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걸’이 될 수 없는 이유

2013.08.05 21:47
김지숙 | 소설가

이효리가 ‘배드걸’을 들고 나왔을 때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최신 트렌드에 다소 느린 나에게 뮤직비디오를 챙겨 보라고 당부하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과연, 뮤직비디오 속의 그녀는 멋있었다. ‘배드걸’은 직역하면 ‘나쁜 여자’이지만 사실 나와 친구들의 눈에 이효리의 콘셉트는 ‘나쁜 여자’가 아닌 ‘멋진 여자’ 정도로 해석됐다. 마냥 순종적인 ‘굿걸’의 반대말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면 나쁜 여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담았을 것이다.

며칠 전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효리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이효리와 이상순이 가족들끼리 간단한 상견례만 하고 결혼식은 따로 하지 않겠다고 밝혔단다. 동물 보호에 채식까지 이슈 메이커인 그녀가 결혼 역시 평범치 않게 하는구나, 싶었다. 대부분 여성인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멋지다는 반응이었다. 이효리의 ‘배드걸’과 ‘미스코리아’를 주제가로 삼고 우리도 ‘배드걸’이 되자는 의지를 다졌다.

[별별시선]‘배드걸’이 될 수 없는 이유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너랑 네 남자친구도 왠지 결혼식 안 올리고 살 것 같아. ‘효리 언니 찬양’ 뒤에 이어진 말이라 듣기가 좋았다. 남자친구와 나는 늘 평범하지 않은 결혼식을 꿈꿔왔다. 그동안 지인들이 결혼식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는지 봐왔다.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화려하고 돈 드는 결혼식이 아니라 장소는 누추해도 독특한 멋과 정성이 있는 결혼식,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결혼식을 꿈꿨다.

문제는 그런 결혼식을 하는 데는 일반적인 결혼식을 하는 것보다 배의 노력이 든다는 점이다. 다들 왜 정석대로 웨딩홀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결혼식을 하기는 싫으니 정화수만 떠놓고 사진이나 한 장 찍어야겠다고, 농담처럼 말하고 다녔는데 그게 친구들 기억 속에 남은 모양이었다.

노래 ‘미스코리아’와 ‘배드걸’을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시선 그리 중요한가요. 망쳐가는 것들 내 잘못 같나요. 다 괜찮아요’라는 가사가 흐를 때, 나는 결심했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결혼식 따위는 과감히 생략하겠다고 선언하듯이 말했다. 남자친구는 반색하면서, 잘 생각했다고, 결혼식에 쓸 돈으로 여행이나 가자고 했다. 나도 ‘효리 언니’만큼 의식있는 여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주에 만난 남자친구와 나는 결혼식을 생략하는 데 걸리는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보기로 했다. 우선 부모님. 부모님이 그간 뿌린 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엄마는 딸내미가 드레스 한 번 못 입으면 속상해하시지 않을까. 남자친구는 이미 부모님에게 얘길 했는데 밑으로 동생 둘이 더 있으니 그 때 거두어 들이시겠다고 했단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 아쉬운 건 너 아니겠냐’며 ‘정 아쉬우면 드레스 빌려서 사진을 한 장 박으라’고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생각보다 부모님은 ‘쿨’했다.

다음은 회사였다. 결혼식을 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결혼식도 안 했다고 하면 동거로 오인하고 신혼여행도 안 보내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혼인신고서라고 들이밀어야 하는 걸까. 그 뒤에는 회사 동료와 상사분들의 질문이 쏟아지겠지.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배드걸’의 자세가 아니므로 감수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남았다. 가장 마지막에 남은 이유는 바로 ‘나의 욕망’이었다. 막상 실행 가능하다고 생각하자, 비로소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결혼 준비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예비신부에게 프러포즈를 할 게 부담된다고 걱정하는 남자동료들을 보면서, 사실 마음 한 편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털사이트에서 ‘이효리’로 검색을 했더니 웨딩 화보가 떴다. 예쁘고, 몸매도 좋은 그녀가 유명 디자이너들의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었다. 이효리처럼 멋진 여자가 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도 나에겐 일종의 ‘판타지’였다. 호텔에서 최신 유행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길 바라는 것만큼이나 ‘판타지’가 반영된 꿈이었다. 이런 내가 과연 배드걸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욕망을 바로 본 뒤, 요 며칠간 나의 주제가였던 ‘배드걸’의 가사가 좀 달리 들렸다. ‘현실의 절망과 욕망 그 어디쯤,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는 여자, 남들이 모르게 애써 웃음 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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