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섬싱 뉴’라 여긴다”는 이곳 청년들…현실도 진짜 그랬던가

2021.06.26 06:00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일하는 게 꿈”이라는 ‘K팝 키드’ 줄리가 사는 마을. 누사프니다에서도 유독 고즈넉한 곳이다.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일하는 게 꿈”이라는 ‘K팝 키드’ 줄리가 사는 마을. 누사프니다에서도 유독 고즈넉한 곳이다.

식료품점에 갔다. 인상이 훤하고 말수가 적은 주인 남자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40대 초반쯤 되었을까. 계산대에 물건을 내려놓자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이라고 답하자, 주인은 그러길 바랐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거의 설레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표정이 무얼 뜻하는지 안다. 내가 암구호를 대듯 짧게 물었다.

“블랙핑크?”

주인은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추려 애쓰면서 대답했다.

“아니… 내가 아니고 내 친구가….”

나는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하며 가게를 떠났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이곳에서 한국인이라는 소리에 덮어놓고 반색하는 사람을 보면 드라마 팬이겠거니 했다. 주로 30~40대 여성이었다. 그때 “그래요, 나는 당신의 취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껏 기쁨을 표현해 보세요”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암구호는 공유나 현빈이었다. 요즘은 연령, 성별, 스타일에 따라 BTS, 블랙핑크를 번갈아 사용한다.

로컬들만 K컬처에 열광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발리의 국제학교에 다니는 유럽 출신이나 다문화가정 청소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빌리 아이리시와 BTS가 함께 담겨 있었다. 자식이 좋다니까 덩달아 K팝에 관심을 갖는 엄마, ‘한국팝이고 미국팝이고 팝은 다 싫다’는 아빠도 만났다. 그중 어느 프랑스인 재즈광 아저씨는 이런 말을 했다.

BTS·블랙핑크 등 K팝 덕분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환대를 받는 곳 ‘누사프니다’

식당 서빙하는 줄리는 ‘아미’다
“한국에 가서 일하는 게 꿈인데
물가도 비싸니 아마 어렵겠죠?”

언젠가 이들이 한국에 갔을 때
새롭고 깨끗한 나라에 더해
관용과 기회의 나라로 느끼기를

“발리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좋아. 프랑스였다면 벌써 온갖 약물에 손댔을 텐데 우리 애들은 맥주도 안 마시거든. 그런데 애들 음악 취향이 형편없어지는 건 불만이야.”

또 다른 유럽 아저씨는 집에서 파티를 하다가 열다섯 살 딸이 BTS 노래를 틀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는 EDM광이다. “게이 같은 애들이 1980년대 스타일 옷을 입고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왜 보는지 이해가 안 된다. 팝문화는 인간을 단순 무지하게 만든다. 저 음악들은 5년만 지나도 촌스러워서 못 들어줄 것이다.”

지난 4월에 있었던 누사프니다 지역 밴드의 콘서트. 출생률 대국답게 작은 섬이라 해도 젊은이들이 많고, 그에 비해 문화 시설은 부족해 이런 행사가 열릴 때면 북새통을 이룬다.

지난 4월에 있었던 누사프니다 지역 밴드의 콘서트. 출생률 대국답게 작은 섬이라 해도 젊은이들이 많고, 그에 비해 문화 시설은 부족해 이런 행사가 열릴 때면 북새통을 이룬다.

그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내용은 음악을 튼 아이를 무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중재에 나섰다.

“당신의 말에는 스노비즘, 섹시즘, 에이지즘이 모두 담겼는데 그것들에 대한 반감이야말로 BTS를 시대의 상징으로 밀어올린 힘이고, 그 때문에 BTS 팬들 중에는 엘리트 여성들이 많다. 또한 K팝 팬덤은 소비자나 추종자가 아니라 서포터의 성격을 강하게 띠기 때문에 기존의 생산자-수용자 모델로는 해석이 안 된다. 그러니 K팝이 애들을 망칠 거란 걱정은 하지 마라. 또한 음악은 추억과 함께 각인되는 것이므로 쟤들은 5년 후가 아니라 노인정에 가서도 BTS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래도 팝과는 타협할 기색이 없는 남자에게 나는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K팝 팬들이 트럼프 유세장 좌석을 예약했다가 ‘노쇼’해서 캠페인을 망친 작년 6월 사건을 전한 것이다. 정치인이 아닌 코미디언으로 트럼프를 즐겨 소비하는 그는 이로써 아이들의 플레이리스트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 대중문화를 알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에 대해 얘기 나누는 건 여기선 드문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잡지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연예인 취재 때문에 힘들어 하면 위로하기 바빴는데 요즘은 그들이 만든 잡지가 이곳에서 웃돈이 실려 팔리는 걸 보여준다. “자네는 수출역군이라네. 힘을 내시게. 어쩌다 내한한 할리우드 스타라고 상상하면 까다로운 요구 조건도 납득이 갈 거야.” 그 와중에 유독 인상적인 K팝 팬을 최근에 만났다.

식료품점에 다녀온 날 저녁, 나는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갔다. 한국인으로 치면 오마이걸의 유아씨를 닮았다 싶은 어린 종업원이 나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나는 ‘내가 한국인처럼 생기긴 했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는 내내 종업원이 연예인이라도 목격한 듯 상기된 얼굴로 나를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일본 영화 <사토라레>에서처럼 ‘너에게 말을 걸고 싶어’라는 그의 생각이 온 공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아미(BTS 팬클럽)다. 그가 아미라는 데 내 손목을 걸 수도 있다.’

누사프니다는 기왕에도 한국 손님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코로나19 시국에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다면 한국인과 말을 섞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의 주변 모든 것에 관심이 가는 법. BTS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울까. 나는 그 조바심을 못 본 체하며 느긋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조르르 달려와서 독학으로 깨친 한국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 실사용 해보는 언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발음과 문법이 정확했다.

“한국사람 맞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꿈만 같아요.”

그의 이름은 줄리. 나한테 같이 사진을 찍자며 휴대폰을 꺼낼 때 보니 사진첩에 BTS가 가득했다. 요즘은 배우 박서준이 잘생겨 보이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건 BTS라고. 그는 당연히 한국에 가보고 싶어 한다.

“한국은 너무 아름다워요.”

그런가? 아름다움으로 따지면 인도네시아 청년이 한국을 동경할 일이 없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의아해하는 걸 보고 줄리가 재빨리 덧붙였다.

“한국은 굉장히 깨끗하지 않나요?”

나는 아직 도시를 경험하지 못한 시골 아이들에게 아름다움이란 어떤 의미인지 잊고 있었다. 나도 그 나이대엔 그렇게 서울이 가고 싶지 않았던가.

예전에 술라웨시에서 만난 청년에게 왜 이곳 젊은이들이 한국 여행을 가고 싶어 하냐고 물었을 땐 “우리는 한국이 ‘섬싱 뉴’라고 여긴다”는 답을 들었다. 새롭고 깨끗한 나라라. 이 순간 그 나라의 낡고 더러운 곳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선처럼 들리겠지만 멀리서라도 좋아 보인다는 건 다행이다. 그 후 식당에 갈 때마다 줄리는 나를 격하게 환영해주었다. 어느 날은 그가 물었다.

“한국은 물가가 비싸죠? 교육 시스템도 잘 되어 있고요. 저는 한국 가서 공부하고 일하는 게 꿈인데 아마도 어렵겠지요?”

그는 누사프니다 산골에 산다. 매일 음식점에서 하루 열두 시간 일하고 밤늦게 가로등도 없는 가파른 산길을 따라 스쿠터 타고 귀가한다. 월급은 20만원이 안 된다. 이래서야 한국행 비행기 티켓 값도 모으기 어렵다. 이민자에게 배타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 동남아 사람, 특히 여성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도 떠올랐다.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 알겠나. 이제 와 돌아보면 내가 그 나이 때 예측한 앞날 중 들어맞은 건 단 하나도 없다. 몽상이나 바람, 지레짐작은 한결같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지만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낳았다. 줄리는 젊고, 강한 동기가 있으며 일과 공부에 열심이다. 나는 이곳에서 관광업에 종사하다가 어학을 무기로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사람을 여럿 보았다. 그중에는 한국어를 나보다 유창하게 하는 호텔 주인도 있었는데, 그는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쌓은 인맥을 통해 한국에 가구를 수출하여 돈을 벌었다고 했다. 내가 줄리라면, 지금의 경험과 지식을 유지한 채 그 아이가 된다면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일단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기회를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 말밖에 해줄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진짜 도움이 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줄리 같은 친구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단순히 문화를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에 동경을 품고 배우려는 ‘K팝 키드’ 말이다.

언젠가 그들이 방문했을 때 한국이 새롭고 깨끗할 뿐 아니라 관용의 나라, 기회의 나라이기도 하기를, 그리하여 내가 이곳에서 느끼는 편안함을 그들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삶]“한국을 ‘섬싱 뉴’라 여긴다”는 이곳 청년들…현실도 진짜 그랬던가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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