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가래나무

2013.06.26 21:44
최성각 |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오십 초반이던 아홉 해 전에 내가 들어온 시골 연구소는 숲속에 있다. 툇골(退谷)이라 부르는데, 그 유래는 조선말 한 선비가 사화(士禍)를 피해 들어왔다가 너무나 궁벽해서 다시 사대부들이 노는 대처로 나간 뒤부터였다. 200여년 전쯤, 누군가 궁벽해 못 견디고 나간 곳이 공교롭게도 내게는 ‘다른 세상’으로 진입한 출구가 되었다.

연구소는 10년도 안되어 ‘숲속의 숲’이 되었다.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고, 앞뒤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나무를 심어댔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 손으로 나무를 심고 그것이 자라는 것을 보고 싶었으나 그런 소박한 바람이 허락되지 않았던 도시에서 보낸 긴 세월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무는 어떤 나무든 한번 자리를 잡으면, 악착같이 살아낸다. 엔간하면 뿌리를 내리고 잎을 열면서 키를 돋운다. 개울에서 간신히 가지를 뻗었다가 장마 때 흘러내려가지 않고 버티는 놈이 있으면 보는 즉시 옮겨 심었고, 산비탈 그늘에서 식은 석양빛이라도 받기 위해 꺽다리처럼 가냘프게 키를 키워 휘청거리는 놈이 있으면 그 또한 옮겨 심었다. 산벚꽃나무도, 앵두나무도, 개복숭아나무도 있지만, 많이 옮겨 심은 게 주로 가래나무와 뽕나무였다. 가래나무는 연구소 언저리에 여섯 그루, 뽕나무는 그보다 많다.

[녹색세상]내 친구, 가래나무

그러나 정색하고 ‘가래나무 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녀석은 여러 가래나무 중 가장 우람하고 큰 키를 자랑하는, 개울가의 가래나무다. 수령은 얼추 70년. 높이는 20m가 넘는다. 지표와 닿은 나무기둥에서부터 부드러운 허공 속으로 시원스럽게 뻗은 수백 갈래 가지들의 길이를 합산한다면 족히 1㎞는 넘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둘레는 작은 시골분교 운동장의 반의 반 정도는 될 것이고, 한 해에 피어올린 나뭇잎들을 다 모은다면 1t 트럭으로 대여섯 대는 될 것이고, 가을에 떨구는 가래알은 얼추 예닐곱 포대가 넘는다. 외양과 한 해의 산출이 그 정도니 땅속 뿌리의 세계는 내 상상력으로는 미치지 않는다. 개울 밑과 앵두댁 논바닥을 거쳐 다른 산의 뿌리들과 필경 얽혀 있을 것이다. 수령을 70년이라 잡은 것은 올해 팔십 후반인 앵두댁 할머니가 열여덟에 시집을 왔을 때 벌써 어린 가래나무가 있었다고 하시니, 계산하기 그리 어렵잖다. 개울을 끼고 있는 연구소 언저리의 여러 가래나무들은 그러니까 이 중심수(中心樹)의 손(孫)들인 셈이다.

그런데 이 가래나무를 유독 내가 친구라고까지 부르며 편애하는 까닭은 단지 그 녀석이 툇골 가래나무의 대종(大宗)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륙 년 전인가, 이 가래나무가 된통 상처를 입은 이후부터였다. 가지들의 일부가 논에 그늘을 드리운다는 이유로 이웃집 논농사 짓는 이들이 가지들을 자르고 난 뒤였다.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우람한 가지들이 잘려나갈 때 이상하게도 나는 내 수족이 잘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필시 과장으로 여기겠지만, 유독 그때 그랬었다. 오랫동안 가래나무는 녹색의 진물을 흘렸다. 벼의 효용성과 지금은 누구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가래나무나 가래알의 효용성은 애초에 견줄 일이 못되었으므로, 묵묵히 나무의 상처를 바라만 보았다. 나는 가래나무 밑동에 낀 축축한 이끼에 손을 얹고 자꾸만 중얼거렸다. “아프지? 하지만 넌 튼튼하니까 곧 아물 거야. 이제 다신 논 쪽으로는 가지를 뻗지 말거라” 하고 중얼거렸다.

수년에 걸쳐 가래나무의 절단면은 천천히 아물어갔고, 다시 풍성하게 잎과 열매를 달아주었다. 통증을 같이 나눈 가래나무와 나 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우정과 이해의 공간이 생겼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나는 가래나무 아래 평상에 드러눕는다. 그러면 어떤 일이 중요한 일이고, 어떤 일이 하찮고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일이라는 것이 선명해진다. 인간과 비인간의 ‘필연적인 간극’을 굳게 믿는 이들은 이런 나를 비웃을 텐데, 나 또한 주저없이 그들을 안타까이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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