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와 경제민주주의

2015.04.29 23:11 입력 2015.04.29 23:15 수정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비장한 모습으로 출발선에 모여 있는 젊은이들 앞에 허들을 던져주며 속삭인다. “이걸 넘어오면 좋은 일자리를 주지.” 그러나 겨우 허들을 넘은 이들 앞에는 또 다른 허들이 놓인다. 학점이나 토익점수 같은 전통적인 것들도 있지만 직무적성검사니 뭐니 하는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추가된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달려가는 이들 사이에서 뒤처지는 이들은 절망한다. 이제는 아예 처음부터 달리기를 포기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끝없이 늘어나는 허들을 가진 장애물 경주. 청년취업 문제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마치 카툰처럼 떠올리게 되는 서글픈 이미지다. 최근에는 기업체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갖출 것, 구체적으로 이공계 전공자라는 허들이 또 하나 생긴 모양이다. 이제는 오래전에 빈사 상태에 빠진 문·사·철을 넘어 문과 계열 전체가 함께 위기를 맞는 형국이다.

[경제와 세상]인문학의 위기와 경제민주주의

슬프게도 이러한 경향은 커다란 틀에서 보면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기술발전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교육을 잘 받은 소수만이 그에 적응하여 질 높은 일자리를 얻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다수들은 뒤처진다는 경제학 이론이 있다. ‘교육과 기술의 경주’라는 이 이론에서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는 결론 중의 하나는 소득과 일자리의 양극화는 결국 교육이 기술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제대로 된’ 교육을 남들보다 더 많이 받는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첫 번째 함의는 앞선 자에게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뒤처진 자에게는 체념의 미학을 안겨주며, 두 번째 함의는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비효율적인 과잉경쟁(이른바 스펙 쌓기)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라는 책에서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대학졸업장 등과 같은 자격조건의 인플레 현상을 지적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고교졸업자의 80%가 대학에 진학한다는 한국을 든다. 그는 더 많은 교육이 더 많은 기회의 평등은 물론, 첨단기술 경제에 더 잘 적응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좋은 일자리를 가져다준다는 것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을 학교에 더 오래 머물게 함으로써 실업률을 낮추는 데 기여한다고 분석한다. 심지어는 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자금대출이 이루어지는 것은 일종의 이전지출로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지연시키는 역할까지 한다고 하니, 이쯤 되면 학술적 주장을 넘어 신랄한 풍자에 가깝다. 그러나 예의 비극적 카툰의 이미지 탓일까?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교육과 기술의 경주이론보다는 콜린스의 주장으로 향한다.

일개 기업의 직무적성검사에 응시하는 무려 10만명의 수험생들이 다녔을 학원이나 구입했을 문제집 등을 생각하면, 마치 쓸모없는 피라미드를 지었다 부수기만 해도 유효수요가 창출될 거라던 경제학자 케인스의 냉소가 진지한 현실이 되는 곳이 바로 지금 여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국사회 특유의 요인은 하나 더 있다. 정치조직이나 재벌은 물론 사학이나 종교단체 등에 이르기까지 오너체제, 혹은 보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시스템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시쳇말로 ‘까라면 까는’ 이들만이 필요할 뿐, 제 머리로 생각하여 진지하게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껄끄럽게 여겨 제거된다. 이른바 구상, 즉 머리로 생각하는 기능과 실행, 즉 손발을 움직여 일하는 기능은 분리된다.

수직적인 오너시스템에서는 ‘아랫것들’에게 구상의 기능을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수령님이 결정하면 인민대중은 그에 따를 뿐이다! 국회청문회 자리에서 자기 회사 임원을 머슴이라 불렀던 어느 대기업 회장님의 에피소드는 20여년이 지나서도 대기업 오너 출신의 사립대학 이사장이 보낸 광포한 e메일이나 그 대학에 걸린 ‘여러분 대학이나 개혁하세요’ 따위의 천박한 문구 속에 여전히 실존한다. 혹시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교육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가를 실천으로 보여주려던 것이었을까?

다시 장애물 경주를 떠올린다. 과연 그 많은 허들은 어떤 능력을 가려내기 위한 것일까?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일자리가 온갖 천박한 언행을 일삼는 이들의 머슴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인문학의 위기와 경제민주주의가 맞물려 있는 지점이자, 민주주의가 결코 먹고사는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절박한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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