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복수’

2007.05.03 17:39

가정의 달이 시작되는 5월1일. 남편은 4월30일 아침에 나가 두 달 만인 5월1일 새벽에 술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집에 도착했다. 50세가 넘어서도 새벽까지 술을 마실 수 있는 체력과 친구가 있음에 감동하기엔 인격수양이 되지 않아 한마디 했다.

“늙어서 구박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잘 하쇼. 그래도 나이 들어 등 긁어줄 사람은 마누라밖에 없을 텐데….”

그러자 술에 취해서도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왜 꼭 당신이 내 등을 긁어주려고 해? 젊고 싱싱한 손톱이 긁어야지….”

그런 남편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프로그램이 그날 방영되었다. 지난 1일 밤 방송된 SBS TV ‘긴급출동 SOS24’-‘아내의 복수, 설탕물 학대’ 편이 그것이다. 각종 복잡한 문제가 뒤엉킨 사건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해결해주는 이 프로그램은 이날 중풍에 걸려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는 남편에게 6개월째 설탕물만 먹이는 한 아내의 ‘악행’으로 문을 열었다. 180㎝의 큰 키라는 남편은 현재 30㎏ 정도로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거실 창가에 놓인 침대에 속옷만 입고 누워 덜덜 떨면서 겨우 움직이는 한 손으로 혼자 대·소변을 받아 창 밖으로 던졌다. 몸을 닦지 않아 각질이 일어나 침대도 구토가 치밀만큼 더러웠다. 게다가 친구나 이웃이 음식을 가져다주면 아내가 못 가져오게 해서 몰래 숨겨두고 먹는다는데 그것 역시 1주일이 지나 상했다.

펼쳐지는 장면들은 충격적이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죽을 달라는 남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설탕물 한 그릇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한 탓에 몸은 뼈밖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이혼을 하지” “요양시설에 맡겨라” 등의 권유에도 아내는 펄펄 뛰며 “이혼은 절대 안 한다” “마누라와 가족이 있는데 왜 요양시설에 맡기냐”며 거부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제작진이 어렵게 찾아낸 아들 역시 “(아들로서)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탓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설탕물 학대’의 원인이 드러났다. 지금 누워있는 남편은 지난 30년간 가정 폭력을 휘둘러 온 장본인이었다. 몸이 성할 때 온가족을 공포에 떨게 마구 폭력을 휘둘러 아들도 아버지를 피했다. 아내는 남편이 처음 중풍에 걸렸을 때만 해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아내에게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면서 무서운 복수극이 시작됐다. 남편이 ‘제발 밥을 달라’고 애원해야 해주겠다며 설탕물만 몇 년간 먹여온 것이다.

지난 30년간 학대 당한 고통의 기억이 아내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고 ‘설탕물 학대’의 심각성도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 어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 가정의 비극은 사회복지기관의 도움으로 남편은 병원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아들의 중재로 남편과 아내가 화해를 해서 ‘해피 엔딩’을 기다리게 하며 막을 내렸다.

너무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남의 일같지 않다. 분명히 이 부부도 신혼 초기에는 설탕물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서로를 ‘허니’라고 불렀을 텐데 증오와 복수심이 그 달디단 설탕물을 죽음을 기다리는 물로 만들었다.

우리 어머니들도 아버지가 섭섭하게 굴면 ‘두고 보자, 늙어서 구박할 거다’란 말을 수시로 하셨지만 정작 복수할 무렵이면 불쌍해서 또 참고 사셨다. 젊을 때 바람을 피웠어도, 술독에 빠져 사셨어도, 몇년씩 집을 떠나 있어도 아버지의 밥은 꼭 챙겨 두셨다.

그러나 요즘 아내들은 변했다. 같이 폭력도 행사하고 쉽게 이혼하고, 심지어 청부살해까지 부탁하는 무서운 아내들이 늘어나고 있다. 늙어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응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복수는 상대를 괴롭히고 고통에 빠뜨리는게 아니다. 혹은 그를 피해 멀리 떠나거나 쫓아 보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유건 나를 괴롭히는 남편 곁에서, 그 사람없이도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지내는 것, 즉 내가 평화로운 것이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남편이 늦는다고 바가지 긁기보다 그 시간에 재미있는 영화나 책을 보고, 남편이 외식을 즐기지 않으면 아이나 친구와 같이 먹는 것이다.

징징거리는 아내에겐 짜증만 나지만 뭔가 즐거워 보이는 아내에겐 괜히 관심을 끌고 싶어지는게 남자들의 심리란다.

복수가 아니라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 화창한 5월엔 내가 나에게 꽃다발 선물도 하고, 수시로 웃으며 콧노래를 불러보자.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해지니까.

〈유인경/ 레이디경향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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