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요양원’ 되찾기 모금운동, 정체성 지키고 누리는 디딤돌

2021.06.11 16:11 입력 2021.06.11 23:13 수정
성우제

성우제의 ‘경계인’

M을 만난 건 2001년이었다. 캐나다 이민을 결정하기 전에 여러 사람한테서 조언을 구하는 와중에 한 친구가 그를 소개해주었다. M은 캐나다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였다. 토론토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건너와 있었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가 특이해 보였다.

토론토 도심 가까이에 있는 무궁화한인요양원.

토론토 도심 가까이에 있는 무궁화한인요양원.

“내가 누구인지를 잘 몰라서요.”

어릴 적에는 의식하지 않았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고 했다. 생김새는 한국사람이지만 한국말을 거의 못했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M은 한국에 건너왔다고 했다.

‘따로 또 같이’ 문화 지향 캐나다
이민자들 고유 문화 유지 권장
정체성 지키게 주정부서 지원
한인 2세 ‘이유 있는 한국 찾기’

외국인에 넘어갔던 한인 요양원
모금 목표 초과 달성 다시 인수
젊은세대 기부 동참 결속 계기
제2, 제3의 요양원 설립 ‘탄력’

그는 서울의 어학원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2년 넘게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선생’이 되어 매주 한 번씩 1년 가까이 만났다. M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한국문화를 빠르게 습득했다. 어떤 때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이야기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한국사람들은 봄이 가는 것을 많이 아쉬워하나 봐요.” 그는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의 노래와 영화와 시(기형도)가 모두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는 한국문화를 배우려는 그의 열의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왜 그가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굳이 그것을 배우려 하는지 궁금했다. 한국공부는 그의 전공이나 취업과도 상관이 없었다. 2년 후 M은 캐나다로 돌아와 대학원에 들어갔다.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몇년 전 캐나다 정부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도 그와 연락을 하며 지내는데 M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제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것 하나가 그때 한국에 건너간 거예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정체 모를 답답함과 불안감에 여전히 시달렸을 것이라고 했다.

이민자의 나라인 캐나다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되는 문화가 하나 있다.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살러왔으면 ‘과거’를 잊고 이곳 문화에 빨리 적응해야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캐나다 사회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민자들로 하여금 자기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계속 유지하며 살도록 권장한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지원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민자들이 각자 자기 색깔을 유지하면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행복하고 사회적으로도 더 낫다는 얘기다. 내 정체성을 잊거나 모르고 산다면 개인은 M처럼 답답함과 불안감 같은 것에 시달릴 수 있고, 그것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집단스트레스로 터져나올 수도 있다.

말하자면 캐나다 사회는 전형적인 ‘따로 또 같이’ 문화를 지향한다. 캐나다 시민으로서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며 누리도록 권장하고 지원한다. 이곳 교육청 주관으로 운영되는 한글학교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12층 건물에서 지하 2층과 1층, 4~6층을 요양원 시설로 사용 중이다. 최근 온타리오주 한인사회는 외국인에게 넘어갔던 요양원을 되찾았다. 그 과정은 감동적인 드라마 같았다.

12층 건물에서 지하 2층과 1층, 4~6층을 요양원 시설로 사용 중이다. 최근 온타리오주 한인사회는 외국인에게 넘어갔던 요양원을 되찾았다. 그 과정은 감동적인 드라마 같았다.

1971년 캐나다가 세계 최초로 다문화주의를 선언하고 ‘모자이크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토론토 한인사회에서 크고 뜻깊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한인전용 요양원 ‘되찾기’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2개월 만에 500만달러(약 46억원)가 넘는 기부금이 모였다.

1967년 한국사람들에게 문호가 공식적으로 열리면서 캐나다 한인 이민 역사가 본격화한 이래, 최단 기간에 가장 많은 기금을 모아 ‘무궁화한인요양원’을 한인사회로 되찾아왔다.

‘되찾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온타리오주 한인사회가 설립·운영했던 한인전용 요양원이 자금난으로 인해 외국인 회사에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요양원의 역사는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건립위원회가 출범하고 10년 뒤 온타리오 주정부로부터 침상 50개를 배당받았다(이후 60개로 증가). 그것은 곧 주정부가 침상 1개당 1년에 5만달러(약 4600만원)를 지원하면서 운영자금의 90%를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나머지는 입주자 개인연금 등으로 충당). 온타리오주 한인사회는 토론토 도심 가까이에 부지를 마련하고 12층 건물을 올렸다. 그 가운데 4개 층이 요양원 시설이었고 나머지는 임대 아파트로 사용되었다.

2005년 7월 착공식을 하고 4년 후 요양원 입주가 시작되었으나 예상보다 늘어난 공사비를 제때 갚지 못하는 바람에 몇년 만에 부도가 나고 말았다. 주정부는 운영자금의 대부분을 지원해주는 만큼 관리·감독을 엄격하게 한다. 한인 요양원은 바로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2018년 법정관리 회사는 입찰을 공고했다. 한인사회는 무궁화한인요양원 인수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헌·신장전문의)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벌였다. 2개월여 만에 360만달러가 모였다. 당시로서는 최단 기간, 최고 모금액이었다.

그러나 2019년 입찰에서 한인사회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실망은 컸다. 그것은 한인 간호사·간병인들이 상주하는 ‘준병원 시설’ 요양원에서 장기적인 치료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한국노인들의 희망, 나아가 한인사회의 희망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요양원 입주자들이 우리 음식·우리말 등 한국문화 속에서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높은 삶의 질과 직결된다. 입주자 처지에서는 모국 문화 속에서 보살핌을 받는 것만큼 복받은 일도 드물다.

외국인과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거나 캐나다 주류문화에 익숙하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과 불편함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계 캐나다 청년 M이 일부러 한국에 찾아가 2년여 시간을 보낸 것과 맥이 닿는 문제인 것이다. 한국인 입주자가 한국음식을 먹고 우리말로 소통·교류하고 한국식으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캐나다 요양원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이다.

현재 보유한 침상 60개로는 수요에 턱없이 부족(현재 대기자만 해도 160명에 이른다)하기도 하지만, 그마저 잃는다면 앞으로 한인사회는 한인전용 요양원에 대한 희망을 접어야만 하는 절박한 처지였다. 중국 커뮤니티는 한인사회와 비슷한 시기에 전용 요양원을 설립해 지금은 1500여 침상을 운영 중이고, 웬만한 나라 커뮤니티 치고 자기네 요양원을 갖추지 않은 곳은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격이나 캐나다 한인사회의 위상에 견주어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한번 얻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더 이상 같은 기회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각국 커뮤니티에 똑같은 기회를 주고 그것을 잘 운영하는 곳에는 지원을 확대하는 반면,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곳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금 낭비일 수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한인사회를 제치고 무궁화한인요양원을 낙찰·인수한 곳은 유대인들이 주인인 ‘리카케어센터’라는 영리 회사였다. 비록 무궁화요양원에 한인들이 입주해 있으나, 사설 요양원을 10여개 운영하는 그 회사가 외국인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시설을 다른 곳에 넘길 수도 있었다. 한인사회로서는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기회가 극적으로 다시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사태 덕분이었다. 리카케어센터가 운영하는 요양원들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다행히도 무궁화한인요양원에서는 사망자나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리카케어센터의 운영에 문제를 제기하는 항의가 빗발쳤다. 한인 어르신들을 그 회사에 맡긴 한인사회의 우려가 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단 탄원서를 제출하는 방식 등으로 불만 여론이 들끓으면 정치인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리카케어센터는 올해 초 한인사회의 인수위원회를 접촉해 매각 의사를 전했다. 총 인수비용은 800만달러. 낙찰 금액에서 약간의 비용을 더한 좋은 조건이었다. 3월16일 인수위원회는 이 같은 사실을 공표하고 450만달러를 목표(나머지 금액은 은행융자로 충당)로 한 모금운동에 다시 돌입했다. 개인이나 교회 및 동창회 모임 등에서 기부금을 다시 내면서도 목표액 달성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모금을 하기에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록다운으로 사회 분위기가 얼어붙었고, 특히 자영업자 대다수는 가게 문을 닫고 정부의 재난지원금으로 살아가는 처지였다. 게다가 모금기간도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위기상황에서 가구유통회사 대표 최등용씨가 100만달러(약 9억2000만원)를 기부했다는 소식이 한인사회에 알려졌다. 캐나다 한인 이민 역사상 가장 큰 기부였다. 최 대표의 기부 뉴스는 모금 분위기를 살리는 기폭제였다. 한인사회는 목표액 450만달러를 넘어 500만달러를 모으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M과 같은 한국인 2세 청년들이 무궁화한인요양원 되찾기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들은 탄원서 제출 등을 통해 한인사회의 여론을 정치인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주도했고, 인수작업에 실무자로 포진해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했다. 나아가 이번에 되찾은 요양원을 발판 삼아 제2, 제3의 한인 요양원 설립을 위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모금방안을 속속 내놓고 있다. M도 몇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무궁화한인요양원에 10만달러(약 9200만원)를 기부했다.

이번에 토론토에서 이루어진 무궁화한인요양원 재인수는 이곳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60개 침상을 되찾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캐나다라는 이민사회에서 자기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궁화한인요양원 되찾기는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해준 과정이었다. 더불어 일단 뜻을 모으기만 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DNA를 새삼 확인한 일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로 보자면, 이번에 되찾은 요양원을 시작으로 제2, 제3의 요양원을 설립하겠다는 구상이 비단 꿈만은 아닐 것이다.

아쉬운 것은, 토론토 한인들의 이 같은 절박한 움직임을 주토론토 대한민국총영사관이나 토론토에 나와 있는 한국 기업들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는 사실이다. 중국 커뮤니티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모두가 한몸이 되어 움직인다. 중국인전용 요양원들은 침상도 많고 그것을 계속 늘려가고 있거니와,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된다는 평까지 듣고 있다.



[다른 삶]‘한인 요양원’ 되찾기 모금운동, 정체성 지키고 누리는 디딤돌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원(原)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6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5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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