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부흥·희망·행복주택 ‘정반대 현실’ 웅변하다

2016.11.21 21:34 입력 2016.11.21 21:38 수정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이름에 투사된 정치적 희구와 현실

6·25전쟁 뒤 유엔한국재건위원단(UNKRA)의 물자 지원으로 지어진 UNKRA 주택(사진 뒤편)과 초가집이 공존하던 서울의 모습. 미국국제협력처(ICA) 주택처럼 해외원조 기관 이름이 주택 앞에 직접 등장한 사례다.  유엔아카이브

6·25전쟁 뒤 유엔한국재건위원단(UNKRA)의 물자 지원으로 지어진 UNKRA 주택(사진 뒤편)과 초가집이 공존하던 서울의 모습. 미국국제협력처(ICA) 주택처럼 해외원조 기관 이름이 주택 앞에 직접 등장한 사례다. 유엔아카이브

고현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오래전 인류의 거취와 생활문화를 탐구하는 고고학과 달리 당대 도시 풍속이며 세태를 꼼꼼하고 깊게 탐구하는 학문이 곧 고현학이다. 그런 까닭에 고현학이란 살아있는 이의 기억과 잔상을 새로운 역사적 깨달음의 준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니 역사의 현재성을 질문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일종의 아날로지(analogy·유추)를 정교하게 활용해 주변과 세상을 해설하는 방식이거니와 실존의 구체성을 드러내는 상징 기호 해석의 한 방편인 셈이다. 주택 앞에 붙인 구호성 명칭을 살펴보는 일이 그렇다.

■주택 이름으로 본 ‘역사의 현재성’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전략적 경영을 위해, 총독부 관료나 민간 관리인들의 안정적 조선 정착을 위해 공급한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사와 교수사택 혹은 식은(殖産銀行) 사택이니 하는 주택 명칭은 광복 이후 적산가옥이나 미군주택 혹은 연합군 가족용 주택(DH주택)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일제강점기 조선가옥 혹은 개량한옥 등으로 불렸던 고래의 전통한옥도 오늘날에는 도시한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941년에 설립된 조선주택영단(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이 지은 집도 당시에는 영단주택이라 불렀지만 이 역시 해방 이후에는 기설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호칭되었다.

이렇듯 주택 앞에 가져다 붙이는 명칭은 매우 정치적이고, 그 안에는 주택정책 입안 주체 혹은 정권의 안일한 전망이 담긴다. 물론 안일한 전망이란 곧 현실의 신산스러운 풍경과 부박함을 감춘 것이니 결핍과 다르지 않다.

‘부정축재, 불도저’ 등 1960년대 신조어를 정리한 1969년 12월20일자 동아일보 보도.  동아일보·대한주택공사 제공

‘부정축재, 불도저’ 등 1960년대 신조어를 정리한 1969년 12월20일자 동아일보 보도. 동아일보·대한주택공사 제공

박근혜 정부가 공을 들인 ‘행복주택’만 하더라도 가족과 혹은 홀로 일상을 누릴 거처에 대한 정권의 정치적 갈망이 담겼다. ‘국민 행복시대’를 연다고 표방한 것이지만 현실은 그와 달라 한국인 삶의 만족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에 머물고 있고, 유엔이 올해 초 발표한 행복지수는 조사대상 157개 나라 가운데 58위에 그쳤다. 국내총생산 세계 11위라는 선전구호 이면에 똬리를 튼 어두운 그림자다. 끊임없이 경제 환원주의를 선전한 탓이기도 하고 재벌 중심 시장에 포획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한국 주택의 근현대 역사에 등장하는 주택에 부흥이나 희망 혹은 재건이나 후생 등의 어휘가 앞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결국 전쟁으로 인한 폐허로 삶의 토대가 붕괴된 현실 혹은 절망적이거나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부박한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에 정반대 뜻을 가지는 반대말이 동의어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주택 앞에 붙인 명칭에서 우리는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 있으며 정치적 선전선동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기억 속에 간직된 거의 100여개에 달하는 광복 이후 주택 명칭은 한국의 독특한 정치적 선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이 전시성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는 현실을 웅변한다.

■9평의 꿈과 재건데이트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주택공급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6·25전쟁 이후다. 즉 정책자금으로 주택금융을 담당하는 산업은행이 발족하면서 확보한 융자금으로 대한주택영단과 지방자치단체들이 재건주택, 복구주택, 외인주택 등을 건설한 것인데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가 영구임대주택을 공급하기 전까지 정부가 직접 재정을 투입해 일반국민을 위한 주택을 공급한 것은 거의 이때뿐이다. 당시 등장한 몇 가지 대표적인 주택의 명칭을 열거하자면 ICA주택, UNKRA주택, 재건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 등이다.

전쟁 피해국에 대한 외국의 직접적 구호가 주택건설 재정으로 전환되면서 이들 자금으로 공급되는 주택에 미국국제협력처를 뜻하는 ICA를 붙인 것이 바로 ICA주택이며, 1951년 발족한 유엔한국재건위원단(UNKRA)이 전쟁 피해국인 한국에 집을 지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미송과 못 그리고 지붕을 덮는 루핑 등을 직접 공급하거나 흙벽돌을 생산할 수 있는 기구를 제공하는 등의 방식에 따라 지어진 주택이 곧 UNKRA주택이다. 해외원조 주체가 되는 기구나 기관 이름이 주택 앞에 직접 등장한 것이다.

6·25전쟁 후인 1953년 8월에 만들어진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 책은 국제연합한국재건위원단(UNKRA)에서 기증한 종이로 박은 것이다. 우리는 이 고마운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층 더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한국을 부흥·재건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자. 그런데 이번에는 원조 종이가 제때에 도착되지 아니하여 할 수 없이 따로 종이를 많이 사서 썼기 때문에 그 비용을 이 책값에 더하였다”고 밝힌 문교부 장관 명의 교과서 정가 인상 공지문이 따로 붙었었음을 떠올릴 수 있다.

1959년 분양이 저조한 서울 홍제동 부흥주택 홍보를 위해 ‘주택’지에 게재된 ‘즐거운 문화촌’ 삽화.  동아일보·대한주택공사 제공

1959년 분양이 저조한 서울 홍제동 부흥주택 홍보를 위해 ‘주택’지에 게재된 ‘즐거운 문화촌’ 삽화. 동아일보·대한주택공사 제공

이들 외국원조 주택이 지어지던 당시 한국인을 위해 3종 세트로 묶인 주택이 있었으니 재건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이 그것이다. 재건주택 역시 원조자금이 바탕이 되었지만 직접적인 원조 대신에 입주자가 공사비의 20% 정도를 먼저 부담하고 나머지는 5~10년에 걸쳐 상환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재건주택은 9평짜리였는데 집 규모를 9평으로 한 것은 유엔의 세계주택 통계가 가구당 6평이므로 여기에 50%를 더 늘린다는 전망을 더해 정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이었고, 실무자 증언에 따르면 입주자의 엥겔계수를 고려하여 4급 공무원 생활수준으로 했기 때문에 주택 입주 후 상환액 부담으로 입주자들 불평이 많았다고 토로하고 있다. 물론 어떤 기준이었는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당시로서는 제법 수준이 높은 주택이었던 까닭에 이 집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욕구가 ‘9평의 꿈’으로 널리 회자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재건’이라는 단어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치 구호로 다시 등장한다. 1960년대를 마감하는 1969년 12월 신문에서는 1960년대 유행어를 따로 정리하였는데, ‘불도저’ ‘정치교수’ ‘부정축재’ 등과 함께 ‘재건’을 꼽았다. 군사정권 모토로서 청신한 기풍 진작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재건복’과 ‘재건체조’는 물론이거니와 ‘재건빵’이 등장했는가 하면 젊은이들 데이트조차 ‘재건데이트’로 불렸다는 내용이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대학생들 교제가 ‘새마을데이트’로 불린 것처럼 말이다.

희망주택 역시 9평의 꿈을 부추겼다. 집을 지을 땅값이며 공사비를 모두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는 대한주택영단에서 배정하는 분양주택이 곧 희망주택이다. 역시 1950년대에 생겨난 것으로서 서울의 경우에는 1954년까지 휘경동과 회기동, 창천동, 정릉동, 홍제동 등에 집중 건설되었다.

큰 테라스에 피트 단위로 표기된 부흥주택의 15평형 평면도.  동아일보·대한주택공사 제공

큰 테라스에 피트 단위로 표기된 부흥주택의 15평형 평면도. 동아일보·대한주택공사 제공

■부흥주택과 ‘즐거운 문화촌’

부흥주택이 본격 공급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은 ‘부흥부’(1961년 건설부로 변경)에 의해 경제부흥5개년계획이 수립될 정도로 ‘부흥’이 강조되던 때였고, 이때 서울 청량리와 신당동, 홍제동 일대에 부흥주택이 건설되었다.

부흥주택이란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시행되는 주택건설 사업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조금 복잡할 수도 있지만 한 번 살펴보자.

정부는 6·25전쟁 휴전 이후 전쟁 참화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쓰일 자금이 필요했지만 재정 여건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취약했다. 할 수 없이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 국채를 통해 확보한 자금이 곧 부흥자금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일제강점기 식산은행에서 벗어나 1954년 새로운 모습으로 발족한 산업은행이 먼저 부흥국채를 발행하면 한국은행이 이를 모두 인수하여 유동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되었다. 산업부흥국채를 발행하기 위해 ‘산업부흥국채법’으로 불리는 법률을 먼저 제정한 것이다.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산업부흥국채는 수리자금, 기간산업건설자금, 중소광업자금, 주택건설자금 등과 같이 여러 분야의 정책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시중에 현금이 많이 풀리는 것이므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원조물자를 시중에 내다 팔아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이 운용되면서 이런 우려는 점차로 완화되었다. 여러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산업부흥국채는 몇 차례 이어졌고, 주로 7회와 8회에 발행된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공급한 주택을 특별히 ‘부흥주택’이라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융자금 이자가 너무 높았다는 것이다. 무려 11%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리금 상환기간은 고작 6년에 불과해 일반입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주택분양은 매우 저조했다. 홍제동 부흥주택의 경우는 이런 악조건에 더해 화장터 인근이라는 이유가 보태져 대학교수와 신문기자, 연예인들이 나서서 흉흉한 동네 소문은 미신에 불과하다는 등 설득을 벌여 입주를 독촉했다. 좋은 말로 홍보지만 사실을 왜곡한 선전선동과 다름 아니다.

마포아파트가 준공되었을 때 많은 예술가와 문화계 종사자들이 높은 층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석양을 잊을 수 없다거나 한강맨션아파트 분양 때 유명 배우나 가수가 앞다퉈 입주했던 것처럼 홍제동 부흥주택에 입주한 김용환 화백은 ‘즐거운 문화촌’이라는 제목의 삽화를 그려 당시 대한주택영단 기관지인 ‘주택’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1959년의 일이다.

1960년 1월부터 7월까지 ‘사상계’에 연재되었던 황순원의 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는 청량리 부흥주택에 대한 묘사가 실려 있다. 소설 속 인물인 현태가 서울 도심 다동의 병원을 나와 을지로 입구 내무부 앞에서 회기동행 합승으로 청량리를 거쳐 회기동 종점에 이르러 친구인 윤구가 운영하는 양계장으로 들어가려는데 길 주변에 전에 없던 부흥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고, 여기저기 가게도 제법 눈에 띄었다는 대목이다. 한때 폐결핵에 걸린 사람들이 요양을 위해 잠시 머물거나 좋은 풍광을 즐기려고 나서는 청량리 일대가 새로운 주택지로 등장한 모습이다.

부흥주택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59년 봄에 벌어진 부흥주택 입주민들의 집단 청원사태 때문이다. 융자금 이자가 턱없이 높고 원금 상환기간은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마침 언론도 이 문제에 주목하면서 급기야는 국회에 특별조사소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입주자들의 울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년 365일 피땀으로 벌어들인 돈 모두를 부금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한목소리를 냈고, 없는 서민의 피를 뽑아 산업은행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평균 국민소득보다 25배나 더 많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벌어지지 않는 일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이는 언어도단에 불과하다고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엇 하나 다를 것이 없어 씁쓸하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당시 작성된 부흥주택 평면도는 매우 흥미롭다. 도면에 표기된 모든 치수가 피트 단위로 되어 있으며, 과할 만한 크기의 테라스를 갖추었고, 남측 아동방 또한 흥미롭다. 부엌에 들일 찬장이며 설거지통은 모두 입주자가 자기 비용으로 부담하는 것이었지만 변소에는 양변기가 설치되었고, 욕실에는 커다란 쇠가마가 걸렸다. 물론 욕실 쇠가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도구였고, 양변기는 원조물자로 보인다. 아동에 대한 배려며 피트 단위 치수 등과 함께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좌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선진 기술이며 자재를 확보했거나 활용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군대의 참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지어진 부흥주택 상당수를 육군 공병대가 맡아 시공했기 때문이다. 서울역 앞에 나지막한 모습으로 지금도 웅크리고 있지만 6·25전쟁 이후 가장 도시적인 풍경으로 수도(首都) 서울 미화에 본보기가 되었던 상가주택이 공병대에 의해 지어졌듯 군대는 가장 막강한 권력집단이었고 기술력 역시 선봉이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외친 이승만 정권 때의 일이다. 외침의 공허함 역시 오래전과 오늘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

■고현학(考現學)이란

고현학은 현대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유행의 변천을 조직적·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고고학(考古學·archeology)이 고대 인류의 거취와 생활문화를 연구한다면, 고현학(modernology)은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살핌으로써 당대의 현상을 이해하려는 것인데,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도쿄 긴자(銀座)를 통해 일본의 서구화 경향을 문명적 관점에서 밝혀보려는 일본학자 곤 와지로(今和次郞)에 의해 제안된 용어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천변풍경> 등이 이런 방법론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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