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 ‘조문’ 거론 땐 친북좌파 취급…정부 결국 “파견 불가”

2015.10.21 22:35 입력 2015.10.22 01:11 수정

김일성 조문 파동

1994년 7월 북한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조문 여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정부는 북한에 조문단을 파견할 의사가 있느냐”고 질의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부영 의원은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북한을 협상의 상대로 본다면, 북한 권력층이 문제가 아니라 북한 주민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해 조문단을 파견할 의사가 있는가”라고 질의했고, 임채정 의원도 ‘장제스와 마오쩌둥 사이의 상호 조문’을 예로 들면서 조문단 파견 의사를 물었다. 보수 언론들은 야당 정치인들이 김일성 조문에 나서려 한다고 비판했다.

언론은 ‘전범인 김일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숙청과 테러, 탄압 등 인권유린에 주목해야 한다’ 등의 주장을 제기하면서 “조문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논지를 폈다. 김일성 사망에 대한 글을 썼던 공보처 산하 간행물제작소의 한 전문위원은 글의 마지막에 ‘평안히 눈감으시라’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김일성에게 사용되던 ‘주석’이라는 호칭도 곧 사라졌다.

김일성 사망에도 불구하고 남북정상회담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속됐다. 하지만 보수 언론은 ‘조문’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세력들을 무조건 ‘친북 좌파’로 몰아갔다. 학생운동권은 대학 내에 김일성 분향소를 설치해 기름을 부었다. 그해 7월14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남한 사람들의 조문을 환영한다는 담화를 발표한 직후 이념적 대립은 심화됐다. 정부는 조문단 파견이 불가하다고 밝혔고, 안기부는 7월19일 김일성종합대학 조명철 교수의 귀순을 발표했다. 이튿날에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작성된 옛 소련 문서들을 외무부가 공개했다. 남침을 확인해주는 문서들이었다.

조문 파동은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 못지않게 한국 사회에서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김일성 조문은 정부가 고민해야 할 사안이었으나 조문 여부를 질의한 야당 의원들은 ‘종북 좌파’로 낙인찍혔다. 탈냉전 이후 한반도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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