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①우린 붕괴를 원한다]이대로는 ‘노답’…‘리셋’된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2015.12.31 22:26 입력 2016.02.02 18:11 수정

20~34세 청년들이 살고 싶은 미래는 ‘붕괴 뒤 새로운 시작’

아침 9시30분에 도서관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은 저녁 7시. 다시 밤 10시까지 책을 보다가 잠든다. 놀면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친구들과 만나도 ‘100%’ 즐겁지 않다. 취업 얘기가 나오면 분위기는 금세 우울해진다. “우리가 지금 놀아도 될까?” 이 물음을 던질 때마다 돌덩이가 누르는 듯 마음이 무겁게 옥죄어진다. 경향신문의 ‘청년 미래인식 조사’에 참여한 ㄱ씨(26·서울) 얘기다. 올해 대학원에 입학해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생활이 고3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2035년 미래사회 시나리오> 노랑: 중국의 경제위기로 한국 기업들이 도산하고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자급자족할 만큼만 생산하는 경제시스템을 만든다. 노동으로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는다. 농촌 마을 곳곳에서 마을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이곳에선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

<2035년 미래사회 시나리오> 노랑: 중국의 경제위기로 한국 기업들이 도산하고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자급자족할 만큼만 생산하는 경제시스템을 만든다. 노동으로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는다. 농촌 마을 곳곳에서 마을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이곳에선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

2015년 12월 경향신문의 집단면접에 참가한 20~34세의 청년 2명 중 1명이 선호하는 미래의 시나리오로 ‘붕괴와 새로운 시작’을 택했다. ㄱ씨 역시 ‘붕괴와 새로운 시작’의 지지자다. 그는 “좁은 문을 향해 달리는 걸 알면서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건 이 사회가 한 가지 길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리셋’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황: 한국은 주요 5개국이 되고, 서울은 ‘메가시티’로 발전한다. 경제인의 정치적 힘이 커진다. 녹색: 인간과 로봇이 결합한 ‘포스트 휴먼’이 등장한다. 화성엔 지구인 기지가 있고 젊은이들은 가상공간에서 삶을 즐긴다. 파랑: 석유 고갈, 식량 부족, 기후변화로 인해 국가는 절약과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한다.

주황: 한국은 주요 5개국이 되고, 서울은 ‘메가시티’로 발전한다. 경제인의 정치적 힘이 커진다. 녹색: 인간과 로봇이 결합한 ‘포스트 휴먼’이 등장한다. 화성엔 지구인 기지가 있고 젊은이들은 가상공간에서 삶을 즐긴다. 파랑: 석유 고갈, 식량 부족, 기후변화로 인해 국가는 절약과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한다.

■경쟁·물질만능보다 행복과 여유를

청년 미래인식 조사는 네 종류의 미래사회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토론을 거친 후 참가자가 원하는 것을 고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붕괴와 새로운 시작’ 시나리오는 경제위기로 중국 수출에 의존하던 한국 기업들이 도산해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향하는 사회를 담고 있다. 남한 인구 33%가 농사를 짓고, 마을 공동체가 발달하면서 시민들은 이슈가 생길 때마다 토론과 투표를 통해 적극적으로 지역정치에 참가한다.

이 같은 설정은 도시에서 자라 소비문화에 젖어 있는 청년 대부분에게는 낯선 얘기다. 그런데 왜 가장 많은 참가자(46.4%)가 이 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했을까. “경쟁·빈부격차 심화, 물질만능·외모지상주의 등 급속한 경제성장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크다.”(대학생·24·서울) 청년들이 적은 ‘이유’에는 무한 경쟁에 지친 청년들의 고단한 내면이 채워져 있었다.

경쟁에 대한 피로감은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이 더 컸다. ‘붕괴와 새로운 시작’ 지지도는 대학생(48%)이나 무직자(40%)보다 이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59.3%) 사이에서 더 높았다. 또 남성(45.1%)보다 여성(55.8%)이, 보수(8.3%)보다 중도(54.0%)와 진보(58.5%)에서 높았다.

이 시나리오를 지지한 IT업계 노동자인 여성 ㄴ씨(29·서울)는 “나는 출근시간만 정해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있는 ‘심하지 않은 야근’은 밤 11시, ‘좀 심한 야근’은 새벽 1시에 끝난다. 자취할 형편이 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탓에 출퇴근에만 4시간이 걸린다. 결국 서너 시간 자고 출근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러면서도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폭파’돼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늘 실업의 공포를 안고 산다”고 했다. ㄴ씨가 “사는 맛”을 느끼는 때는 고등학생 때부터 해 오던 ‘블로그 포스팅’을 할 때지만 이마저도 3년간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시간(2057시간)은 가장 길고 근속기간(5.6년)은 짧은 현실이 ㄴ씨의 삶에 그대로 담겨 있다.

문제는 청년들이 ‘붕괴와 새로운 시작’을 원하는 것과 이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사회를 변혁시킬 의지와 에너지를 모으고 있느냐는 별개라는 점이다. 이문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시인)는 “청년들은 지배 시스템을 바꾸고픈 생각은 있지만 자신감이 없다. 경제적 공포가 심한 세대”라면서 “촉매제와 도화선이 있어야 한다. ‘돈의 논리’에 매달리는 삶이 아닌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부들부들 청년][1부①우린 붕괴를 원한다]이대로는 ‘노답’…‘리셋’된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이미지 크게 보기

■공정성·투명성 없는 성장은 반대

청년들이 두 번째로 많이 꼽은 ‘계속 성장’ 시나리오에서 2035년 한국은 주요 5개국(G5)에 든 선진국이다. 북한은 남한에 흡수통일되고, ‘메가시티’ 서울 인구는 2000만명에 이른다. 강남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200층짜리 빌딩이 있다. 밤이 되면 900m가 넘는 이 빌딩 벽면에 비행기 광고가 떠오른다. 개인 비행기 소유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굴하며 암 완치의 길이 열린다.

이 시나리오는 역대 정부가 지향해 온 ‘높은 경제성장’의 장밋빛 미래와 가장 닮았다. 그러나 미래인식 조사에 참가한 청년들 중에 이 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한 사람은 28.7%에 불과했다. ‘계속 성장’ 지지도는 ‘붕괴와 새로운 시작’ 지지도의 절반 수준이었다.

스스로를 보수 성향이라고 밝힌 참가자들은 대부분(83.3%) ‘계속 성장’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이 바라는 성장 역시 무한 경쟁의 결과물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회를 선호한 집단에 비해 효율성과 경쟁을 정부가 우선시해야 할 가치로 꼽았지만, 공정성과 투명성에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나머지 두 시나리오 중에 ‘과학기술이 변화를 이끄는 사회’ 지지도는 16.6%였다. 이 사회에선 스스로 진화하는 로봇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며, 인간과 로봇이 결합된 ‘포스트 휴먼’도 등장한다. 삶의 반경이 화성이나 다른 행성으로까지 넓어진다. 이 미래를 선호한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이겨낸 미래로, 편견도 없고 부족함도 없을 것” “과학기술 발전으로 상대적 불평등은 심화될지 몰라도 각각의 생활수준, 행복수준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로 인해 전 국민이 에너지·식량 보존에 힘을 쏟는 ‘자원 보존사회’에 대한 지지도는 8.4%였다. “지속가능성”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감” 등이 선호 이유로 꼽혔다.


청년 미래인식 조사를 마친 후 경향신문은 참가자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위해 정부·국회·언론·시민사회 등을 감시하고 보고서를 쓸 ‘미래사회 모니터링단’을 모집했다. 이들의 활동은 앞으로 1년간 이어지며 ‘미래사회 모니터링단’의 최종 보고서는 2017년 1월1일 게재될 예정이다.
모니터링단은 경향신문의 신년 기획 ‘부들부들 청년’을 지속적으로 평가해 취재진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겸한다. 경향신문은 이들의 의견을 반영해 시리즈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모니터링단 명단(33명)
강지승(대학생) 고석현(대학원생) 권재희(취업준비생) 권혁민(대학생) 권효은(직장인) 기은환(직장인) 김민재(대학생) 김민지(대학원생) 김유진(대학생) 김은빈(취업준비생) 두동원(취업준비생) 문서영(직장인) 박동우(대학생) 박용석(대학생) 백지연(대학생) 송명수(대학생) 신혜인(대학생) 심하늬(취업준비생) 양지연(대학생) 오정빈(취업준비생) 오창윤(대학생) 은진(취업준비생) 이경은(대학생) 임석영(대학생) 임성희(대학생) 임태권(대학생) 장한결(대학생) 정다예(대학생) 정단비(대학생) 정미선(취업준비생) 정민섭(대학생) 정창현(대학생) 한승수(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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