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수난의 길에서 역사의 주인공 ‘민중’을 만난 신학자

2020.03.24 21:57 입력 2020.03.24 22:03 수정
김언호

민중신학자 안병무

1. 1980년대 후반 한국신학연구소 시절의 안병무 교수.

1. 1980년대 후반 한국신학연구소 시절의 안병무 교수.

1973년 가을, 수유리의 한국신학대학 연구실로 안병무(安炳茂·1922~96) 교수를 방문했다. 나는 그때 동아일보사가 펴내는 월간 신동아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잡지 권두에 실을 글을 청탁하기 위해서였다.

폭압적인 유신시대였다. 행간으로라도 뭔가 느낄 수 있는 글을 잡지에 실어보자 했다. 말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는 것조차 금압하는 박정희의 군사통치에 우리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나는 안 교수에게 ‘사람으로 살기 위해’라는 제목을 드렸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이라도 해보자는 것이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파스칼의 말을 사람들은 왜 오래 기억할까. 인류, 세계, 조직, 국가, 민족, 이데올로기 또는 대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 또는 전체주의적 바람에 개인은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갈대처럼 힘 앞에 무능하면서도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하는 것은 누가 줄 수도 뺏을 수도 없는 권리다.”

그때 안 교수는 삭발한 모습이었다. 한신대 학생들과 교수들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한 진원지였다. 안 교수의 삭발한 모습을 보면서 내심 놀랐다. 삭발하던 심경과 분위기를 그는 ‘두발론’이라는 짤막한 에세이에서 기록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삭발당한 경험이 있는 세대는 삭발에 예민하다. 한신대 교수 전원과 함께 삭발했다. 그것은 묘한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선언한 후 매일 마주 앉은 교수들은 착잡한 심정에 침울했는데, 어떤 정의도 논의도, 또 그것에 따를 어떤 설명이나 그것이 가져올 호소력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학장을 선두로 머리를 깎았다. 그 후 학생들이 모조리 머리를 깎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2. 1990년대 서재에서 집필 중인 안병무 교수.

2. 1990년대 서재에서 집필 중인 안병무 교수.

■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안병무 선생과의 그날 만남 이후로 나는 선생에게 많은 말씀을 듣게 된다. 선생도 대학에서 해직되고 나도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선생의 말씀은 나의 가슴 저 근저를 흔드는 울림이었다.

한길사는 1978년에 선생의 수상집 <시대와 증언>을 출간한다. 촌철살인의 에세이들이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도 수록했다. 짧은 글 ‘대리석은 말한다’를 나는 좋아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찬양하는 군중의 입을 막으려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라고 했다. 너무나 확신에 찬 무서운 말이다. 드러내야 할 참은 드러나고야 만다. 그 어떤 압력도 참을 막을 수 없다. 인간들이 압력 앞에 굴복해서 입을 다무는 한이 있더라도 드러내야 할 것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이 확신! 이런 확신 앞에 돌인들 소리를 안 지를 수 있으랴. 할 말은 해야 한다.”

1922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부모님과 함께 간도로 이주했다.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윤동주가 다닌 학교였다. 강원용·문동환이 같이 다녔다. 뒷날 한국신학대학을 이끄는 김재준은 교사였다. 1941년 일본으로 가서 대학을 다니다가 1943년 강제징집을 피해 간도로 귀환했다. 1946년 소련군의 체포령을 피해 월남했다. 195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51년 전주로 피란하면서 잡지 ‘야성’을 12호까지 냈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1965년에 귀국했다. 1969년엔 동베를린 사건 용의자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비인간적인 모욕을 당했다. 1969년에 월간 ‘현존’을 창간했다. 1970년 한국신학대학 김정준 학장의 권유로 한신대 신약학 교수로 부임했다. 1972년 교무과장으로 당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함석헌 선생의 ‘동양고전특강’을 개설했다. 1973년에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계간 ‘신학사상’을 창간했다.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의 분신

전태일의 죽음이 던진 충격
죽어가고 있는 사회와
신음하는 민중 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뼈저린 반성

1971년 11월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온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가 죽으면서 외친 목소리는 광야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안병무는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선 자리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된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노동자 전태일!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학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 눈을 뜬다. 그러나 그 관심사는 ‘인권’이라는 차원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권’이라고 하는 추상적 개념을 구사하면서, 실제로 권리가 박탈되는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죽어가고 있는 사회를 인식하고 그 밑에 깔려 신음하는 민중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청년 전태일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민중을 정확히 바라보고 각계에 호소했으나 이 사회는 카프카의 ‘성’처럼 그에게 차단되어 있었다. 그는 육탄으로 이 굳은 성을 폭파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세례를 짙게 받은 안병무는 세상을 새롭게 만나고 있었다. 1975년 3월1일,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연세대 김동길·김찬국 교수 석방 환영회가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안병무는 ‘민족, 민중, 교회’를 강연한다. 5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교회 본관은 경찰에 의해 폐쇄되고 200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는 교육관에서 강연은 진행되었다. 교육관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마당에서 스피커로 전해지는 그의 육성을 들었다. 수많은 감시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3.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한 인사들의 모습. 왼쪽부터 이우정 교수, 안병무 교수, 함석헌 선생, 이해동 목사.

3.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한 인사들의 모습. 왼쪽부터 이우정 교수, 안병무 교수, 함석헌 선생, 이해동 목사.

■ 감옥에서 만난 민중의 실체

1976년 ‘3·1민주구국’ 선언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행
밑바닥 민중 만남 계기

1976년 3월1일, 윤보선·김대중·함석헌·문익환·문동환·서남동·김승훈·이문영·이해동·함세웅·안병무 등 민주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3·1민주구국’ 선언을 감행한다. 안병무의 수유리 집에서 선언문이 만들어진다.

김대중·문익환 등 11명이 구속되고 9명이 불구속 입건된다. 안병무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열흘 동안 조사와 고문을 당한다. 이른바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기소되어 감옥으로 넘어간다. 정신을 단련하고 밑바닥 민중을 만나는 기회였다.

“밤이면 귀신이 들끓는 듯한 이 흉가의 여기저기에 내 편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간수들의 모진 매에도 마다하지 않고 심부름을 하는 저 ‘소지’들이 내 마음에 새로운 무게로 압도해 들어왔다. 그들은 절도, 강도, 강간범이었다. 나는 이미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신념에서 새 신학의 장을 열었는데도 저들을 이 범주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안병무는 감옥에서 말해지는 온갖 쌍소리를 감당할 수 없어 솜으로 귀를 막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그 쌍소리가 싫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들이 쓰는 말이 오히려 가증스럽게 들렸다. ‘쌍소리’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 감옥은 그에겐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4.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된 인사의 가족들이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두번째 줄 오른쪽부터 이희호 여사,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여사, 안병무 교수의 부인 박영숙 여사.

4.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된 인사의 가족들이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두번째 줄 오른쪽부터 이희호 여사,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여사, 안병무 교수의 부인 박영숙 여사.

1980년 복권·복직됐지만
신군부 집권 후 다시 해직

1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76년 말에 석방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석방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26일 밤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함으로써 일거에 무너진다. 1980년 봄 안병무는 복권되고 한신대로 복직된다. 희망찬 그 서울의 봄, 전두환의 신군부가 광주학살을 딛고 권력을 잡는다. 안병무는 다시 해직된다. ‘현존’도 폐간된다. 그는 민족과 민중의 현실에 더 치열하게 천착한다. 민중신학을 더 깊이 성찰한다. 한국신학연구소와 ‘신학사상’은 그의 생각과 이론을 실천하는 기지가 된다.

한길사는 1982년 성북구 안암동 5가 101-21, 지금 고려대 병원이 들어서 있는 그곳으로 이사 가는데, 명동의 향린교회에 있던 신학연구소도 안암동 로터리로 이사 온다. 우리 출판사와 300m 거리의 신학연구소로 가서 안병무 선생을 만난다. ‘안병무 민중신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통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발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 않을 터이니까.”

1986년 한길사가 펴내는 ‘오늘의 사상신서’가 100권째에 이르렀다. 안병무 선생의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를 100권째 책으로 내세웠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써낸 사회적 주제들이었다. 역사적 격동기에 형성되는 안병무 민중신학의 세계였다.

■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민중신학

“나의 주제는 권외에 있는
권리 향유 못하는 민중들
그들이 세상 변혁의 주체”

1980년대 후반부터 나는 ‘안병무 저작집’을 궁리하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가 창출해낸 그의 ‘민중신학’을 집대성해보자! 1990년부터 작업이 진행되어 1993년에 ‘안병무전집’ 제1권부터 제6권이 동시에 간행되었다. ‘안병무 민중신학’의 전모를 보여준다. 선생은 전집을 내는 감회를 책 끝에 붙였다.

“나의 삶에, 나의 사상에 결정적 전기는 ‘민중’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정좌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침내 역사의 담지자를 만난 것이었다. 대학에서 거리로, 집 안에서 감옥으로 가게 되지 않았던들 이런 사건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 6부작인 제1권 <역사와 해석>, 제2권 <민중신학을 말한다>, 제3권 <갈릴레아의 예수>, 제4권 <예수의 이야기: 성서의 비유풀이>, 제5권 <민중과 성서>, 제6권 <역사와 민중>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빛나는 학문적·실천적 이론이고 사상일 것이다.

“수난의 도상에서 민중과 만나면서 나는 오랫동안 거미줄같이 나를 휘감았던 서구적 사고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못 만난 예수를 나는 만나게 되었다.”

나는 안병무 선생과 그의 저작집을 총 20권으로 기획했다. 그러나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민중신학 6부작 이후 작업이 진행되지 못했다. 그래도 선생과 함께 선생의 민중신학 6부작을 펴낼 수 있었다. 아픈 몸으로 1996년 여름, 그의 청소년 시절 고향 연변의 들미동을 방문했다. 그 고향을 다녀온 두 달 후인 10월9일에 선생은 서거한다.

선생은 1972년 발표한 짤막한 글 ‘예수와 민중’에서 ‘오클로스’를 이야기했다. 신학연구소 선생의 방에서 오클로스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성서에는 민중을 표시하는 두 그리스어가 있지요. 하나는 ‘라오스’(laos)이고 또 하나는 ‘오클로스’(ochlos)입니다. 라오스는 오늘의 국민과 통하는 말로 어떤 제도권 내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민중의 칭호인 데 반해서 오클로스는 권외에 있는,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천민들입니다. 예수의 주변에는 이들 오클로스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주제는 오클로스입니다. 나는 민중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민중은 스스로 합니다. 죄인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새 질서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너희가 세상을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기도 하다. <책의 공화국에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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