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폭염이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

2020.08.22 10:09 입력 2020.08.22 14:58 수정

“갈 데가 없지. 하는 수 없어서 오전에 지하철 타고 한 바퀴 돌고 온 길이야.”

지난 8월 19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문화센터 앞에서 만난 백정근씨(78)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땀을 날렸다. 가로수 그늘에 줄줄이 놓인 벤치가 백씨를 비롯한 동네 할아버지들의 피서 장소였다. 그늘이지만 스마트폰으로 측정한 기온은 30도, 기상예보 사이트에 올라온 해당지역 기온은 31도였다. 걸어서 3분도 안 걸리는 경로당은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진 지난 3월부터 줄곧 닫힌 채로 있다. 그나마 열려 있던 주민센터의 무더위쉼터도 수도권 코로나19 방역지침 강화에 따라 이날 다시 문을 닫았다. 갈 곳이 없어서 모이다 보니 흔한 장기판이나 바둑판 하나 없다. 어르신들은 담배 연기나 내뿜으며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백씨 할아버지는 한낮에는 경로할인 덕에 무료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을 타고 더위를 식혔다. 목적지 없이 서울지하철 6호선을 타고 갔다 돌아오니 2시간 가까이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딱히 볼거리도 없는 지하철 구경이 재미있을 리 없다. 게다가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답답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갔지만 혼자 사는 집 역시 무료하긴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몇 명이 모여 있어도 화제가 궁해 오가는 말은 많지 않다. “자고로 처서(處暑) 지나면 모기 입도 비뚤어진댔어. 며칠만 더 참아.” 옆에 있던 김모 할아버지가 날씨에 관해 한 마디 꺼내자 백씨 할아버지가 되받았다. “올해처럼 말복 지나 장마 끝나는 거 예전엔 본 적이나 있어? 날씨가 바뀐 지가 언젠데.” 이들은 오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늦은 장마를 겪은 적은 몇 번 있어도 올해처럼 길었던 적은 없다며 농사가 잘 안 될 것이라 걱정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지나고 무더위가 뒤따른다. 그런데 올해는 기록적인 장마가 중부지방을 기준으로 54일이나 이어졌다. 역대 최장 기록이다. 중부지방이 지난 8월 16일을 끝으로 지겨운 비 소식과는 작별했지만, 남부지방에선 폭염 특보가 발효 중이다. 길게는 지난 8월 11일 이래 폭염경보가 해제되지 않고 있는 대구와 경북 경산을 비롯해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폭염경보·주의보가 장마와 바통을 주고받은 상태다. 강원 영동 일부 지방을 제외하면 더위로부터 피할 곳은 없는 셈이다.

기후위기 비상행동 회원들이 6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후위기 대응 정책 우선 추진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기후위기 비상행동 회원들이 6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후위기 대응 정책 우선 추진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역대 최장인 장마 이어 폭염 특보

코로나19 사태로 노인정 등 취약계층을 위한 무더위쉼터가 5곳 중 4곳꼴로 문을 닫긴 했지만 폭염은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할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50일 넘게 이어진 장마와 폭우 때문에 벌어진 물난리는 손 쓸 도리 없이 다가온 기후위기의 현실이다. 소셜미디어(SNS)에서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라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진 것도 전례 없는 기후변화가 이미 위기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미 기후위기는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올해 장마철 폭우로 인한 물난리로 총 42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고, 8000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 규모가 막대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지방자치단체도 18곳이다. 하천이 범람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산사태도 1500건이 넘게 발생했다. 또 농경지 곳곳이 물에 잠겨 전체 벼 재배 면적 가운데 3%가 침수됐고, 축산농가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닭과 오리 등 가금류 180만마리 이상, 돼지 6000마리 이상이 홍수에 휩쓸려 폐사했다. 이런 피해가 벌어진 와중에 폭염이 바로 밀어닥치면서 복구현장에서는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의 여파는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가는 피해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사과로 유명했던 대구가 더 이상 사과를 재배하지 못하는 도시가 된 배경에도 지구온난화가 자리 잡고 있다. 기온이 더 높아진다고 해서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수가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추운 날이 적어진 탓에 과일의 맛이 떨어져 기존의 유명 산지에서는 재배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 문제는 논에서 잡초를 먹는 우렁이를 키우는 농가들이 따뜻해진 겨울 때문에 월동에 성공하는 우렁이들이 생기면서 우렁이농법을 포기하는 경우와도 닮았다. 잡초뿐 아니라 벼까지 파먹을 정도로 우렁이 개체수가 늘어나면 더 이상 논에 우렁이를 풀어놓을 수가 없다. 또 강원 동해안 지역의 황태덕장이 겨울 동안 눈 대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 점차 대관령 등 고지대로 이동해야 하는 현실 역시 기후위기가 부른 변화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하루아침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추세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국립기상과학원에 따르면 지난 100여년 동안 한반도의 연 강수량은 매년 평균 1.63㎜씩 증가했다. 기온 역시 꾸준히 높아졌다. 기상청 빅데이터를 보면 서울의 여름은 1910년대 10년 동안의 평균 94일에서 2010년대 들어서는 평균 131일로 늘어 3분의 1가량 더 길어졌다. 이미 한 해의 3분의 1이 넘는 38.3%를 평균기온 20도 이상인 여름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온이 오르는 경향은 대도시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 지구적으로 100년간 기온이 0.75도 오르는 동안 서울 등 국내 6대 도시는 2배가 넘는 1.8도나 올랐다. 이에 따라 2050년이 되면 한 해 폭염일수는 최대 50일까지 늘어나고, 폭염 사망자 수도 250명을 넘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서울은 1년 중 3분의 1이 여름

다른 자연재해와 같이 기후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폭염 역시 인간사회 내부의 가장 약한 집단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다. 질병관리본부의 폭염 대비 건강관리 매뉴얼에 나와 있는 폭염 취약계층은 흔히 말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이기도 하다. 노인,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 어린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기록적인 폭염을 겪었던 2018년에는 국내에서 48명이 폭염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 수치가 각급 병원 응급실을 통해 운영되는 온열질환 감시체계를 바탕으로 한 집계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폭염으로 인명 피해를 입는 인원은 이보다 3배 이상일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취약계층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심각할 정도의 폭염이 아니더라도 인구가 집중된 대도시 주민들이 여름철 경계해야 할 잘 알려지지 않은 대상이 있다. 바로 오존이다. 장마가 끝난 뒤 햇빛이 강해지고 기온이 오르는 이 시기는 대기 중 오존농도가 올라가 오존특보 발효가 잦아지는 때다. 오존은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배출가스 등에 함유된 질소산화물, 탄화수소류 등이 강한 자외선과 광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만들어진다. 햇빛이 강하고 맑은 여름철 오후 2∼5시 무렵, 특히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더욱 농도가 높아진다. 대기 중 오존농도가 높아지면 호흡기나 눈을 자극해 기침이 나고 눈이 따끔거리거나 심할 경우 폐기능 저하를 가져온다.

말 그대로 숨쉬기 힘든 날들이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겨울부터 봄철까지 한반도를 덮었던 미세먼지는 여름이 되면 농도가 낮아지며 진정세를 보이지만 곧이어 폭염과 오존이 함께 다가온다. 향후 미세먼지 관련 사망이 지금보다 2배 증가할 동안 지표면 오존과 관련된 사망자 수가 4배 증가해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연구결과도 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한여름 무더위에도 마스크를 쓰고 더위 속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는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기후·생태위기로 인한 것임을 감안하면 당장 숨 쉴 자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기후위기에 맞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힘을 얻게 됐다.

기상학계에서 폭염은 ‘소리 없는 살인자’로 불린다. 올해 최장 54일에 이른 긴 장마가 불러온 홍수와 산사태는 순식간에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인명을 단순히 숫자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수치만 놓고 볼 때 폭염은 조용히 다가와 오래 지속되는 동안 목숨을 잃는 사망자 수를 급격하게 늘린다. 더위뿐 아니라 오존과 같은 부수적인 피해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폭염도 장마도 모두 거대한 규모의 기후위기의 관점에서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이미 기후위기에 대한 경고는 많이 나왔어도 실제 시민들이 체감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분위기가 만연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빠르고 쉽게 행동할 수 있는 방향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다.

서울시는 시민제안을 찾아내고 공유하기 위해 지난 8월 6일부터 20일까지 온라인 워크숍을 열었다. 시민들은 워크숍에 참여한 기후위기 관련 전문가들의 대책을 들으며 일상 속에서 당장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워크숍에서 발제를 맡은 <폭염의 시대> 저자 주수원 마을교육공동체포럼 공동대표는 “미국 시카고의 사례를 볼 때 폭염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 단지 건강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폭염에 관한 정보와 돌봄을 충분히 지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며 “이러한 모습은 쪽방촌 등 국내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기후위기 자체는 한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문제지만 국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파급되는 피해를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이러한 복합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는 시민들의 제안은 폭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한 시민은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서울의 무더위쉼터 3769개소 중 77%를 차지하는 경로당의 절대다수가 문을 닫은 점을 고려해 1인용 무더위쉼터 공간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올렸다. 공중전화 부스처럼 도시 곳곳 접근성이 높은 지역에 설치하면 노인 등 폭염 취약계층은 물론 헬멧과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일해야 하는 배달노동자들에게도 쉴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이유다.

무더위쉼터로 지정된 서울 마포구의 한 경로당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폐쇄되어 있다.  / 김태훈 기자

무더위쉼터로 지정된 서울 마포구의 한 경로당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폐쇄되어 있다. / 김태훈 기자

■‘소리 없는 살인자’ 폭염

기후위기를 초래한 에너지 소비 증가 양상이 다시 고온다습한 여름철 기후 때문에 에어컨 사용이 늘며 더욱 심각해지는 악순환을 막기 위한 시민행동 제안도 있다. 대도시에서 여름철 전체 에너지 사용량의 절반이 넘는 58%가량을 건물이 소모한다. 때문에 조윤석 십년후연구소 소장은 “햇빛 반사율과 열 방사율이 모두 높은 밝은색 도료로 건물 지붕이나 옥상을 덮어 온도를 낮추는 ‘쿨루프’를 적용하면 도시 열섬을 막고 냉방에너지의 20%가량을 절감할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단기간에 모든 건물에 적용하기는 어렵더라도 서울로 한정해 적용 가능한 모든 건물에 쿨루프를 도입할 경우 건물 온도를 평균 2도가량 낮추고, 100㎡당 연간 10톤의 이산화탄소 배출 절감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취약계층은 아니지만 옥외 노동현장에서 혹독한 기후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2018년처럼 ‘폭염파업’을 겪지 않게 예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폭염파업은 의도적으로 파업에 나선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일할 수 없고 휴식시간, 공간이 마련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일을 멈춰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건설이나 도로공사는 물론 공원관리, 조리, 청소, 택배, 경비 등 노동현장에서 폭염 시 작업을 중지하고 휴게시간과 공간 마련을 강제하는 법적 조치와 제도화가 필요하다”며 “시민들이 가까운 노동현장을 지나칠 때 안전 기준을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고 기준 준수 여부를 질문하기만 해도 안전한 노동 환경 확보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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