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여성들이 본 ‘직장생활 숨통 죄는 남성 문화’… 4개의 관문

2013.04.30 22:34 입력 2013.04.30 23:25 수정
특별취재팀

“여직원들 상대 서툰 상사 혼도 안 내고 일도 안 시켜”

“마케팅 부서 배치하고도 배려한다며 현장 안 보내”

2009년 기준 한국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82.4%다. 남성(81.6%)을 웃돈다.

그러나 졸업 뒤의 상황은 뒤바뀐다. 2012년 30대 기업에 입사한 여성은 전체의 31.8%다. 입사 뒤에는 자의든 타의든 상당수가 도중하차한다. 10대 그룹의 여성임원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특별취재팀은 입사 1~4년차 대기업 여사원 4명의 직장생활 얘기를 들었다. 부푼 꿈을 안고 입사한 이들은 배려와 차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남성 주류 조직문화의 모습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이들은 “여성들은 직장생활에서 최대 난관인 출산·육아 문제 외에도 최소 네 가지 관문은 통과해야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다. 4명은 금융·유통·마케팅·구매대행서비스 분야에서 각각 일하고 있다.

젊은 여성 직장인 두 명이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 인근 큰 길가에서 점심용 김밥과 음료를 들고 걷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젊은 여성 직장인 두 명이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 인근 큰 길가에서 점심용 김밥과 음료를 들고 걷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제1 관문 - 면접 때 여자는 화성인

입사 3년차인 ㄱ씨(25)의 면접기. 최종 면접자 10명 중 유일한 여자였다. 1번 타자로 면접장에 들어섰다. 임원 3명이 앉아 있었다. 질문은 남녀 차이에 집중됐다.

- 여자라서 갖는 장점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팀 분위기를 조화롭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또 남성보다 꼼꼼하게 작은 부분까지 챙겨 일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 그런 뻔한 대답 말고요. 그간 경험에 의하면 여사원들은 조금만 힘들면 그만두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입사 준비를 하면서 제가 여자라는 것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 일이 힘들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어서 그만둘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여자들은 면접 때 준비를 많이 하고 와서 당차요. 또박또박 말도 잘합니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왔을 때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입사해서도 지금과 같이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 여자들은 결혼·임신하면 그만두려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 일에 대한 열정이 크기 때문에 제 개인사와 상관없이 계속 일을 할 것입니다.”

면접 중에 직무 수행능력 평가는 전혀 없었다. ㄱ씨는 불쾌하고 당혹스러워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는 것까지 생각할 정도였다고 했다.

지난해 금융권에 입사한 ㄴ씨(25)의 회고도 비슷하다. “면접을 남녀 따로 봤다. 함께하면 (말 잘하는 여자에 비해) 남자들이 주눅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면접관이 옆에 앉은 지원자에게 ‘여대 나와 남자들과 조직생활을 하면서 회사 잘 다닐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남녀 조화보다는 업무 적응능력이 더 중요한 사안 아닌가.”

국가인권위가 2011년 구직자 54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채용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느끼는 여성은 74.4%에 달했다. 차별 종류로는 ‘외모 관련 질문이나 서류 요구’ ‘성별을 구분하거나 특정 성을 우대하는 것’ ‘임신, 출산과 관련하여 질문하는 것’ 등을 들었다.

■ 제2 관문 - 직무배치와 차별 사이

남녀가 동일한 채용과정을 거쳐 같은 부서에 배치된다. 하지만 맡겨지는 일은 달랐다. 4명은 모두 “영업 등 대외업무는 남자, 행정 등 사무업무는 여자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시된다”고 말했다.

ㄱ씨는 마케팅 보직을 받았다. 남자 동기 모두는 영업 일선에 배치됐지만 자신은 사무업무를 보게 했다. 명분은 배려였다. 그는 “다른 업체 관계자와 만나 술 한잔하면서 협상하는 식으로 업무가 진행되기 때문에 (상사들이) 여자들은 나가서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으니 사무실에 있으라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ㄱ씨는 상사에게 여러 차례 영업직을 시켜줄 것을 요구한 끝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ㄴ씨는 “은행의 어느 지점을 가더라도 기업을 상대하는 대출업무는 남자가, 상품판매 등은 여자가 담당한다”고 말했다.

ㄹ씨가 일하는 편의점 영업관리부서는 남자 독무대였다. 한 팀 6명에 여자는 1~2명 정도였다. ㄹ씨는 “현장에서 점주들을 상대하는 일에 남자들이 더 능숙하다고 여겨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대출, 영업 등 이익창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중요 부서에 배치되는 것은 일반 행정업무에 비해 더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요구되는 대외업무를 배울 기회도 남성에게 더 많이 주어진다. ㄴ씨는 “지점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밖에서 (기업)섭외하고 영업하는 능력”이라며 “부행장·임원급에 여자가 없는 것도 직무배치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 제3 관문 - 여자와 교류 서투른 남자들

ㄱ씨는 남자 상사들에게 본의 아니게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 지난해 ㄱ씨는 전 팀원이 남자인 팀에서 근무했다. 이때 팀장은 종종 ㄱ씨에게 일찍 퇴근하라고 한 후 남자끼리만 술자리를 가졌다. ㄱ씨는 “내가 술자리에 있으면 말을 걸걸하게 하지 못하니 불편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ㄴ씨는 “남자 상사들이 처음엔 ‘와인 마시러 가자, 파스타 먹자고 한다. 하지만 곧 ‘너네들 때문에 맘대로 소주도 못 마신다’는 식의 뒷말을 한다”고 말했다.

남자가 많은 부서에서는 군대식 술자리 문화도 여전하다. ㄷ씨는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집중을 안 하는 것 같으면 ‘왜 집중 안 하느냐, 옷 벗은 여자 사진 하나 붙여놓을까?’ 같은 농담이 자연스레 오간다”고 전했다.

30여명의 팀원 중 유일한 여자인 ㄹ씨의 사례도 흥미롭다. ㄹ씨가 관리하는 6개의 편의점 중 한 곳과 인근에 있는 다른 편의점 사이에 최근 분쟁이 생겼다. 팀장은 ㄹ씨 대신 ㄹ씨의 남자 선배에게 중재를 맡겼다. ㄹ씨는 “팀장이 여자인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몰라 혼도 안 내고 일도 시키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제4 관문 - 멘티 없어, 스스로 해결

여사원들은 여자 선배들을 사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ㄱ씨와 ㄴ씨가 근무하는 팀의 여자 중 입사 4년차 대리가 가장 높은 직급이다. ㄹ씨는 “대리급부터 여자가 잘 안 보인다”며 “우리 부서에 여자는 10%도 안된다”고 말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육아는 큰 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퇴출될 수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ㄹ씨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근무는 기본인 데다 야근까지 많은 직무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비교적 긴 육아휴직이 자연스러운 ㄷ씨를 제외한 세 명은 “육아휴직이 제도적으로 갖춰져 있긴 하지만 회사에 눈치가 보여 여선배들은 3개월 출산휴가만 쓰고 돌아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사원들은 ‘제도적으로 보완해 여자가 많아지도록 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갸웃해 조직생활의 험난함을 시사했다. ㄱ씨는 “회사에서 여성들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뭔가가 생기면 남자 사원들의 반발이 커진다”며 “여자라서 우대받는다고 생각되는 게 싫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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