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여'가 사라졌다

2019.06.01 14:26
이하늬 기자

2017년 3월,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곳곳에 대자보가 붙었다. 동국대 광고홍보학과 일부 13학번 남학생들의 단체카톡방을 고발한다는 제목이었다. 대자보는 2014년 1월부터 같은 해 4월까지 약 3개월 동안 해당 단톡방에서 상습적으로 이뤄진 성희롱 및 모욕, 명예훼손 등 각종 언어적 범죄행위를 담고 있었다. 가해자는 11명, 피해자는 20명이 넘었다.

대화에서 이들은 동기와 후배 여학생들을 지칭하며 ‘ㄱ과 하기 vs ㄴ과 하기 뭐가 더 ㅎㅌㅊ?(평균 이하를 의미하는 은어)’ ‘뼈해장국 vs 설렁탕 선택은? ㄷ 먹어’ ‘○○여고 김○○ 성인식시켜 줘야지 섹스도 한 번 해줘’ ‘○○여대 남는 구멍 있어요? 두 개나 들어가요’ ‘ㄹ은 줘도 안 먹는 듯’이라고 했다. 당시 꾸려진 ‘광고홍보학과 단톡방 사건 임시대책회’(대책회)에 따르면 이 같은 내용은 3200페이지에 달한다.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연세대학교 학내에 총여학생회의 역사를 설명하는 3장의 우드락 보드가 세워져 있다. / 연세대학교 제30대 총여학생회 ‘프리즘’ 제공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연세대학교 학내에 총여학생회의 역사를 설명하는 3장의 우드락 보드가 세워져 있다. / 연세대학교 제30대 총여학생회 ‘프리즘’ 제공

김은영씨(가명·24)는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대자보가 붙었을 때만 해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은영씨는 “내가 피해자인 걸 몰랐을 때는 그냥 역겹다고만 생각했다”며 “나중에 내가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됐다. 기분이 엄청나게 나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은영씨는 가족과 친구, 누구에게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후 피해자를 지원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오픈 채팅방’이 꾸려졌다. 자신의 피해에 대해 무언가 대응을 하고 싶지만 신상이 공개되는 게 꺼려졌기 때문에 택한 방식이었다. 채팅방은 익명의 피해자들, 대책회, 총여학생회로 꾸려졌다. 대책회도 피해자들 모임이었기에 2차 가해를 받지 않으면서 피해자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은 총여뿐이었다.

총여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학교에 전달했고 피해자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활동을 했다. 2차 가해에 가까웠던 가해자 작성 사과문에 문제를 제기한 것도 총여였다. 은영씨는 “인권센터는 아무래도 학교 기관이다 보니까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 싶어하는 느낌이 있었다”며 “총여는 그렇지 않았다. 사건을 장기적으로 보고 제대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국대 총여는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2018년 11월 폐지됐다. 더 이상 총여가 필요없다는 의견이 학내에서 나왔고 학교선거관리위원회는 학생 다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로 총여 폐지를 학생 총투표에 부쳤다. 투표한 학생의 75.94%가 총여 폐지에 찬성했다. 역시 다수의 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로 총여 폐지가 받아들여졌다.

총여는 왜 사라졌을까
동국대만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 성균관대 역시 총투표를 통해 총여가 폐지됐다. 앞서 건국대와 홍익대는 2013~2014년 총여를 폐지했고, 중앙대 서울캠퍼스는 2014년 총여학생회를 총학생회 산하기구로 편입했다. 숭실대는 2016년 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총여 폐지를 결정했다. 연세대는 올해 1월 총투표로 총여 폐지를 결정했다. 현재 서울 소재 대학에는 총여가 있는 대학이 없다.

총여 폐지의 흐름은 여러 요인이 뒤섞여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대학 내에서 여성이 더 이상 차별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학내 여성 비율이 20~30%에 머물렀던 과거와 달리 대학 내에서 여성과 남성이 대등한 비율이 됐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018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72.2%로 남성 65.3%보다 7.4%포인트 높다.

하지만 이런 대학 내 여성의 증가가 성평등 실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은 매년 증가하고 있어서다. 교육부가 대학의 성희롱·성폭력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수조사를 실시한 결과 2015년 167건이던 조사 건수는 2018년 상반기에만 250건이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물론 성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신고 건수가 높아진 측면이 있다.

여기에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한 최근의 사회 분위기가 오히려 학내에서 백래시(backlash·반발, 반동)를 불러왔다.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왜 유권자가 여성으로만 제한되며, 남학생들의 학생회비까지 걷어서 총여학생회 회비로 쓰느냐, 왜 남학생 휴게실은 없고 여학생 휴게실만 있느냐, 이는 남학생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냐는 주장 등이다.

어플 ‘에브리타임’ 익명게시판에는 ‘페미니스트들 시위에 테러 터졌으면’ ‘숏컷하고 지나가는 여자들은 다 패버린다’ ‘××충들(성소수자 비하 단어) 성병 옮기지 말고 너희들끼리 해라’ 등 여성과 소수자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와 있다. 에브리타임은 대학 시간표 서비스와 학교 게시판 등을 제공하는 어플로 대학생임을 인증한 가입자 수는 280만명에 달한다.

또 하나의 요인은 학생 자치조직의 쇠퇴다. 5월 28일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열린 <대학 페미니즘 이어달리기> 포럼에서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대학이 학문과 생활, 운동의 공동체가 아닌 취업을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과정으로 바뀌자 학생들이 원하는 학생회는 ‘주민센터나 고객센터와 다를 바 없게 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학생들의 요구사항 상당수가 대학본부 담당자에게 전화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2017년 공개된 동국대 광고홍보학과 일부 13학번 남학생들의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 내용.  / 동국대학교 대나무숲

2017년 공개된 동국대 광고홍보학과 일부 13학번 남학생들의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 내용. / 동국대학교 대나무숲

‘여휴’가 성차별이라고?
황주영 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생은 “학생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사회과학 동아리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고, 주식을 연구하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동아리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며 “매년 경선을 치르던 총학생회 선거는 2000년대 초반부터 후보도 겨우 내놓는 지경이 됐고, 단과대 학생회들 중 일부가 후보를 내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흐름은 현재진행형이다. 성공회대 페미니즘 교육 플랫폼 ‘비두’(Be.Do)의 동희 활동가는 “지금의 학생사회는 공동의 합의가 아닌 의지가 있는 개인에게 기대어 있다. 학생 자치에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며 “총여가 사라진 것과 별개로 학생회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어렵다 해도 총여, 혹은 이에 버금가는 학생 자치기구는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총여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학생회비나 여학생 휴게실이 제시된다는 것 자체가 총여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 내 여성의 비율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성차별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다.

“왜 여학생만을 위한 기구인데 남학생 학생회비까지 걷어서 총여 회비로 쓰냐는 비판이었어요. 사실 총여가 학내 소수자를 위한 기구라는 것을 인지하면 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도 세금을 걷어서 경제적 약자나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복지비용으로 쓰는 경우가 많잖아요.”(성균관대 최새얀씨 <대학에서 싸우는 여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여학생 휴게실, 이른바 ‘여휴’에 대해서도 남성과 여성이 느끼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2000년대 후반 대학을 다녔던 한 30대 여성은 “여휴는 단순한 휴게실이 아니다. 남자 동기나 선배, 교수들의 추근거림을 피해서 갈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었다”며 “특히 학교에서 밤을 샐 때면 남자들은 아무데서나 잠을 잤지만 여자들은 여휴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아니면 돈을 모아 모텔에 갔다”고 말했다.

총여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학내에서 페미니즘 동아리를 꾸리는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동아리는 학생회가 가지는 공신력, 공공성, 대표성이 없어 발언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예산이 없기 때문에 매해 진행했던 면생리대 만들기, 피임 교육, 성평등 교육 등을 진행할 수 없고 성폭력 신고센터 운영도 어렵다. 피임이나 성평등 교육은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싸우는 여자들>의 저자 재정씨는 “총여는 그나마 대학에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제도권’ 여성주의 기구였다”고 말했다. 윤원정 동국대 31대 총여학생회장은 “총여학생회장이 회의에 있냐 없냐가 정말 다른데, 어떤 차별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제 얼굴을 쳐다봤다. 그렇게 눈치 보는 사람의 여부가 회의 분위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총여가 아닌 다른 형태의 기구는 백래시에 더 취약하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중앙대 서울캠퍼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중앙대는 2014년 총여를 총학생회 산하의 성평등위원회로 편입시켰는데, 최근에는 이 성평등위원회를 인권복지위원회와 통합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기구의 규모와 권한이 점점 축소되는 모양새다.

이에 대해 중앙대 재학생·졸업생은 “성평등위원회는 2014년 총여가 폐지된 이후 학내 성차별·성폭력 문제를 알리고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며 성평등한 중앙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들의 노력으로 반성폭력 학칙과 자치규약 등이 만들어졌다”며 “총학생회가 진정 ‘성평등’을 지향한다면 성평등위원회를 비난하는 청원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 성평등 확립을 위한 사업들을 더욱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동국대 단톡방 사건이 공론화된 지 2년이 지났다. 정학 등의 징계를 받은 가해자들은 학교로 돌아왔다. 가해자들과 같은 학과인 은영씨는 교내에서 그리고 수업에서 이들을 마주친다. 피해자가 20명이 넘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겪는 건 은영씨만이 아니다. 은영씨는 “총여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가서 상담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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