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 20대 “결혼과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2013.04.30 22:35 입력 2014.10.20 13:09 수정
특별취재팀

· 20대, 취업 못해도 취업해도 문제

‘결혼하면 그만둘 거잖아.’ ‘남녀 간의 일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해.’

여성들이 일자리를 얘기하면 통상 남성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 표현은 20대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출산이 여성의 역할인 것은 분명하지만 육아를 여성에게 국한시키고, 사회적 활동에 남녀를 구분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인식체계에 갇혀 있는 편견이라고 여긴다. 20대 여성들의 이 같은 인식은 때론 남성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물정 모르는, 철없는 얘기라고 반박하는 남성도 많다.

하지만 20대 여성에게 일자리는 그만큼 절박하다. 요즘 여성들에게 일자리는 생존 그 자체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여성 일자리 취재과정에서 접촉한 여성 중 ‘취집’(결혼을 취직으로 여기는 것)을 꿈꾸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취업준비 여대생 6명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 남자에게 기대어 살라고? 헐~
결혼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일자리는 여자들에게도 생존 그 자체다

김주영 (24·충남대·화장품 회사 지망)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1부 (2) 20대 “결혼과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남자는 생존을 위해 직업을 원하고, 여자는 자아실현을 위해서만 직업을 원한다는 말은 틀리다. 요즘 세상에 직업이 없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다.

화장품 회사에 들어가는 게 꿈이다. 목표는 국내 최고의 화장품 회사인 A사다. 훗날 나만의 화장품 회사를 설립하고 싶다.

대학생활 내내 학점관리를 했고 1년 동안 휴학까지 해 가면서 대외활동도 열심히 했다. 학점은 4.5점 만점에 3.9점. 어학성적도 좋다. 그래도 취업은 너무도 좁은 문이다.

가끔 너무 막막해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 편하게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기도 싫다. 치열한 세상에서 남자에게 기대 산다는 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무책임한 일이다. 남자들도 요즘은 여자 경제력을 따진다. 엄마도 “여자가 직업을 가져야 결혼해도 떳떳하다”고 말한다. 엄마는 전업주부였다가 최근 일을 다니신다.

결혼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일을 선택하고 싶다.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아직 별로 없고, 한다면 최대한 늦게 할 작정이다.

이기적인 줄 알지만 아이 낳는 것도 꺼려진다.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었을 정도로 아이를 좋아하지만 일에 전념하지 못할 것 아닌가. 아이보다는 내 삶과 내 일이 더 소중하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애 낳으면 관둔다는 편견으로 나를 재단한다. 나는 아닌데.

■ 남자에게도 ‘부인이 사직하면’ 묻나
결혼할텐데 남편이 회사 그만두라면? 면접관은 왜 그런 질문을 할까

이교림 (24·아주대·외국계기업 영업직 지망)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1부 (2) 20대 “결혼과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일본어를 좋아하고 잘한다. 그래서 일본계 기업 쪽으로 준비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어학능력을 키우기 위해 1년간 일본 워킹홀리데이까지 다녀왔다. 영업직을 원한다. 여자를 잘 뽑지 않는 데다 입사해도 안 보내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진정으로 노력하면 통하지 않을까. 해외영업도 해보고 싶다. 영업본부장이 꿈이다.

최근 면접을 다녀왔는데 면접관이 ‘남자친구는 있나’부터 시작해서 ‘남편이 일을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할 거냐’ 등의 질문을 했다. 이해 못할 사안은 아니지만 이런 질문 자체가 ‘육아는 여자가 전담한다’는 인식을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런 남자와는 결혼은커녕 교제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면접을 본 뒤 처음으로 육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아직 육아를 걱정하기엔 이른 나이지만 벌써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멘토링하면서 만난 직장 다니는 여선배는 시어머니가 애를 봐준다고 한다. 임원까지 간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친구가 아는 분은 명문대를 나왔는데 출산 후 경력단절되고 ‘야쿠르트 아줌마’로 변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씁쓸해지고, 결혼에 대한 환상도 깨진다. 일과 육아 중에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결혼이나 출산은 포기할 것 같다. 더 나가면 ‘결혼은 예스(YES), 출산은 노(NO)’일 수 있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 내것 하면서 살고 싶어
결혼하고 교직 그만둔 엄마의 헌신 감사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 살아

이보은(24·고려대·대기업 홍보직 지망)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1부 (2) 20대 “결혼과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나이 압박이 심하다. 일찍 졸업한 친구들은 다 취직했다. 여자들은 24, 25세가 취업 적기고 늦어도 26세에는 취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늦어도 올해나 내년까지는 취업을 해야 한다.

초·중·고 시절 막연히 선생님을 꿈꿨다. 재수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학교라는 바리케이드가 벗겨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대학이라는 이름이 날 보호해줬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 직장도 없게 되면 어떻게 되지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뒤늦게 학점도 끌어올리고, 대외활동에도 참여하고, 기업 인턴도 했다. 대기업 홍보·PR 쪽으로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똑같은 능력을 가진 남녀가 있다면 기업이 남자를 뽑는 건 당연하다고들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가 생긴다. 적어도 여자가 능력을 보여줄 기회는 준 뒤 판단했으면 한다.

엄마가 교직에 있다가 결혼하고 직장을 그만뒀다. 자녀를 위해 헌신했다. 엄마의 삶도 충분히 가치 있고,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못할 것 같다. 나는 내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문제는 출산과 육아다. 결혼 뒤 내 아이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지만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이 때문에 그때가 되면 혼돈스러울 게 뻔하다. 아마도 아이 출산을 미루는 쪽을 택할 것 같다.

■ 대충은 없다
남자들의 직장에 대한 절박성 이해… 그러나 여자도 똑같이 직장 없으면 낙오

윤세래 (24·충남대·기업 영업관리직 지망)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1부 (2) 20대 “결혼과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아버지가 공무원이다. 어릴 때부터 ‘남편하고 대등하려면 일을 해라, 여자가 일을 계속하려면 공무원이 최고’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2010년 휴학하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는데 잘 안됐다. 복학 뒤 주변 친구들이 취업준비하면서 너무도 치열하게 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 경력을 쌓으며 사기업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4학년 때 대기업의 해외봉사 프로그램에 합격했다. 경쟁률이 꽤 높았다. 지금은 영업관리직을 희망한다. 심리검사 같은 걸 해봐도 영업 쪽이 맞다고 한다. 남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한다. 업무적으로 인정받아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 같은 지방대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가끔 직장에 다니는 선배들이 “나 같아도 여자보단 남자를 뽑겠다”는 말을 한다. 여자들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짐 나를 때 남자가 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든지, 야근을 기피한다든지. 일에 대한 책임이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편견들이 내게 적용되는 것은 억울하지만 도리 없다고 본다. 그래서 스펙에서 승부를 보려고 더 열심히 한다. 일부러 체력도 어필하고 사람을 잘 관리한다고 말한다. 남자들이 가진 장점을 내가 가졌다고 내세운다. 대외활동을 할 때도 일부러 무거운 짐을 찾아서 들 정도다. ‘여자라서 힘든 일은 못한다’는 편견이 싫다. 남자들의 절박성을 이해한다. 하지만 여자도 직장이 없으면 낙오하는 것은 똑같다.

■ 여자에겐 힘든 길이라지만
취업준비의 치열함은 모두 같아… 능력 아닌 성별로 밀리는 건 억울

주수현(23·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대학교수 지망)

“넌 좋겠다. 정해진 길이 있어서.” 친구들은 종종 내게 이렇게 말한다.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1부 (2) 20대 “결혼과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취업준비에 치열한 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치열함은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대학 내내 의학전문대학원 입시를 준비했다. 대학 4학년 때는 과외를 하면서 한 달에 100만원 하는 학원비를 냈다. 좋아서 하는 것이어서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졸업하면 대학병원에 남고 싶다. 학부에서 아동가족학을 전공했을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아암 전문의가 되고 싶다. 운이 좋다면 교수가 돼서 나 같은 꿈을 꾸는 사람한테 지식을 전해주고 싶다.

병원에도 여자 교수는 많지 않다. 여자가 많은 과도 있지만 병원에서도 과별로 남녀 간의 차이가 있다. 의사들은 인턴 끝나고 전공을 정한다. 밤새우고 힘든 일이 많은 외과 같은 곳은 여자들이 많지 않다. 내가 상사라도 힘든 일이 많으면 남자를 뽑고 싶을 거다. 그게 차별이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경쟁자보다 좀 더 나았는데 성별 때문에 밀렸다면 억울할 것 같다. 그래서 그만큼 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요즘 여자애들은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결혼은 빨리 하고 싶고 아이도 꼭 낳고 싶다. 육아가 최대 난관이다. 엄마와 이모는 아이를 돌봐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그때도 그 말이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 난 남자에게 꿀리지 않는다
‘공대서 살아남은 여자’로 어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꽤 효과

원남경(24·고려대·시트콤 PD 지망)

[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1부 (2) 20대 “결혼과 일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대학 와서 내가 잘하는 게 뭔지 한참 찾았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기획하는 게 적성에 맞았다. 1960년대 선배학번까지 동참하는 과 행사도 기획해보고, 창업동아리 회장을 맡기도 했다. 뭔가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거, 현장에서 활동적으로 일하는 게 좋다. 그래서 PD를 꿈꾼다. 시트콤을 만들었으면 한다. 30대 후반쯤에는 제작사를 차려 ‘원남경표 시트콤’을 만들어보고 싶다.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면 창업을 생각하는 여자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대학 다니면서 동아리에서 창업을 해 봤는데 할 만했다. 물론 그전에 방송사나 제작사에 취업하는 게 먼저다.

남자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안 해 봤지만 여자가 취업에서 불리한 건 사실인 것 같다. 원래 전공은 건축이다. 남자들은 건설사에 취직하면 중동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 몇 달씩 간다. 현장에 여자를 보내면 숙소도 따로 지어야 하고 귀찮으니까 웬만하면 여자들은 사무직으로 돌린다. 그래서 우리 과 여자들은 석사 학위 따려고 대학원에 많이 간다. 공대라 여자가 적은데도, 대학원에는 여자가 반이다. 건축판에서 여자는 월등히 스펙이 좋아야 남자와 경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나는 면접을 볼 때 의도적으로 남자다운 측면을 강조한다. 남자들한테 꿀리지 않는다는 점도 부각하고, ‘공대에서 살아남은 여자’라는 말도 자주 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효과는 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