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쓰는 시간

2013.06.19 21:26 입력 2013.06.20 11:34 수정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생각하기, 쓰기, 고치기. 누구나 알고 있는 글쓰기의 세 단계다. 생각하지 않으면 쓸 수 없고, 쓰고 나서 고치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글쓰기 강의 첫 시간이면 이와 관련된 퀴즈를 낸다. 위 세 단계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열에 예닐곱은 쓰기가 가장 어렵다고 답한다. 또 같은 비율로 생각하기가 가장 쉽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글쓰기에서 가장 쉬운 것이 쓰기이고, 가장 어려운 것이 고치기다.

초심자는 대충 생각하고 쓰고(안 써지면 말고), 쓰고 나서는 절대 고치지 않는다. 고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습작기는 자기 글이 보이기 시작할 때 끝난다. 글쓰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더 있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큰코다친다는 피해의식, 방어기제가 의외로 완강하다. 또 다른 진입장벽은 글쓰기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는 것이다. 여태까지 쓰지 않고서도(읽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잘 살아왔는데, 웬 글쓰기람. 작가나 기자가 될 것도 아닌데.

[녹색세상]내가 나를 쓰는 시간

그렇다면 글쓰기는 왜 필요한가. 심리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쓰기는, 내가 나를 만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쓰지 않고서도 나를 만날 수 있다. 병상에 눕거나,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혼자 여행을 떠나거나.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일상을 벗어나야만 가능한 특별한 사건이다. 디지털 문명과 한몸이 된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위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없다. 우리는 ‘나’를 빼앗겼다. ‘나’는 모두 밖에 나가 있다.

성공, 행복, 긍정이 어느새 사회적 압력이 되고 말았다. 꿈과 희망도 스트레스다. 그런데도 국가와 사회는 ‘미래는 오직 너 자신에 달렸다’며 팔짱을 끼고 있다. 성공신화가 배타적 경제논리에 의한 세계적 캠페인이라면, 그리고 이 캠페인에 무작정 동참한다면 우리는 100% 소비자다. 문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억, 공감, 성찰, 상상, 창조와 같은 능력이 소비자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 (무한한) 소비 능력이다.

소비적 주체는 인간의 존엄으로부터 가장 멀리에 있는 인간형이다. 소비자는 가장 왜소한 개인이다. 우울증, 섭식장애, 이혼, 과로사, 자살과 같은 사회 문제는 모든 것을 돈의 논리로 환산하는 소비사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 통장에 잔액이 없으면 문밖출입이 어려운 삶, 그럴듯한 명함을 내밀 수 없으면 주눅이 드는 사회. 소비사회는 타인의 시선이 총알처럼 느껴지는 사회다. 글쓰기의 궁극 목표는 소비의 지옥, 시선의 감옥에서 소비자를 건져내 ‘새로운 나’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은 단순하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열 명 내외의 동아리면 더 좋다. 생애 최고의 순간, 잊을 수 없는 장소, 가장 힘들었던 순간, 다시 마주 하고 싶은 밥상 등을 하나하나 불러내는 것이다. 지난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변화가 일어난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기만 해도 달라진다. 문장, 문단의 완성도는 이차적 문제다. 자존감, 자신감을 강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자신감이 붙으면 관계를 재발견하고, 삶과 사회를 재정의한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결국 남을 위한 글쓰기로 승화한다.

나를 위한 글쓰기가 ‘사회적 글쓰기’의 토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올가을, 서울시가 일부 대학과 함께 설립하는 시민대학에 글쓰기 강좌가 포함된다는 소식이다. 서울 시민과 함께하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치유 프로그램에도 글쓰기가 접목된다.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이 출범한 지 10년 지난 시점, 누구나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에 사회적 글쓰기가 첫발을 내디딘다. 읽기와 쓰기는 혈연이다. 글 쓰는 사회는 책 읽는 사회가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다. 글 쓰는 사람, 생각하는 삶,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 부디 올해가 ‘글쓰는사회만들기 시민행동’이 시작되는 첫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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