

또 자본확충펀드에서 한은 대출금을 보장해주기 위한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재원도 한은이 출연하는 쪽으로 논의되고 있다. 한은 입장에선 대출과 보증을 모두 자기 돈으로 해야 하는 셈이다. 한은이 신보에 보증재원으로 출연하는 돈도 회수할 수 없는 돈이다. 금융노조는 이날 성명에서 “부실 사태에 대한 책임 규명 및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자본확충 규모를 확정하는 것은 재벌 봐주기이자 또 다른 정경유착”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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