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외면 → 정부는 구조조정 → 끌려가는 대학 → 인문계열 공동화

2014.10.21 22:34 입력 2014.10.22 18:45 수정

(1) 문과, 길을 잃다

대학에서 ‘문·사·철(文·史·哲)’ 중심의 순수 인문계열 학과가 사라지고 있다. 정부가 취업률을 기준으로 대학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고, 대학들이 이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대학 교육의 가파른 시장주의화가 순수 인문계열의 공동화(空洞化)를 초래한 것이다.

정부가 취업률을 근거로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면서 ‘인문학 인프라’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서울시내 대학의 한 학생이 21일 문과대 학과별 게시판 앞을 지나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정부가 취업률을 근거로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면서 ‘인문학 인프라’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서울시내 대학의 한 학생이 21일 문과대 학과별 게시판 앞을 지나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김태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이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대학의 전체 학과 수는 2003년 9542개에서 지난해 1만1126개로 16.6% 늘었다. 반면 인문계열 학과 수는 1.7% 줄었다. 학과 수가 감소한 것은 인문계열이 유일했다. 교육부가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율을 기준으로 재정지원 대학을 선별한 최근 3년간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2011~2013년 통폐합된 인문계열 학과는 43개에 이른다.

통폐합된 인문계열 학과는 ‘문화콘텐츠학과’ ‘디지털콘텐츠학과’ 등으로 이름을 바꿨다. 가톨릭대, 건국대, 경남대, 군산대, 상지대, 순천향대, 아주대, 용인대, 인하대, 청주대,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등이 문화콘텐츠학과를 개설했다. 이들 학과는 소설, 시, 근현대사 대신 ‘공연예술기획론’ ‘출판기획론’ ‘만화산업이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상명대는 역사학과를 역사콘텐츠학과로 개편했다. 취업률과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순수 인문학을 ‘응용인문학’으로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서울 소재 대학의 문화콘텐츠 관련 학과 휴학생 ㄱ씨는 “문화콘텐츠라고 하니 그럴듯해 보이지만 방송사에서 운영하는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대부분인 데다 수업의 질도 낮은 편”이라며 “2학년 마치고 다른 과로 전과한 동기들이 상당수”라고 전했다.

지역종교를 전공했으나 학과 통폐합으로 문화콘텐츠학과로 편입된 한 교수는 “문화콘텐츠학과에서 다루는 내용은 ‘유사경영학’에 가깝다”며 “정체성을 무시한 구조조정으로 일부 학문 분야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라고 말했다.

[문과의 눈물]기업 외면 → 정부는 구조조정 → 끌려가는 대학 → 인문계열 공동화

인문계열 학과의 통폐합은 순수 인문학 강좌의 축소로 이어진다. 석·박사급 연구자가 강단에 설 기회도 줄게 된다. 새로 개설된 ‘출판기획론’ ‘디지털스토리텔링’ 강좌는 대부분 외부 강사가 맡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해 8월과 올해 2월 대학원을 졸업한 인문학 전공자 810명을 조사한 결과 53.1%가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서울대 인문대학 박사과정 ㄴ씨(28)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접할 기회가 줄면 시간강사·저술·출판 일자리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며 “최후의 밥벌이 수단이었던 사교육 시장마저 포화상태여서 인문계열 전공자들은 갈 곳이 없다는 비관론이 만연하다”고 전했다.

대학 구조조정 여파로 강사들이 대거 퇴출돼 교수들에게 강의가 몰리면서 일부 학과의 경우 교수 1인당 가르치는 학생 수가 300명까지 늘어나는 등 교육의 질이 나빠지고 있다. ‘인문계열 구조조정→교육·연구 수준 저하→인문학 경쟁력 약화→취업률 및 재학생 충원율 저조’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대학 인문계열 학과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학과 수가 늘어난 데는 정부가 대학 간 경쟁을 유도한다며 1995년 ‘5·31 교육개혁안’을 통해 대학 설립요건을 완화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됐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단기적인 선호에 따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이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지적한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는 “장기적인 전망 없이 따라하기식으로 전공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소양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의 한 교수는 “올해는 금융권 채용 축소로 경영대 취업률이 인문대 일부 어문학과보다 못하다”며 “1년 단위 지표를 근거로 학과 구조조정을 강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한국근현대 지성사를 연구하는 류승완씨(성균관대 철학박사)는 “1980년대 경제 호황기에는 인문학 전공자들도 취업이 잘 됐지만 외환위기 이후 취업률이 낮아지면서 ‘인문학 위기론’이 고개를 들었다”며 “확고한 교육철학이 없는 대학들이 시류에 휩쓸려 교육부의 요구를 굴종적으로 수용하면서 인문학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밝혔다.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계열 학과가 문화콘텐츠학과로 개편되면 수업 내용이 완전히 바뀐다. 원래의 과는 사실상 ‘폐과’나 다름없이 된다. 학생들의 만족도는 어떨까.

서울 소재 대학 영문과 대학생 이모씨(19)는 “이번 학기 문화콘텐츠학과를 부전공으로 했다가 후회했다”고 밝혔다. 그는 “게임 제작 실무수업을 했다가 문학수업 했다가 내용이 제각각이고 대체로 자기 일이 따로 있는 강사들은 지각도 잦고 수업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며 “한국 현대사 교양시간에 내준 자유주제 레포트를 할 때가 차라리 더 보람있었다”고 밝혔다.

서울의 또 다른 대학 한국어학부에서 국어국문학 과정과 디지털스토리텔링 과정을 심화복수전공으로 선택한 대학생 이모씨(22)는 “국문과에서 개설하는 ‘희곡론’ 등 순수 인문학과 ‘스토리텔링 실습’ 등 응용인문학 둘 다 배워 결합하니 장점이 있다”며 “다만 실무과정은 외부 학원이 더 낫다는 평가”라고 밝혔다.

다음은 학과 구조조정을 거친 문화콘텐츠학과와 인문계열로 남은 과의 커리큘럼을 비교한 표이다.

[문과의 눈물]기업 외면 → 정부는 구조조정 → 끌려가는 대학 → 인문계열 공동화




■ ‘문과의 눈물’ 기획취재팀

팀장 정제혁(사회부) 기자, 이호준(산업부), 정원식·임아영(문화부), 박은하(사회부), 김지원(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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