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SOC? 수해로 다시 주목받는 ‘노후 SOC’ 보강

2020.08.22 11:32

‘토건족’이란 말이 쓰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5년 8월 기사에 처음 등장했다. 1999년 이전 옛날 뉴스를 보여주는 포털사이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는 토건족이 포함된 기사가 없다. 토건족은 토목과 건축을 이르는 말인 토건에 집단을 뜻하는 ‘족’의 합성어다. 대개 개발지상주의를 비판할 때 쓰인다. 토건족이 본격적으로 쓰인 건 이명박 정부 출범 전후다.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였던 4대강 사업의 영향이 컸다. 토건은 곧 ‘삽질’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강해졌다.

4대강 사업 외에도 SOC 예산이 낭비성 예산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많다. 지역구 의원들이 국회 예산 처리 과정에서 지역 선심성 사업을 끼워 넣는 일이 해마다 반복됐다. 지난해에도 국회에서 예산안 처리 직전, 지역구 SOC 예산 9000억원이 갑작스레 들어갔다는 비판이 일었다. 필요성이 떨어진 탓에 쓰이지 않은 예산도 많았다. 경기 용인 경전철처럼 사업성이 떨어지는 사업도 이어졌다.

대민지원을 나온 군인들이 지난 8월 6일 수해 피해를 입은 강원도 철원 갈말읍 동막리에서 피해 복구 작업을 돕고 있다.  / 이석우 기자

대민지원을 나온 군인들이 지난 8월 6일 수해 피해를 입은 강원도 철원 갈말읍 동막리에서 피해 복구 작업을 돕고 있다. / 이석우 기자

■떠오른 노후 SOC

분위기가 바뀐 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다. 그동안 노후 SOC 개선은 ‘티 안 나는’ 사업이어서 여·야 의원 모두 관심이 덜했던 분야였다. 시민 안전과 직결되는 상수도, 도로 등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노후 SOC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노후 SOC 개선은 ‘착한 SOC’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올여름 수해 발생으로 노후 제방, 저수지 개·보수 필요성도 강조됐다.

인천에서 발생한 ‘붉은 수돗물’ 사태(2019년), 서울지하철 3호선 백석역 열수송관 파열사고(2018년) 등이 노후 SOC 문제가 불거진 대표 사례다. 노후한 상·하수도로 인한 땅꺼짐 현상도 꾸준히 발생한다. 2018년 한 해에만 땅꺼짐 현상이 140건이나 일어났다.

고도성장기였던 1970년대 SOC가 집중적으로 건설돼 최근 들어 노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토교통부 통계를 보면, SOC의 ‘30년 이상 노후화’ 비율은 저수지가 96%로 가장 높다. 댐(45%), 철도(37%)의 노후화 비율도 높은 편이다. 통신구(35%)나 여러 케이블이 함께 깔린 관인 공동구(25%), 하수관로(23%)의 노후화도 시작됐다.

정부도 이미 노후 SOC 관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국토부가 2015년 용역발주한 ‘사회기반시설 유지관리 제도화 연구 용역’ 보고서를 보면, 2014년 기준으로 향후 10년간 준공 30년이 지난 노후 시설물이 21.5%에 달할 것으로 봤다. 2036년에는 SOC 노후화 비율이 44.4%에 이른다. 보고서는 지속가능한 SOC 관리체계 구축, 전문적인 안전점검 의무화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여당과 건설업계도 노후 SOC로 눈을 돌렸다. 여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에서도 2019년 2월 이슈페이퍼 ‘SOC 투자의 방향전환- 생활 안전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후 SOC 개선’을 냈다. 민주연구원은 이슈페이퍼에서 “시설물 노후화에 대비하기 위해 SOC 투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 여당은 고용이 부진한 상황에서 고용창출 효과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설업계에서 출연해 만든 건설산업연구원에서도 꾸준히 보고서 발간 등으로 노후 SOC 예산 확보를 강조한다. 신규 SOC 확충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노후 SOC 분야는 건설업계에도 새 먹거리다.

정부는 지난 5월 ‘제1차 기반시설관리 기본계획’(2020~2025년)을 의결했다. 올해 1월 시행된 기반시설관리법에 근거해 만든 5년 단위 법정계획이다. 정부는 1차 기본계획에서 2025년까지 노후 SOC 관리 강화에 매년 13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수해 대응 SOC 예산 늘 듯

올여름 전국에서 수해가 발생한 뒤 오래된 제방, 둑, 저수지 등이 기록적 폭우를 견디지 못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부산은 지난 8월 8일 하루 강수량 163.1㎜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광주는 지난 8월 7일과 8일 각각 강수량 295.5㎜, 255.5㎜의 비가 내렸다. 역대 강수량 1·2위였다. 중부지방(54일)과 제주(49일)는 올해 장마 최장기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충북에서 관리하는 저수지 575곳 중 89%인 514곳은 지은 지 50년 이상 된 노후 저수지였다. 저수지가 폭우를 견디지 못하면서 주택 붕괴, 마을 침수 등이 발생했다. 전북에서는 제방이 제 역할을 못 하면서 피해가 발생했다. 전체 공공시설 피해 중 20%(120여건)가 하천 피해로 집계됐다.

기후변화에 따른 인프라 보강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환경 전문가인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0년에 한 번 일어나는 재난이 앞으로는 매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이는 물, 강수, 날씨와 관련된 모든 인프라를 180도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기존 유지·보수의 개념을 넘어 새로운 기준을 세워 인프라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다.

박기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노후인프라센터장도 “노후 SOC 개선을 위한 예산 확보가 상수라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새로운 기준 확립은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관리하는 국가하천은 100∼200년, 지방하천은 30∼80년 설계빈도로 지어진다. 설계빈도가 100년이면 100년에 한 번 오는 홍수를 대비해 짓는다는 의미다. 박 센터장은 “설계빈도를 지역별 특성을 반영해 정한 뒤 교량의 형하고(높이), 제방의 높이 등 세부적인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소규모 하천 관리도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환경부가 매해 발간하는 홍수피해조사 보고서(2018~2019년)를 보면, 수해는 중·소 규모의 하천에 집중됐다. 수해를 입은 하천 190곳 중 3곳만 대형 국가하천이다. 보고서는 “최근 들어 집중호우 양상을 띠고 있는데, 중·소 규모 하천이 상대적으로 취약하지만 정비가 제대로 안 됐다”고 지적했다. 중·소 하천은 대부분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한다.

정부는 9월 초 편성하는 내년도 예산안에서 수해 예방과 관련된 노후 SOC 예산을 증액할 것으로 보인다. 기재부는 국토부가 제출한 SOC 예산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수해 대비 예산을 늘리기로 방침을 세웠다. 정부 관계자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기존 형태와 다른 기상재해가 상시화되는 상황을 전제로 한 SOC 예산 증액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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