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20년간 월세 사는 셈 치고 그 돈 한꺼번에 들여 집 짓기

2019.03.29 16:21 입력 2019.03.29 16:40 수정
이숙명

‘나만의 공간’ 20년 뒤 다 버리고 떠나도 큰 손해는 아니다

이숙명의 ‘유유자적’

내 아버지는 시골에서 부동산과 건축 일을 오래 하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누가 어떤 땅을 사서 얼마를 벌고 손해를 보았는지, 불법과 탈법과 사기와 적당한 융통성의 경계는 무엇인지 등의 주제를 매일 아침저녁 반찬으로 나눠 먹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부동산과 건축으로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다만 내게 몇 가지 교훈을 물려주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두 가지는 “집은 미쳐야 산다”와 “부동산에 끝은 없다”였다. 서울에 살 때 나는 충분히 미치지 못해서 매번 집을 살 기회를 놓쳤다. 집값은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손대지 못할 가격으로 훌쩍 뛰고도 한참을 더 올랐다. 그 과정에서 명언 시리즈에 내가 덧붙인 게 있는데, “절대로 남의 말 듣지 마라”다. 어쨌든 이제 나는 서울에서 집을 갖는 건 포기했다. 포기했다고 하면 꽤 우아하게 들리는데, 사실은 포기를 당한 셈이다. 내가 착실히 월급 모아 서울에서 집을 살 수 있는 마지막 세대였을 줄이야. 부동산 버블이 붕괴될 거라던 전문가님들, 다 잘 살고 계시죠? 여보세요, 제 말 들려요?

필자가 누사프니다에 자리를 잡고 처음 머문 집. 현지인들이 사는 가족 주택 단지 안의 빌라로 정원과 건물은 귀엽지만 내부 시설은 열악했다.

필자가 누사프니다에 자리를 잡고 처음 머문 집. 현지인들이 사는 가족 주택 단지 안의 빌라로 정원과 건물은 귀엽지만 내부 시설은 열악했다.

요즘 나는 다시 조금 미쳐 있다. 처음에는 그저 조그만 방갈로일지언정 편리하고 깨끗하고 조용하며 일과 주거를 함께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누사프니다섬에는 그런 양질의 공간이 없었다. 장기 거주하러 오는 외국인들이 처음으로 고려하는 곳은 대개 현지인들의 가족 주택단지 안에 딸린 게스트하우스다. 이 지역 토박이들은 커다란 부지에 단층 주택 여러 채를 지어 2~3대가 함께 거주한다. 그런 집들은 보통 실내공간이 매우 좁고, 주방과 욕실이 비효율적이다. 여기서 만난 이탈리아인 부부는 하필 힌두사원 옆에 집을 얻는 바람에 새벽부터 울리는 음악소리로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 결국 땅을 얻어서 자기 집을 지었다. 내 경우 이웃이 온통 파티 좋아하는 유럽인이라 사흘이 멀다하고 새벽까지 EDM을 울려대고, 모두가 필수코스처럼 유기견을 입양하는 바람에 개들이 한밤중에 짖어대거나 여기저기 똥을 싼다. 그리하여 나도 집을 짓기로 결심하고 땅을 알아보기 시작한 게 어언 1년 전이다.

“집은 미쳐야 산다” 던 아버지
토박이 주택 주방 등 비효율적
난 미쳤고, 집 짓기 여정 시작
외국인은 땅 살 수 없고 임대

땅 빌려 최대 수익 낼 방법 강구
1년간 땅 찾아다녀 마침내 낙점
아직 복잡한 서류 작업이 남아
뭐하러 외국 가서 집 짓냐고요?

땅. 그렇다. 그게 문제다. 기존 주택을 사서 개조하면 간단하련만 애초에 주민이 적던 곳이라 빈집도 거의 없고, 있다 해도 입지가 형편없다. 결국 새로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외국인은 땅을 살 수 없다. 대부분은 10~30년 단위로 땅을 임차한다. 그 기간이 지나면? 건물은 땅주인의 것이 된다. 당장 내일 어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지만 평균수명을 따지며 30년 뒤에도 내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나이 칠십에 집도 돈도 없이 쫓겨나면 나는 어딜 간단 말인가?

매매가 절대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흔히들 사업자 허가를 내면 회사 명의로 땅을 살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일단 대부분 업종이 외국인 지분 상한선을 두고 있어서 회사를 차리려면 현지인 파트너가 필요하다. 이 점을 악용해서 명의를 빌려주겠다고 하고 나중에 실질적인 지분을 요구하는 현지인들도 있다. 그런 위험 없이 100%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는 업종 중 만만한 게 호텔이다. 3성급 이상 호텔은 외국인 두 명만으로도 설립할 수 있다. 나 같은 개인 이민자들이 고려할 만하다. 3성급 호텔에는 레스토랑, 카페, 바, 레저 서비스 등이 포함되므로 여차하면 그 부지 안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사업자 허가를 내면 장기 체류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래서 사업자 허가를 내고 땅을 산다? 정확히는 땅의 이용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적어도 내가 알아본 업종에서는 그렇다. 법적으로는 국가가 땅주인에게서 그 땅을 사들인 다음 외국인 사업자에게 사용을 허가하는 형태다. 현재 규정으로는 45년이 지나면 추가로 비용을 내고 계약을 갱신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그 규정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혹시 누가 인도네시아에 회사를 차려서 땅을 사라고 유혹한다면, 그러면서 그게 우리가 아는 ‘매매’의 개념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의심을 좀 해보는 게 좋다.

발리 일대 섬에서는 이런 아담한 방갈로를 흔히 볼 수 있다. 외국인 건축주들에게는 대지 임대차 계약이 끝나면 건물만 떼어서 팔 수 있는 조립식 목조주택이 인기다.

발리 일대 섬에서는 이런 아담한 방갈로를 흔히 볼 수 있다. 외국인 건축주들에게는 대지 임대차 계약이 끝나면 건물만 떼어서 팔 수 있는 조립식 목조주택이 인기다.

이런저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만의 공간, 내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을 갖고 싶다. 20년 동안 서울에서 월세 사는 셈 치면, 그 돈을 한꺼번에 들여서 집을 짓고 살다가 20년 후에 다 버리고 떠난다 해도 큰 손해는 아니다. 나는 결정이 힘들고 머리가 복잡할 때면 일단 ‘되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리하여 땅을 임차하고, 그 땅에서 정해진 기간 내에 최대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누사프니다는 시골이다 보니 땅들이 규모가 크다. 누가 땅을 내놓았다 해서 가보면 단위가 듣도 보도 못한 ‘헥타르’다. 나는 패리스 힐튼이 아니고 파크 하얏트를 지을 것도 아니니까 그건 좀 곤란하다. 어떤 땅은 한자리에서 일출과 일몰을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끝내주는 전망을 가졌지만 모양이 들쭉날쭉해서 건축이 쉽지 않아 보였다. 또 어떤 곳은 커다란 땅을 조각조각 쪼개서 파는 바람에 주변에 집들이 가득 차서 답답해 보였고, 해변은 임대료가 서울 외곽 매매가와 맞먹을 정도로 비쌌고, 어떤 곳은 가격도 규모도 적당했지만 도로에 붙어서 시끄러웠다. 오랫동안 거래가 드물다가 이제야 개발되는 동네라 제대로 서류가 갖춰진 땅도 거의 없다. 대부분 토지 경계나 주소, 면적조차 불분명한 소유 증명서뿐이다. 그걸 건축 가능한 서류로 바꾸는 데 몇 백만원이 추가로 든다. 서울 사람들이 귀농하려고 땅을 찾다가 당하는 고전적인 사기가 몇 가지 있는데, 대부분이 도로, 지목과 관련된다. 막상 사고 보니 지적도상에 도로가 없는 맹지, 도로 폭이 좁아 증·개축을 할 수 없는 집, 혹은 아예 용도가 농지나 임야라 가정집을 못 짓는 경우 등이다. 집을 지을 수는 있는데 수도, 전기 시설이 멀어서 그것들을 끌어오는 데 예상 못한 지출이 발생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라고 다르지 않다.

한 번은 그럭저럭 조건이 맞는 땅을 찾았는데 주인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정작 중요한 땅값은 남편과 상의해야 한다며 알려주지 않으면서 “왜 결혼은 안 하냐? 왜 남자친구가 아니라 네 돈으로 땅을 사냐? 남자친구가 너한테 돈을 안 쓰냐? 아이는 안 가질 거냐?” 꼬치꼬치 묻더니 다음날로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뒷말을 퍼뜨렸다. “글쎄 그 여자는 애를 안 가질 거라지 뭐야!” 그게 그녀에게는 굉장한 스캔들이었던 거다. 땅값이 얼마인지는 끝내 듣지 못했다. 다시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여간 백 번 꼼꼼히 확인해서 조건들을 다 만족하는 땅을 찾았다 치자. 어떻게 가격을 협상할 것인가? 이건 또 새로운 게임이다.

몇 달 전 이곳에서 땅을 산 외국인 친구가 말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 귀화한 친척 명의를 빌려 임차가 아닌 매매를 진행했고, 땅주인이 의사만 타진한 후 매물을 거두거나 야금야금 가격을 올리면서 간을 보는 등 시세 상승 지역의 전형적인 패턴을 몇 번 겪은 뒤였다. “처음에 그들이 단위 가격으로 150만루피아를 제시했어. 내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이었지. 나는 너무 무례하게 들릴까 봐 걱정하면서 60만을 불렀어. 엄청 미안해서 조그만 목소리로 ‘60만?’ 하고 던져본 거야. 그런데 그들이 선뜻 ‘오케이’라고 하지 뭐야! 내가 불러놓고도 믿을 수가 없었어. 나는 생각했지. ‘이런 젠장, 50만을 불러야 했어!’”

우붓시장에서 바구니 사는 것도 아니고 몇 억원짜리 부동산을 사면서 3분의 1로 깎는 경우가 어디 있나 싶은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거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다. 여기서 사업을 한다고 건물을 짓거나 은퇴하고 와서 집을 지은 친구들이 꽤 있는데 이 정도 파격적인 흥정은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다. 내가 감히 그런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이 되진 못해도 터무니없는 바가지는 쓰면 안 되겠기에, 마침내 마음에 드는 땅을 발견했을 때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청해 들었다. 먼저 개발된 주변 지역 시세는 어떤지, 계약이 만료된 후 연장할 때 땅값 상한선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등이다. 그러고는 내가 아는 모든 흥정의 기술을 동원했다.

주로 읍소와 애걸복걸에 약간의 비전을 곁들이는 것이었다. 안 되는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섞어가며 내 처지가 얼마나 딱한지 진심을 다해 얘기하다 보니 진짜로 나 자신이 가엽게 여겨져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다행히 땅주인 가족은 야심차고 똑똑한 가문의 젊은이들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고, 그들은 시세보다 낮더라도 하루빨리 땅의 일부를 임대해서 목돈을 마련한 다음 그걸로 나머지 땅을 개발하는 게 더 유리하며, 먼저 임대한 땅이 잘 개발될 경우 나머지 땅의 가치 상승분이 할인분을 상쇄하고도 남으리라는 걸 이해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복잡한 서류작업이 남았다. 그런데 왜 벌써 이걸 글로 쓰고 있냐면, 그동안 목격한 바에 따르면 일이 잘 풀릴 경우 이 모든 과정이 금세 잊힐 만큼 우여곡절이 줄줄이 생겨나서 이 정보들을 써먹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다.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은 먹여살릴 처자식도 없는 내가 뭐하러 외국까지 가서 집을 짓겠다고 이 소동을 피우는지 의아해한다. 글쎄, 부동산에 끝은 없고 나는 미쳤고 남의 말은 안 듣기로 했으니까, 혹은 서울에서 집 못 산 서러움 때문이라고 해두자. 모쪼록 다음 회엔 의기양양하게 땅 찾기 여정의 마무리를 들려줄 수 있도록 함께 빌어주시길 바란다.



[다른 삶]서울서 20년간 월세 사는 셈 치고 그 돈 한꺼번에 들여 집 짓기


필자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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