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동물에겐 더 가혹했다 '반려동물 피해사례 전국단위 조사'

2019.11.07 20:49 입력 2019.11.08 10:35 수정

· 내년 2월까지 피해 접수

독성 모르던 2000년대 중반부터
급성호흡곤란 반려동물 발생
“피해자들 증상과 똑같았어요”

피해동물들 ‘높은 사망률’ 보여
유해물질, 체중에 반비례해 영향

생존한 피해동물 확보·분석 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겪을
만성질환 연구에 큰 도움될 듯

울산에 거주하는 이모씨는 2010년 반려견 3마리를 거의 동시에 떠나보냈다. 이씨는 세 살이었던 어미 썬이와 썬이가 낳은 한 살의 별이, 하늘이가 모두 심한 감기 증상을 보이자 입원을 시켰다. 그러나 모두 산소호흡기 신세를 지다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네 동물병원은 물론 대학병원에서도 제대로 된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고, 어미 썬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며칠 후 새끼들도 어미 뒤를 따라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세상을 떠난 썬이. 썬이 오른쪽 뒤편으로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살균제가 보인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모씨 제공.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세상을 떠난 썬이. 썬이 오른쪽 뒤편으로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살균제가 보인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모씨 제공.

어렵게 슬픔을 이겨내던 이씨에게 다시 충격을 안겨준 것은 바로 가습기살균제 사건이었다. 이씨는 “피해자들의 증상이 썬이, 별이, 하늘이가 겪은 증상과 똑같았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개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는 너무 미안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반려견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수개월 동안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가습기당번’이라는 제품을 사용했다. 그는 썬이와 해당 제품의 모습이 같이 담겨 있는 사진도 가지고 있다.

2010년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사망한 하늘이, 썬이, 별이의 생전 모습.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모씨 제

2010년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사망한 하늘이, 썬이, 별이의 생전 모습.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모씨 제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반려동물 피해 사례에 대해 전국 단위 조사가 시작된다. 반려동물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아직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의 영향과 만성질환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수의임상포럼은 이달부터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반려동물 피해 사례 조사를 실시한다고 7일 밝혔다. 수의임상포럼은 내년 2월까지 피해 신고를 받고,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의심되는 사례를 진료한 수의사를 대상으로 해당 반려동물의 의료정보를 취합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다. 이번 조사는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연구용역 과제로 진행된다.

수의학계에 따르면 사람의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인 2000년대 중반부터 일부 동물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호흡곤란을 겪는 반려동물 사례가 잇따라 발생했다. 수의임상포럼 회장인 김현욱 해마루동물병원 원장은 “한 가정에서 기르는 개 2마리가 동시에 비슷한 폐질환을 겪는 등 기존 폐질환과는 전혀 다른 집단발병 사례를 확인했다”며 “진료기록을 데이터화해놓은 덕분에 이를 역추적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통해 반려견 14마리의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가습기살균제, 동물에겐 더 가혹했다 '반려동물 피해사례 전국단위 조사'

이달 초 현재 피해 사례가 수집되거나 피해 내용을 신고한 가정은 모두 69가구이다. 사회적참사특조위는 해마루동물병원과 함께 이 가운데 10가구 36마리의 피해 사례를 분석해 지난 5월 환경보건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바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사망한 반려견은 21마리, 반려묘는 10마리였다. 아직 생존해 있는 고양이 5마리는 애경 ‘가습기메이트’ 제품에 노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 동물 사망률이 높은 것은 대부분 유해물질이 체중에 반비례해 피해를 입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같은 양의 가습기살균제 독성물질이 호흡기로 들어갔더라도 사람보다 체중이 가벼운 반려동물들이 더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수의임상포럼은 이번 연구에서 충분한 숫자의 생존 피해 동물을 확보·분석할 경우 향후 사람의 가습기살균제 만성질환 연구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동물실험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생존 동물을 통해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김 원장은 “반려동물은 사람보다 수명이 짧고 신체대사가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피해 동물의 만성질환을 연구하면 사람 피해자들이 겪게 될 질환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며 “대부분의 피해 동물 보호자들도 피해 보상보다는 재발 방지와 원인 규명에 도움이 되는 것을 원해 반려동물 피해 연구에 협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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