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모르는 정부' R&D 예산 칼질에 과학계 분통 “애써 진행해온 연구 사장 위기”

2023.08.30 21:04 입력 2023.08.30 21:22 수정

신진 연구자 육성도 ‘적신호’

“현장은 지난 두 달간 혼란 그 자체였어요.”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일하는 10년 차 연구원 A씨는 이 말부터 꺼냈다. 연구·개발(R&D) 사업은 짧으면 3년, 길면 5년 이상의 로드맵에 따라 진행되는데 정부가 이 같은 계획을 무시하고 당장 내년 예산부터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내년도 R&D 분야 사업비를 올해 대비 16.6%인 5조원 이상 삭감한 예산안을 확정하자 과학계에서는 “향후 연구 계획을 세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됐다”는 반응이 나온다. 기초과학 부실화와 예비·현직 연구원들의 진로 이탈로 이어지는 등 이공계 뿌리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R&D 예산 삭감은 예고된 일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당에선 ‘카르텔’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후 다양한 연구기관에서 예산 삭감 압박이 이어졌다. A씨는 30일 “중간점검 평가장에서 ‘내년도 예산을 20% 삭감할 것인지, 연구를 종료할 것인지’ 질문을 받았다는 연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했다. 전날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4년도 예산안에서 R&D 분야 예산 감축은 현실이 됐다.

연구자들은 정부의 ‘과학에 대한 무지’를 비판했다. A씨는 “문제가 있다면 외과 의사처럼 종양을 파악하고 그 부위만 도려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부는 ‘모든 사업의 20%를 삭감하라’거나 ‘신규 사업비를 삭제하라’는 식으로 무차별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5년 동안 돈을 들여 신기술을 개발했지만, 산업계와 연계해 진행해야 하는 2단계 실증연구 예산이 대폭 삭감돼 애써 연구한 것이 사장될 위기에 처한 곳도 있다”고 했다.

정부는 줄인 예산을 바이오·우주·반도체·2차전지·디스플레이 등 첨단 분야에 집중 투입할 방침이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기존에 합의된 연구를 중단하고 새로운 연구를 하려다 보면 졸속으로 이어질 확률이 크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연구과제 설정에만 1년쯤 걸리기 때문이다.

전문생산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하는 20년 차 연구원 B씨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며 “예산을 빼서 다른 데 넣는 건 편 가르기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는 과학기술에 정치를 끌어들여선 ‘진짜 연구’를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B씨는 “전 정부에선 신재생에너지·풍력·태양광 연구가 활발했는데, 그 예산은 다 줄고 원자력 연구에 집중하는 식”이라며 “과학적으로는 신재생에너지 분야 연구도 안정적으로 지속해야 한다”고 했다. 예산 삭감 기조가 연구계 진입을 희망하는 학부·대학원생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비정규직 연구자’를 채용할 여력부터 먼저 줄어들 것이라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예측이다. B씨는 “연구과제에서 프로젝트 비용 일부로 대학원 석·박사들을 계약직으로 채용하는데, 프로젝트가 적어지면 여의치 않아질 수 있다”며 “이공계생들이 경험과 경력을 쌓을 기회가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카이스트 공학 박사과정생 C씨는 “박사과정 중 정부 위탁과제를 많이 하는데, 없어질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C씨는 “삭감 기조가 계속되면 과학으로 국가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온 학생들도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다”며 “이공계에 우수 인력 유입이 줄어들까 걱정”이라고 했다.

연구자와 학생들은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장기적인 연구가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강동재 카이스트 총학생회장은 “당장 결과를 낼 수 없는 실험과 연구도 진행되어야 먼 미래 기술도 준비할 수 있다”며 “‘연구 실패’나 ‘비효율적인 연구’라는 이유로 예산 삭감이 계속되면, 결과가 불투명할 수 있지만 꼭 필요한 ‘창의적인 연구’를 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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