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김 일병…46년 만에 죽음의 퍼즐 맞춘 사람들

2020.09.26 06:00 입력 2020.09.26 06:01 수정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

‘의문사’ 김 일병…46년 만에 죽음의 퍼즐 맞춘 사람들

1974년 12월14일
12년 전 탈영했다는 이유로
처와 자식이 있던 36세 청년이 헌병대에 끌려갔다
체포 하루도 안 돼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
이틀 뒤인 12월 17일 사망
사망경위서에는 ‘뇌출혈에 따른 뇌부종 및 호흡정지’
군은 그가 ‘병사’했다고 했다

1962년 김모 일병이 탈영했다. 건설현장 등지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내와 함께 자녀를 길렀다. 12년 뒤인 1974년 12월14일, 헌병대가 집에 들이닥쳤다. 김 일병은 육군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현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대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다음날인 15일 점심 무렵 바로 국군수도통합병원(당시 서울 영등포구 등촌동)으로 이송됐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구토 및 전신경련으로 쓰러졌다. 이송 당시 이미 위중한 상태였다. 당직 군의관의 수술 시도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뇌출혈에 따른 뇌부종 및 호흡정지로 17일 사망했다.

체포에서 이송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사망보고서와 매화장보고서, ‘전공상 또는 비전공상 심사의결서’ 등에 적힌 사망 종류는 ‘병사’다. 군은 통지서로 사망 소식을 가족에게 알렸다.

체포 당일 건강했던 36세 청년이 갑자기 병사했다는 통지 내용은 의구심을 살 만했다. 석연치 않은 답답함과 궁금증도 일 법하다. 유족은 40여년이 지난 2018년 진상을 밝혀달라고 했다. 그가 탈영병이었다는 사실이 오랜 시간 진상규명 요청을 망설이게 한 듯하다.

2018년 9월 출범한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군인이 복무 중 사망한 원인이 명확하지 아니하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사고 또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을 한다. 1948년부터 위원회 출범 전까지 일어난 사망 사건이 조사 대상이다. 검찰, 국방부, 경찰 등 기관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들이 조사를 맡는다. 김 일병 사망 사건은 위원회에 접수된 16번째 사건이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파견 근무한 김봉수 조사관(왼쪽부터)과 안성우 전 조사관은 치밀한 조사와 탐문으로 김 일병 사망사건 진실의 일단을 확인했다. 하영수 명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당시 군의관으로 ‘외인사’가 ‘병사’로 조작된 정황을 증언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파견 근무한 김봉수 조사관(왼쪽부터)과 안성우 전 조사관은 치밀한 조사와 탐문으로 김 일병 사망사건 진실의 일단을 확인했다. 하영수 명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당시 군의관으로 ‘외인사’가 ‘병사’로 조작된 정황을 증언했다.

진상위에 16번째로 접수된 ‘김 일병 사건’
조사관들은 ‘역사 연구’하듯 그날을 재구성하기 시작
어? 그런데 사망진단서와 사망경위서의 도장이 다르다!
당시 군의관 진술 확보 뒤 46년 만에 밝혀진 진짜 사인은 ‘외인사’
하지만 누가, 왜, 조작했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특수통’에게도 쉽지 않은 진상규명

2019년 1월부터 1년 동안 위원회에서 파견 근무를 했던 안성우 전 조사관은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전문수사관이다. 특정 수사 분야에서 경력과 능력을 갖춘 이들을 전문수사관으로 인증하는데, 안 전 조사관은 회계수사 전문가로 인증받은 베테랑이다.

지난 22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세검정로 별관에서 기자와 만난 안 전 조사관은 “처음에 파견 근무를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엄청 말렸다”고 했다. 위원회 파견 전까지 경찰청 특수수사과(현 중대범죄수사과)에서 일했다. 경찰 생활 23년 중 15~16년을 수사 현장에서 뛰었다. 지능범죄수사대·사이버범죄수사대 등 범죄 정보를 입수해 자체적으로 수사를 펼치는 인지·특수수사 부서를 두루 거친 ‘특수통’이다. 경찰 수사 분야 중 요직인 특수수사과에 있다가 외부기관에 파견 가면 복귀 이후 인사이동을 감수해야 한다.

“처음에 ‘왜 특수수사과에서 여기에 왔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다른 기관에 지원할 수도 있었는데,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진상을 밝혀주는 일을 하면 보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원회 조사관은 과거 암울한 시대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실을 밝혀주고, 국가가 어느 정도는 보상하도록 돕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사관들은 보통 10건 이상의 사건을 동시에 진행한다. 안 전 조사관은 여러 사건을 함께 맡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사망한 박규원 소위의 전사 사실을 증명하는 일(박 소위는 위원회 진실규명 결정 이후 지난 6월 69년 만에 전사자로 인정됐다)도 담당했다. 김 일병 사건은 파견 한 달 전인 2018년 12월 조사 개시가 결정돼 진정인 조사만 마친 상태였다. 한정된 시간에 다뤄야 할 사건이 적지 않다. 쉬운 일이 아니다.

김 일병 사건의 진정 내용과 당시 사망 정황을 보면서 의혹이 생겼다. 우선 건강한 성인 남성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쓰러진 곳이 서울에 주둔한 수경사의 헌병대 유치장이라는 점도 신경 쓰였다. 특수수사에 잔뼈가 굵었지만 46년 전 사건을 살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경찰 수사가 펄펄 뛰는 현장 탐사라면 위원회에서의 조사는 차분한 역사 연구와 닮았다. 자료가 남아 있을지,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살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자료와 사람을 찾아도 의혹과 의심을 채울 이야기를 해줄지 장담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안 전 조사관은 수사 기본을 따르기로 했다. 사건 핵심에 성급하게 접근하면 수사 상황이 노출될 수 있다는 경험에서 출발했다. 시간대별로 사건을 정리하고 주변 인물부터 조사했다. 처음 참고인 진술을 듣기로 한 건 당시 헌병대에 수감된 다른 수감자들이었다. 김 일병을 본 사람이 있을지 확인해야 했다. 당시 헌병대에 체포되면 겪는 일도 파악해야 했다.

40년도 더 지난 일을 갑자기 묻자 많은 이들이 답변을 거부했다. ‘한 번만 만나달라’ 부탁해도 쉽지 않았다. 꾸준히 연락을 시도한 뒤에야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났다. 어렵게 만난 이들 중 김 일병을 직접 본(또는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당시 헌병대가 체포한 탈영병 등에게 가혹행위와 폭행을 일상적으로 저질렀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흐릿한 기억 속 도장·서명은 확실하다

김 일병 사망이 폭행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육군 기록정보관리단을 통해 처음 받은 자료는 김 일병 사망을 병사로 기록했다. 건강한 남성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는 건 의심스럽지만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서류를 더 꼼꼼히 보며 추가 자료를 찾았다. 그러다 사망진단서를 추가로 군에 요청했다. 사망진단서가 든 우편물을 열어본 그때를 안 전 조사관은 “이 사건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김 일병 사망진단서에는 두부손상과 급성경막하출혈이라는 진단 내용과 함께 사망 종류를 외인사로 기록했다. 외부 손상으로 뇌를 둘러싼 경막 밑에 출혈이 생겼다는 뜻이다. 병이 아니라 폭행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있는 내용이다. 작성자는 당시 김 일병의 치료를 맡았던 군의관 하영수였다. 이 이름은 김 일병 사인이 병사라고 기록된 사망경위서에도 등장했다. 죽음 직후 작성된 사망진단서에는 외인사, 며칠 지나 쓰인 사망경위서에는 병사. 누군가 김 일병의 사인을 외인사에서 병사로 바꾼 것이다.

하영수 명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지난해 10월쯤 어느 날 위원회 조사관이 집 앞에 찾아왔다고 기억했다. 자기소개를 한 뒤 여러 번 출석요구서를 우편으로 보냈지만 답이 없어 직접 왔다고 했다. 우편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기에 위원회에서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그는 짐작하지 못했다. 조사관은 하 교수의 기억에서 이미 흐릿한 40여년 전 국군수도통합병원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이름과 도장이 찍힌 서류를 보여줬다. “이건 내 도장이 맞고…, 이건 아닌데?”

그 조사관이 안 전 조사관이다. 그에겐 하 교수가 첫 중요 참고인 조사였다. 외인사에서 병사로 사인이 바뀌었고 두 장의 서류에 모두 하 교수 이름이 나온다. 사인 조작 경위를 파악하려면 하 교수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중요했다. 하 교수는 1973년 4월 임관해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복무했다. 당시 4~5명의 군의관이 일했는데, 자신이 당직 군의관이었던 1974년 12월15일 김 일병이 이송돼 왔다. 하 교수는 할 수 있던 검사를 다 하고, 수술도 했지만,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보호자와 연락이 닿지 않던 상황이었다. 김 일병 사망 뒤 그는 자신이 검사한 내용으로 진단서에 기록했다.

지난 18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명지병원에서 만난 하 교수는 “40년 넘은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한 건 내가 군의관으로 일하면서 사용한 도장과 다른 도장이 사망경위서에 찍혔다. 사망진단서에 쓰인 도장과 서명은 내 것이 확실했다. 입대 당시 만든 내 도장엔 군번과 이름을 새겼는데, 조작된 도장에는 군번 없이 이름만 쓰였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안 전 조사관과 만난 뒤 위원회를 직접 찾아가 조사에 응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김 일병이 있다

활동 종료 1년을 남긴 진상위가 오늘도 조사 중인 사건은 약 750건.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남은 사건은 영원히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

하 교수 진술로 사인 조작을 밝혔지만, ‘누가’와 ‘왜’를 규명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김 일병을 체포하고 병원으로 이송한 수경사 헌병대 관계자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사에 응한 헌병대 고위 관리자들은 당시 사망 관련 기록을 보고 “사건 처리 절차가 부적절해 보인다. 보고가 제대로 됐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강제수사 권한이 없고, 공소시효도 지난 46년 전 죽음은 온전히 실체를 드러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올해 1월 안 전 조사관이 경찰에 복귀한 뒤, 김봉수 조사관이 사건을 이어받았다. 10여년 수사 경력의 강력계 형사 출신이다. 김 조사관이 정리한 김 일병 사망 사건의 진상규명 결정문은 경찰 근무 당시 쓴 수사보고서를 닮았다. 증거와 사실, 사건 배경을 촘촘히 나열하며 정리했다.

김 조사관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며 말하지 않거나, 조사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자신에게 피해가 되거나 복잡한 일에 휘말릴까봐 숨기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인을 생각해서 이야기해달라’는 설득에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이 별로 없어 조사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김 일병 죽음을 두고 지난 4월 진상규명을 결정했다. 국방부에는 김 일병 순직 심사를 권고했다. 앞서 위원회가 진상을 규명한 죽음들의 이유는 사인 은폐, 사건 축소, 가혹행위와 자해사망 같은 것들이다. 김 일병 같은 의심쩍은 죽음이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지난 14일 진상규명 신청 접수는 마감됐다. 이날까지 받은 진상규명 신청은 1771건이다. 지난 23일 기준 2년의 활동기간 중 조사가 종결된 사건은 478건, 조사 중 사건은 750건이다.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1년 뒤인 2021년 9월13일 위원회 활동은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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